꿈이 이루어지는 길2
서로의 작은 배려가,
지친 인생길을 다시 걷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 Paul Cluny -
산티아고길 여행을 하다 보면 도보 순례자만 있는 게 아니다. 자전거로 여행하는 이들도 종종 만난다.
25일 차에 묵은 폰페라다 공립 알베르게는 180명을 수용하는 대형 숙소였다. 비용도 최소 비용으로 기부금 형태로 운영을 하고 있고 시설도 좋아서 도보 순례자뿐 아니라 자전거를 이용해서 여행하는 순례자에게도 인기가 많은 숙소였다. 공립 알베르게를 사용할 때는 선착순으로 사용이 가능하고 도착한 순서대로 침실을 배정해 준다. 예외적으로 나이가 많은 고령자나 몸이 불편한 분들은 상황에 맞게 저층에 1층 침대를 사용하게 배려를 한다. 우리가 이용하는 날에는 이탈리아에서 온 자전거 단체팀도 우리와 함께 도착을 해서 숙소 배정을 기다렸다.
그날 내게 배정된 침실은 지하 대형 룸으로 50명 정도가 함께 자는 2층 침대로 꽉 채워진 방이었다. 이 큰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잠을 자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상상을 해보니 고된 코 고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특히 알베르게를 이용하면서 처음 만난 자전거 팀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이동 중엔 대화가 어려워서 그런지, 자전거 운행이 끝나고 모이니 곳곳에서 목소리가 크고 소란스러웠다. 저녁에 식사하면서도 술과 와인도 거하게 마시는 걸 보고 보니 걱정이 더 되었다.
공립 알베르게는 저녁 10시 되면 소등이 되고 이동이 제한된다. 10시 넘어 불이 꺼지고 조금 지나자 곳곳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진동하기 시작됐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서울에서 갖고 온 귀마개를 꺼내 귀를 꼭 막아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특히 내 옆 침대에는 장거리 도보로 최근 몸이 안 좋아 힘들어하는 산티아고 원정대 멤버가 있었는데 그분이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게 안쓰러웠다. 결국 참다 참다 못 참고 나는 갖고 다니던 셀카봉을 길게 늘어뜨리고 천둥소리를 내는 주인공을 찾아 나섰다. 곳곳에서 소리가 심하게 났지만 특히 유독 심했던 부근을 가니 2층 침대 위, 거인처럼 덩치 큰 외국인은 아마도 이탈리안 자전거 팀에 한 명으로 추측이 되었다. 워낙 덩치가 커서 겁이 조금 났지만 용기 내어 다리를 툭툭 건드리자 깜짝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잠들어 버렸다.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새벽 세 시가 넘자 다시 굉음이 터졌다. 나는 또다시 일어나 그의 다리를 툭툭치고 소리가 안 나게 하고 공동 룸을 나와 밤새 불침번을 서듯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사실 내가 하는 행동이 산티아고 순례자 여행길의 예의에는 어긋나는 줄 알았지만 함께 걷는 이들을 위해 필요한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꼭 당부하고 싶다. 걷기 여행이나 자전거 여행을 하는 분들. 특히 산티아고 길을 꿈꾸는 사람들은 본인이 코를 고는 걸 안다면, 비용이 들더라도 개별방을 쓰거나 소리를 줄일 수 있는 도구를 챙겨가는 배려를 해주면 좋겠다.
잠 못 이룬 밤의 대가로 나의 다크 서클은 길게 늘어졌고 걷는 걸음은 허공을 걷는 것처럼 허우적대며 힘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걷고 있을 때 옆에서 함께 숙소를 썼던 원정대 분이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본인도 아껴먹는 비타민을 건네며 힘내라고 했다. 작은 알약과 주황빛 즙 한 병을 마시자 정말 힘이 불끈 솟는 것 같았다. 이날은 비타민의 힘으로 걸어낸 하루였다.
그렇게 26일 차에 주황색 비타민 약물의 도움을 받아 도착한 곳은 몇 년 전 ‘스페인 하숙’ 촬영지로 알려진 비야프랑카 델 피에르소 산속 마을이었다. 처음엔 어디가 스페인 하숙에 나온 곳인지 찾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숙소로 정한 호텔의 뒤편을 알베르게로 개조해서 촬영장소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알베르게가 없어졌지만 둘러보니 방송으로 보던 풍경이라 더 친숙했고, 마을 곳곳이 아기자기하고 더 정겹게 느껴졌다.
편하게 지내려고 온 게 아니라 인생의 많은 것을 느끼고 싶어 걷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새벽에 셀카봉으로 천둥소리 내던 불청객의 다리를 툭 치며 깨운 건 타인을 위한 용기였을까? 아니면 작은 불편도 견디지 못하는 나의 부족함 때문이었을까? 두 마음이 교차했다.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살면서 내가 받은 도움을 어떻게 기억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힘든 오늘 길에서 받은 비타민 한 병은 단순한 약이 아니었다. 그 작은 배려 하나가 끝까지 걷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26일 차에 들어서며 산티아고 대성당이 가까워질수록 도착하는 마을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힘든 길을 같이 걸으며 자주 마주치는 얼굴들이 늘어나 반가운 인사와 웃음이 오고 갔다. 작은 마을의 광장은 작은 축제처럼 환해졌고, 오늘 하루도 그렇게 따뜻하게 마무리되었다.
잠 못 잔 하루가 오히려 깨닫게 했다. 불편 속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작은 배려가 큰 힘이 된다는 것. 결국 그 밤의 천둥소리는, 나를 더 단단하게 두드린 울림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