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북조선은 특별했다. 하늘과 땅의 좋은 기운을 모두 받은, 역사상 가장 다이나믹하던 한 세기였다. 전투 정신만 앞세우던 독기가 수그러들고, ‘김일성 아버지’의 푸근한 웃음을 앞세워 친한 척, 형제애를 강조했다. 역대 최악의 수해를 입은 남한에 구호물자를 보낸 84년을 시작으로, 이듬해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깜짝쇼도 벌였다. 서울 올림픽 때문에 해외에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도 무너졌다. 화해무드를 타고 본격적인 이미지 개선 외교가 시작됬다. 반복되는 기근과 선진 기술의 부족으로 퇴화되던 북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변화였을지도 모른다.
독일, 스위스, 네델란드, 벨기에까지 직접 찾아다니며 수교를 맺었고, 민간인을 앞세워 교황을 방문하기도 했다. 세계 외신의 긍정적인 평가 아래, 남북한 두 나라 사이도 조금은 긴장이 누그러졌다. 일본에서 개최된 세계 탁구 대회에 남북 단일팀으로 출전했고, 가수와 무용단이 왕래했다. 두 나라 정상의 약속대로, 1991년 여름, 마침내 남북한은 동시 유앤가입이라는 놀라운 성과도 올렸다. 지하 벙커처럼 꽉 막혔던 북녘에 바깥 바람이 불어들기 시작했다. 어느날 갑자기 치마 저고리를 입고 나타난 임수경이나 1001 마리의 소떼를 몰고 온 정주영은 처벌 걱정없이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남북의 영웅’ 이었다. 이쯤되어 혹시모를 ‘개방’이나 ‘통일’의 가능성을 꿈꾸는 이도 생겼다.
상위 0.1프로... 그 곳 사람들 역시 분주했다. 자칫 너무 나서다가는 불순분자로 몰릴 지 몰라 자중하면서도, 또 이때를 놓치면 영영 뒤쳐질지 모른다는 고민에 빠졌다. 87년생 연희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대를 이어 조국과 당을 위해 일해왔다. 막강한 군 장성이나 김씨 일가의 혈연은 아니지만,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 주체사상을 가르쳤던 연희의 할아버지 덕에, 아버지와 큰 아버지 모두 주요 공직에 있었다. 안전하고, 평화롭고, 풍족했다. 굳이 비교할 때 둘 중 조금 더 ‘출세’ 했던 큰아버지는, 외국을 옆집처럼 드나들었다. 공식적인 직함은 ‘외교관’ 지만, 실상은 탈북민을 잡아들이거나 외화를 모아오는, 당시 관리들이 흔히 하던 ‘뒷일’이 주된 업무였다. 어려서 아이를 잃은 큰아버지 댁은 단 둘 뿐인 피붙이인 연희와 연정이를 무척 아꼈다. 가끔 귀국 할 때면 잊지않고 귀한 물건을 한아름씩 풀어놓았다.
빨간 깃발이 그려진 까만 세단을 기다리며, 이번에는 무엇을 가져 오실까.. 보채는 연정이를 달랬다. 조금 더 자랐으니 한 치수 큰 실크 치파오일까, 지난번에 약속하신 독일산 새 라디오는 사셨나… 베이징에서 고가에 거래된다는 황산 모봉차쯤은 연희에게는 흔한 것이었다. 그래도 보통 사람들은 쉽게 구할 수 없어, 아버지는 포장 된 그대로를 들고 가 윗사람들에게 선물하곤 했다. 자매는 모봉차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쭉, 한살 두살 먹어가며 더욱 고대하는 것은, 오목조목하니 예쁘게 생긴, 화려한 색의 향초였다. 전기가 모자라 평양 한복판 여기저기에도 정전이 잦았다. 인민들이야 밋밋하니 못생긴 승리 양초 하나도 귀했겠지만, 부유층 사람들에게는 살살 코끝을 간지르던 외국산 향초가 인기였다. 반딧불 볼기만한 조그만 심지가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가 좋아, 매일 저녁 향초 가득한 선반 앞에 앉아 전기가 나가기를 기다리곤 했다.
“진작에 저 녀석을 양녀로 들였으면, 지금쯤 스위스에서 공부하고 있을거인데...”
