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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길이 내 이름을 부른다

꿈이 이루어지는 길2

by 폴 클루니

길 위에서 찾은 이름이

나를 새롭게 만든다.


- Paul Cluny -


산티아고길 15일차


오늘은 까스트로헤리즈에서 프로미스타까지, 메세타 24km 구간이다.
기온은 어제보다 조금 내려가 최저 3도, 최고 14도. 쌀쌀한 공기에 옷을 든든히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날씨는 차가웠지만 공기는 맑고 깨끗해 걷기 좋은 날이었다.

기분 좋게 걷다 첫 번째 쉼터에서 쉬는데, 문득 손미나 님의『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 책 내용 중 마음에 들어 메모해 둔 문장이 떠올랐다.

"카미노는 네가 원하는 걸 주지 않는다. 대신, 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을 줄 것이다.
그러니 원하는 게 뭔지 고민하는 대신, 이 길이 주는 걸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즐기는 것도 좋을 거야.”


‘그래, 굳이 고민하지 말자. 그냥 즐기면서 걷기만 하자.’ 이렇게 다짐하자마자 우습게도 마음속에 물음표 하나가 피어올랐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건 뭘까?’

메세타 평야는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 푸른 하늘과 뭉실뭉실 떠다니는 구름, 시야 끝까지 펼쳐진 들판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
이 풍경 이 시간을 휴대폰에 담아보려 해도 그 빛깔과 바람, 공기는 담기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오늘은 ‘산티아고길의 들꽃 사진작가’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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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꽃, 보라 꽃, 붉은 꽃, 하얀 꽃... 길가에 피어난 다양한 꽃들을 정신없이 찍다가

문득 그 꽃들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그때 길 위에 쓰인 낯설면서도 반가운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함께 걷는 원정대 누군가가 나를 위해 커다랗게 써놓고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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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부르지 않고, 잊고 지냈던 이름.
오랫동안 그 이름으로 살다 보니, 정형화된 틀 속에 갇혀 사는 듯 답답했다. 늘 성실하게 열심히 살려고 애썼지만, 지금의 모습은 내가 원하는 모습과는 달랐다. 원치 않는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고 마음과 감정을 더 솔직하게 표현하며 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산티아고 길을 준비 하며, 긴 여행 동안은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다. 불러주는 이름에 따라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처음에는 취미 모임에서부터 본명 대신 ‘클루니’를 썼다. 사람들이 열에 아홉은 조지 클루니를 떠올려, 차별화를 위해 성당 세례명 ‘바오로’의 영문 ‘폴’을 붙였다. 그렇게 ‘폴 클루니’가 되었다.


길 위에 쓰인 이름을 바라보는데,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다양한 호칭이 떠올랐다.
성당에서는 ‘OOO 바오로’, 딸에게는 ‘OO 아빠’, 회사에서는 '팀장'이나 '대표', 모임에서는 '회장',

이 길에서는 ‘폴 클루니’.
그리고 언젠가 이루고 싶은 ‘스마일드림복지재단의 OOO 이사장’.


그 많은 이름 중 어떤 것이 내 마음을 가장 뛰게 만들었을까?

어떤 호칭이 내가 원하는 호칭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짜 이름’은 단순히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가족, 친구, 내가 지나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이름이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실패와 성취를 함께 견뎌온 이름.

그래서 오래 잊고 지냈어도, 그 이름은 여전히 내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바람에 흔들리는 다양한 들꽃들이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잘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 믿고 싶었지만, 사실 꽤 잘 변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과 호칭에 따라 내 생각과 행동, 태도가 변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어떤 이름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들 눈에 그럴듯하게 보이는 직함이나 이름이 아니라, 내 마음과 삶이 담긴 이름으로 살고 싶다. 힘들 때 등을 토닥이고, 기쁠 때 함께 웃어줄 수 있고 든든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중요한 건 그 이름 속에 내가 온전히 담겨 있는 것이다.


어느새 프로미스타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 길 위에서 찾은 건 꽃의 이름이 아니라, 내가 잊고 있던 ‘진짜 이름’이었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따뜻함이, 다시 나를 걷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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