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이루어지는 길2
작은 도움 하나가,
힘겨운 인생길을 다시 걷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 Paul Cluny -
산티아고길이 20일을 넘어가면서부터 몸에서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무릎이 부어오르고 발목에도 통증이 자주 찾아왔다. 배낭 무게에 눌린 어깨도 욱신거렸다. 아침에는 4~5℃ 로 시작하지만 한낮에는 24℃ 이상으로 치솟아, 움츠려서 시작한 몸은 걷기 시작하면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루를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기운이 떨어질 때면 ‘내가 간절히 원해서 온 길이야, 조금만 더 가면 된다’며 스스로를 달래 보지만, 하루하루가 조금씩 버거워졌다.
27일 차. 오늘은 20km 남짓 걷는 이번 여정 중 가장 짧은 코스였다. 도착한 라스 에레이라스는 아주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알베르게는 소박했지만 깨끗하고 정겨웠다. 오는 길에 숙소가 4km 정도 남았을 때 소문난 파에야 맛집이 부근에 있다고 추천을 받아 함께 걷던 친구들과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먼지와 땀에 젖은 트레킹화를 벗어버리고 배낭에 넣어 놓은 슬리퍼까지 꺼내 갈아 신고 늦은 점심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메뉴판에 맛있어 보이는 해산물 파에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에 먼저 시원한 레몬 맥주를 시켰다. 갈증이 나서 먼저 맥주 한 모금을 마시는데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탄산의 상쾌함에 온몸의 통증이 사라지고 세상 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순간을 맞이했다. 잠시 기다리자 커다란 프라이팬 위로 붉그스레 매콤하게 볶아진 파에야가 나왔고 우리들은 배고픔에 말도 없이 순식간에 먹어버리고 어느새 바닥을 긁고 있었다.
그렇게 늦은 점심식사를 느긋하게 즐기고 다시 출발해서 4km 걸어 숙소에 도착해 배낭을 옆에 내려놓고 트레킹화를 벗고 슬리퍼를 꺼내려는 순간 불길한 느낌이 스쳤다. 좀 전에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면서 편하게 먹는다고 슬리퍼를 갈아 신고는 바보처럼 챙기질 못하고 그대로 두고 온 게 생각이 났다. 그 순간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그냥 잊고 다음 마을에서 새로 슬리퍼를 살까 고민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국을 떠나 여행을 시작하면서 33일 동안 답답한 트레킹화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준 소중한 친구였는데 이렇게 헤어지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최근에 새롭게 길 동무가 된 마법 지팡이를 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해는 여전히 뜨겁게 내리쬐고, 땀은 다시 머리에서 목을 타고 등을 지나 아래로 흘러내렸다. 통증으로 다리가 많이 무거웠지만, 슬리퍼와의 의리를 위해 참고 견디며 도착한 레스토랑 구석, 내가 앉았던 자리 안쪽에 하얀 슬리퍼가 고이 놓여 있었다. 반가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혹시 갔는데 그게 없으면 어떻게 하나 내심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걷기도 전에 고통이 밀려왔다. 다리가 버텨줄 것 같지 않았지만 늦으면 더 감당이 안될 것 같아 길을 나섰다. 갈증이 심해져서 부근 슈퍼마켓에서 시원한 음료를 사려고 가는데 반갑고 익숙하게 보이는 현대자동차 투싼 차량이 마트 앞에 주차를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한국 브랜드의 차를 스페인 시골 마을에서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가웠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스페인 현지 60대 정도의 선한 인상을 가진 신사분이었다. 빠르게 마트에 들어가서 시원한 환타를 하나 사서 나와 갈증을 달래며 그분을 기다렸다. 그분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스마트폰의 번역기를 켜고 스페인어로 부탁을 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순례자입니다. 숙소가 4km 떨어져 있는데, 무릎에 통증이 심해져 걷기가 힘든데 혹시 태워 주실 수 있을까요?”
그분은 1도 고민도없이 환하게 웃으며 타고 가자고 손짓했다. 고마움에 사례를 하고 싶어 지갑을 꺼내 들었더니 손사래를 치며 마다해서 연신 고맙다는 인사만 했다. 그 분이 영어를 전혀 못하셔서 소통은 잘 안되었지만 눈빛과 손짓만으로도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을 떠나고 처음 타보는 승용차. 그것도 이 낯선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 만난 현대자동차 투싼이라니... 신기했고 차에 오르는 순간 몸이 가볍게 하늘을 나는 듯했고 순간 이동을 하듯 어느새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다시 내려서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건네고 차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천사가 따로 없구나. 내가 만난 저분이 길 위에 천사구나. 만약 저분을 못 만났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내 삶의 고비마다 수많은 도움을 받으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내 인생에 정말 고마운 천사들이 정말 많이 있었구나.' 하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도 앞으로 좀 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며 숙소에 들어서는데 마침 여정을 함께하고 있는 산티아고 원정대의 동행 중 올리 님의 생일이라고 다들 모여서 작은 생일 축하 파티가 시작되었다.
나도 작은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 출발하면서 매일 스마일 하며 지내고 싶은 마음에 '엄지 척하는 스마일 배지'를 갖고 와서 휴식을 취할 때마다 매일 가슴에 달고 다녔는데 그 배지를 올리 님께 작은 마음을 담아 전해드렸다. 앞으로 엄지 척하며 더 웃고 행복해지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