큰 아버지는 연희의 재능을 아까워하셨다. 김일성 일가뿐 아니라 수많은 고위층 자녀들이 이미 스위스, 독일 등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1년 열두달 쉬는 날 없는 해외 근무에 지쳤다면서도, 조카를 바라보는 은은한 미소가 행복해 보였다. 손에 쥐어주는 커다란 종이 가방은 여러 나라의 향초들로 가득했다. 어떤 것은 영어로, 어떤 것은 알 수 없는 그림처럼… 색깔만큼이나 글자도 다양했다.
“연희야, 유학을 못가도 외국말은 배워야 한다. 언제, 어디서 불러도 거뜬하도록, 든든히 준비를 해놓으라. 이대로라면, 너희때는 아마 전세계를 다니게 될 거이야. 네는 특별한 아이니까, 열씸히 노력하면 분명 길이 있다.”
“아무곳도 보내지 않습네다. 애미 죽고 아이들밖에 없는데, 멀리 가면 내래 혼자 어째 삽니까?”
아버지다. 늘 아버지가 문제였다. 해 질 무렵만 되어도 문밖을 서성이며 딸을 기다리고, 십오분 거리의 친구 집도 못 가게 했다. 손바닥 안의 꽃씨 마냥 꼭 쥐고 놓지 않았다.
“저는 큰 아버지처럼 되고 싶습네다. 그래서 공부도 열씸히, 잘 하고 있어요.”
연희는 똑부러지게 답했다. 바깥 세상 이야기 자체가 금기였기에 외국에 대한 지식은 많이 부족했지만,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간다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아버지처럼 재미없는 교수가 아니라, 큰 아버지처럼 외교관이 되어 날고 싶었다. 몇날몇칠을 기차에 시달린다거나, 말이 안 통해 힘든 것 쯤은 걱정도 아니다. 언젠가는 당당히 공안의 호위를 받으며, 당을 위해, 조국을 위해, 멋지게 살고 싶었다.
“위험하다. 크고 탐날수록 위험한 거야.”
큰어머니가 긍정도 부정도 없이 식혜를 내주셨다. 연백 출신의 할머니가 하시던 그 맛이다. 잘게 다진 조갯살과 쌀을 섞고, 대추와 잣, 약간의 소금과 참기름을 두른다. 자작하니 끓였다 식혀 두면, 음료수라기 보다는 삭힌 밥에 가까운, 톡 쏘는 맛이 자꾸 땡기는 특별한 잔치 음식이다. 어머지가 살아 계실적에 어쩌다 한번씩 해주셨던 연안 식혜…
“어머니가 계셨다면 당연히 보내셨을거여요.”
조금은 앙칼지게... 짧고 단호한 한마디를 내뱉고, 식혜를 마신다. 빈그릇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남은 건더기를 모아 입으로 밀어넣는다. 슬쩍... 그릇 너머 아버지의 얼굴을 살핀다.
“어렸을적에, 항상 큰 아버지께 입양한다 하셨어요.”
“일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싫어. 뭐든 안좋은 일이 생기면, 모두가 곤란해 져. 큰 아버지처럼 큰 일 하시는 분들은 그만큼 더 위험하다.”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원망도 했지만, 커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아내없이 혼자 모든 걸 꾸려왔다. 길을 가다 넘어져도 부러졌나 깨졌나 호호 불며 키운 두 딸이다. 명문가 딸들만 데려 간다는 평양 무용단이나 금성 학원조차 지원 못하게 했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커서 의사나 교수와 결혼하라 하셨다.
“요즘은 무역상하는 젊은이도 괜찮아. 출신 좋고, 언변 좋고… 아니면, 내 아는 사람 아들이 군사학교 나와 한창 잘 나가던데, 연희 한번 만나게 해볼까?”
“아닙네다, 형님. 살아보니, 장교나 무역상이 오히려 일 생기기 쉽습네다. 특출 할 거 없이, 그냥 조용하고 무난한 사람이었으면 합네다.”
선생들이란… 연희는 조용히 그릇을 치우고 방으로 들어갔다. 조용하고 무난하다… 한숨이 절로 난다. 정말 아버지는… 종일 책이나 들여다보는 한심한 졸보 (겁쟁이) 다. 절대, 절대… 쌩코 (쌤 ‘선생님’ 의 은어) 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 연희는 버릇처럼, 공책을 펼쳤다. 어릴 적 부터 한장 한장 그려 온 스케치… 외국 사진은 금지된 품목이라 북으로 들여오지 못하지만 그녀에게는 큰 아버지가 있다. 말씀으로만 듣고 그림을 그렸다. 백두산을 닮았다는 스위스의 눈덮힌 산맥, 폴란드의 소세지, 네델란드의 둥근 챙이 달린 모자가 모두 이 안에 있다. 향초 가득한 식탁 위에 놓는다는 한뼘만큼 긴 술잔, 장작을 집 안에 들여 겨울에도 따뜻한 벽난로, 뾰족 지붕 성당 안의 모자이크 유리창… 그녀에게 외국이란, 작은 회색 방 시맨트 속의 유일한 낙원이었다. 가본적 없지만 천국보다 아름다울, 어쩌면 ‘미래’ 라는 것이 가득할, 그런 곳이었다.
