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이루어지는 길2
감사하는 마음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 존 템플턴 -
산티아고길 24일차
오늘은 아스토르가에서 폰세바돈까지, 26km 구간이다.
아스토르가를 나서면 작은 마을들이 이어진다. 4km쯤 걸으면 바가 있는 마을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본격적인 산길이 열린다. 처음엔 완만했지만, 라바날 델 까미노 이후 폰세바돈까지 5.6km는 제법 가파르다. 그래서 라바날에서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산길로 들어섰다. 오늘 걷는 길은 산티아고길에서 상징적으로 중요한 ‘철의 십자가’로 향하는 길목으로도 유명하다.
오늘로 24일째, 537.1km를 걸었다. 평온하던 들길이 갑자기 가파른 오르막으로 바뀌자 배낭은 더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뜨거운 햇볕에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려도,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힘겹게 오르던 길 중턱에 탁 트인 풍경이 눈앞에 열리는데 가슴이 뻥 뚫리는 해방감이 들었다. 산 중턱에서 바라본 푸른 하늘과 솜 같은 구름, 길가에 핀 작은 들꽃들은 내가 마치 스위스 알프스를 걷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왔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힘든 길일수록 나와 더 깊이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오늘 걸은 이 구간은 단순한 산길이 아니라, 몸은 무거워지지만 마음은 무엇인가를 비우면서 내려놓는 시간처럼 와닿았다.
그래서였을까? 풍경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다른 세상 다른 공간에 온 것 같았고 유독 아름답게 느껴지는 길이다.
길을 걸으면서 각자의 무거운 배낭을 메고 묵묵히 걷는 순례자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길에 오게 된 사연은 달라도 같은 바람을 맞으며 같은 길을 걷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궁금증이 피어오른다.
저 등에 멘 커다란 배낭보다 무거운 보이지 않는 짐들은 무엇일까?
어떤 이유로 이 길에 올 결심을 했을까? 나는 또 왜 이 길에 서 있는 걸까?
걷다 보니 오래 전의 길이 떠올랐다. 2000년 초, 청와대 경호실에 들어가고 싶어 노량진에서 2년을 버텼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대통령을 지키는 일이 내게는 의미있고 멋져 보였다. 하지만 시험에 번번이 떨어졌고, 결국 그 길은 닫혀버렸다. 그 때만해도 세상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 시절을 지금 돌아보니 가지 못한 그 길이 새로운 길의 시작이었다. 좌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이 길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내 가지 못한 길은 그때에는 아픈 상처였지만, 시간이 흘러 보니 새로운 길의 문이 되어 주었다.
문득 상상해 본다. 그 시절 힘들어하던 나에게 지금의 내가 말을 건다면 어떤 말을 해주면 좋을까?
“너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넘어져도 괜찮아. 일어나 다시 걸으면 된다.”
앞으로의 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맞는 길인지 틀린 길인지는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다. 후회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단 하나. 감사하는 마음만은 놓치지 않고 주어진 길을 걷고 싶다.
오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주어진 26km 걷게 되었다.
산아래 풍경이 멋져 보이는 숙소 앞에 서서 왼편 가슴을 조용히 토닥이며 혼잣말을 해본다.
“그래, 오늘도 힘들었지만 잘 걸어왔다.”
내일은 마침내 ‘철의 십자가’를 만나게 된다.
그 곳에는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갖고 집에서 부터 갖고온 돌들이 무수히 쌓여 있다고 한다.나도 서울에서부터 가져온 작은 돌멩이 하나가 배낭 깊숙한 곳에 있다.
나는 거기에 돌맹이 함께 무엇을 내려놓고 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