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이루어지는 길2
선택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어이없는 선택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 Paul Cluny -
오늘로 33일 차, 735.4km를 걸어왔다. 이제 남은 거리는 42km, 단 이틀 남았다.
하루 일교차가 20℃ 이상 나지만, 첫날 피레네 산맥에서 폭설을 만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맑고 청명한 날씨였다. 여러 번 이 길을 걸은 분들도 이번 순례길 날씨가 유난히 좋았다고 하니, 여러모로 운이 좋았던 셈이다. 최근 들어 낮 기온이 확연히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한여름에 오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길을 걸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함께한 원정대 중 한 분은 몇 년 전 여름에도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다고 했다. 어떻게 무더운 여름에 이 길이 좋을 수 있을까? 사계절마다 다른 매력을 품은 길이라서, 설명하기 더 어려운지도 모른다.
걷다 보니 멜리데라는 작은 마을에 들어섰다. 갈리시아 지방에서 뿔뽀(문어) 요리로 유명한 곳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함께 식사할 친구들을 기다리는 동안 부근에 성당이 있어 들렸는데, 마침 주일 미사 시간이라 운 좋게 참석할 수 있었다. 이 길 위에서는 매일 걷다 보니 요일 감각이 사라져 주일 미사도 오랜만이었다.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불과 이틀을 남긴 시점에, 무탈하게 미사를 드릴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한 마음이 컸다.
미사를 마친 뒤 기다리던 친구들을 만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뿔뽀 요리와 다양한 메뉴를 주문하자 금세 음식이 나왔는데, 특히 방금 잡아 삶아낸 듯한 문어는 탱글탱글 한 식감이 즐기다보면 어느새 사르르 녹는것 같았다. 순례자들이 왜 이 레스토랑을 으뜸 맛집으로 꼽는지 알 수 있었다. 뿔뽀 요리에 시원한 맥주까지 곁들여 거하게 점심 만찬을 즐긴 뒤 다시 길을 걸었다. 땀을 흘리며 도착한 리바디소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지만, 별이 잘 보이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여정의 끝이 가까워서인지 걷는 동안, 쉬는 동안, 아쉬움과 설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두려움이 교차했다.
길을 함께 걷고 있는 히어로가 원정대 스텝으로 이번 순례길에 대한 인터뷰를 부탁했다. 이번 여정에서 큰 도움을 받았기에 기꺼이 응하기로 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마을 초입의 개울 위 돌다리에 위에 앉아 이런 저런 질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히어로가 나에게 준 질문이다.
첫째, 이번 산티아고 순례길의 전체적인 소감은 무엇일까요?
둘째, 가장 크게 얻은 한 가지, 혹은 변화는 무엇일까요?
셋째, 행복했던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넷째, 이후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혹은 자신만의 노란 화살표를 발견했을까요?
짧은 시간에 답하기엔 깊은 질문들이라 쉽지 않았지만, 그동안 느낀 생각들을 편하게 이야기하며 남은 시간 동안 좀 더 생각해보며 정리를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질문으로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게 도와주고, 애써 인터뷰까지 해준 히어로가 고마워 시원한 음료라도 사주고 싶었다. 여행 막바지라 경비도 바닥나고 동전을 살펴보니 음료수 한 개 값 밖에 남지 않았다. 작은 마을이라 마트도 없어 알베르게에 있는 자판기 앞에서 히어로에게 마시고 싶은 음료를 고르라고 했다. 그는 괜찮다며 나에게 되려 선택권을 양보했지만 몇 번 더 권하자 “그럼 콜라로 마실 게요”라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정말 어이없게도 위에 있던 콜라 버튼 대신 불편한 위치에 있던 환타 버튼을 눌러버린거였다. 자판기에는 위에 콜라 버튼이 세 개, 그아래 환타 버튼은 단 하나였는데, 하필 그걸 눌러버린 것이다. 당황해서 취소 버튼을 계속 눌러댔지만 이미 우당탕 소리와 함께 환타가 내려왔다. 한국에서는 오렌지 함유량이 낮아 자주 찾지 않던 환타였지만, 스페인 환타는 오렌지 함유량이 높아 더 즐겨 마시게 되었다. 그래도 히어로는 나의 어이없는 선택을 두고 웃으며 말했다.
“클루니! 그냥 드시고 싶은 거 누르시지, 왜 저한 테 선택하라고 하셨어요? ㅎㅎㅎ”
결국 우리는 자판기 앞에서 한참을 웃었다. 아마 앞으로 환타를 볼 때마다, 오늘의 이 엉뚱한 선택과 그 순간의 웃음이 평생 기억날 것 같다.
길 위에서 남는 건 결국 발걸음의 숫자가 아니라 함께한 순간순간인것 같다. 환타 한 캔에도 웃음을 나눌 수 있었던 오늘처럼, 소소한 일상에 웃음과 감사로 채워진 하루가 또 하나의 노란 화살표가 되어 나를 좋은 길로 이끌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