큰 아버지의 추천을 받아 평양 외국어 학교에 진학했다. 북조선의 고위층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어를, 추가로 러시아어나 독일어, 혹은 영어를 배운다. 모순으로 보이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영어가 많이 부각되었다. 반미 성향은 여전해도, 적을 알아야 이긴다는 새로운 명분이 대두되었다. 그렇다고 외국어 학교 출신들이 모두 스파이가 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성분이 좋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학교이다 보니, 많은 수가 졸업 후 대학을 가거나, 외화벌이와 관련된 ‘나랏일’을 한다. 90년대부터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인도 많아졌다. 덕분에 고려항공이나 평양 국제 비행장 혹은 목란관 등에 일자리가 부쩍 늘었다. 연희는 쌍둥이 고층 건물로 유명한 고려 호텔로 배치되었다. 타고난 머리와 노력으로 교육기간 이주일동안, 목침만큼 두꺼운 안내 책자를 몽땅 외웠다. 모국어만큼 능숙한 중국어와 북조선 억양이 많이 없는, 고급 영어를 썼다.
“동무는 우리 호텔의 자랑입네다. 조금 더 공부하면 통역가를 해도 되겠습네다.”
연희의 상사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외국 귀빈들을 안내하는 게 그녀의 주업무가 되어갔다.
김정일 위원장에게 세습된 북한은, 방문자에 만족하지않고 직접 해외로 나가 외화를 벌어 오기를 강조했다. 정부 차원에서는 석탄같은 광물을 수출하기도 했지만, 극히 일부였다. 특수 훈련을 받은 북한 용병들이 세계 곳곳으로 팔려나갔고, 국경지역의 중국인을 상대로 아이를 낳아주거나 돈을 받고 결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인신매매만큼이나 매춘도 흔해졌다. 빙두 혹은 얼음이라 불리우는 북한 필로폰도 싼 값에 전 아시아로 퍼졌다. 그나마 합법적이고 이미지 좋은 돈벌이가 음식점이었는데, 음식과 예술공연을 곁들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주로 중립국가들의 주요 도시에 위치했지만, 북한 음식점이라고 굳이 밝히지않고 ‘한국 식당’으로만 알렸기에, 상당수의 손님들은 그곳이 북의 자금줄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베이징에서 큰 인기였던 ‘옥류관’ 이 2007년 네팔에 분점을 냈다. 큰 아버지의 명성과 직장에서 보여준 능력으로, 스물 두살의 연희에게 기회가 왔다. 인민 (초등) 학교 시절부터 예술헤엄 (수중발레) 선수를 지낸 무용 실력도 한 몫 했고, 수준급의 노래도 반응이 좋았다. 요즘도 그렇지만, 해외로 보내지는 북한 여성들은 피부가 희고 쌍꺼풀이 있어야한다. 대부분 스무살 전에 병원을 찾아 수술을 받지만, 연희는 그것도 필요 없었다. 어머니를 쏙 뺀 미모 덕에 고려 호텔의 얼굴인 안내 데스크를 맡았던 그녀였다. 쌍꺼풀은 물론 입술 아래 앙증맞은 오목샘 (보조개)까지, 누가봐도 완벽한, 북한을 대표하는 미녀였다. 반대하는 사람 하나없이, 네팔 옥류관의 직원으로 낙점받고 합숙 교육을 떠났다.
“섭섭하지만 할 수 있나요. 멀리가는 만큼 열씸히 하시라요. 연희동무는 분명 크게 성공할 겁네다.”
호텔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웃고 있지만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사실 그 무렵은 더이상 황금빛 찬란한 탄탄대로가 아니었다. 결핵으로 한참이나 학교를 빠져야했던 아버지가 뒤늦게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였다. 처음부터 병원의 오진이었을거라 의심했다. 기계도, 의사들 수준도 한참 낙후되었으니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부러울 것 없던 ‘고위층’ 이었기에 충격은 더 컸다. 결핵과 폐암도 구분 못하는... 모든게 멈추었다. 치료도, 수술도 너무 늦은, 사형선고였다. 아버지는 천장만 응시하고 누웠다. 가뜩이나 마른 팔뚝에 툭툭 튀어나온 뼈마디와 핏줄이 처참했다. 길건너 아파트에 살며 손주가 자라는 걸 보고싶다던 소박한 소망도 사라졌다. 악재의 연속이었을까. 늘 힘이 되어주던 큰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폴란드 공관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충격은 철저히 무시당했고, 직계 가족이 아니니 유해도 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자식이 없던 두분의 사체는 공안에 의해 ‘잘 처리되었다’고 했다. 당에 바친 삼십년은 그 짧은 전화 한 통으로 다 묻혔다.
남은 건 병상의 아버지와 이제 고등학생인 여동생… 연희는 하루에도 몇번씩, 가서 일해야 한다, 아니다, 저 둘을 두고 혼자 해외를 가는 건 옳지 않다… 를 고민했다. 아버지 역시 많은 생각을 하시는 듯 했다. 이미 오랜 투병으로 쇠약해진 몸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상 교육을 마치고 두 달만에 집으로 돌아왔을때, 아버지가 봉투를 내밀었다. 집을 넘겼다고 했다. 북조선의 집은 개인적으로 사고 팔 수 없지만, 묵인하에 현찰이 오간다. 남한으로 치면 권리금 혹은 프리미엄이다. 전망이나 교통, 전기시설이 좋으면 돈을 더 받고, 이때 필요한 거주 허가증은 약간의 뒷돈을 내면 쉽게 받는다. 성분 좋은 사람들에게는 일도 아니다. 아버지 역시 오랜 친구인 당 간부에게 싸게 팔았다고 했다. 네팔로 떠나는 연희를 대신해 아버지를 돌봐주고, 간단히 장례를 치뤄주는 조건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연희를 앉혀놓고 떠나라 했다. 한 단어, 두 단어… 숨쉬기조차 버거워하던 아버지에게서, 오히려 전에 없던 강한 의지를 보았다. 예전의 그 얌전한, 유약하고 비겁한 모습이 아니셨다.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딸… 아내없이 키웠기에 더 몸을 낮추었던 세월이었다. 험한 일 생길까 묵묵히 시키는 일만 하고 살아온 그가, 임종과 딸의 출국을 동시에 맞닥뜨린 이 상황에, 난생 처음 모험을 하겠다 한다. 살아있는 자를 살릴 수 있는 방법…
“난 죽는다… 동생 챙겨라…”
죽는다, 챙겨라… 죽는다, 동생 잘 챙겨라… 길지 않은 시간, 몇번이고,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끊어지는 말 속에, 깜빡이는 눈 속에, 다른 진심이 깔려있다. 바짝 마른 손가락 끝으로 꼬깃꼬깃 접힌 종이 조각을 건넸다. 착각일까… 아주 짧은 시간이, 아주 느리게 지났다. 연정이가 머물고 있다는 중국 친척집 주소와 전화번호다. 동생은 중학생때부터 중국어 연수라는 명분으로 출입증을 받아 돈을 벌러 다녔다. 이제는 말을 꽤 잘 해 거리에서 직접 단체팀을 모아오기도 하고, 주문을 받거나 간단한 배달도 했다. 그렇게 버는 돈은 다시 국경을 넘어들어올 때 상납금을 주고도 많이 남았다. 아버지는 연정이가 사들고 오는 단동 가락지빵 (도너츠)을 제일 좋아했었다.... 그 집 연락처를, 중국 주소와 전화번호를... 이제 곧 네팔로 떠날 연희에게 전해주었다...?
“연정이도… 넉넉하게 줬다… 여행 가… 둘이 만나서... 좋은 데로 가…”
여행… 좋은 데로 가…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다. 네팔로 일하러 가는 연희에게, 중국에 있는 동생을 만나 ‘좋은 데’ 로 가라… 아아, 아버지… 연정이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방학한지 벌써 한 달이다. 동생은 이미 단동을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번에는 아예 단동에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묻지 않았다. 차가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알아들으시리라 믿으며 눈빛으로 말했다.
‘알겠어요, 아버지. 더이상 말씀 마세요… 제가 꼭…’
간병인과 아버지만 남기고 평양을 떠났다. 복잡한 마음을 숨기고 카투만두에 도착했다. 주방조는 진작에 도착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홀과 공연을 맡은 후발대는 이삼일 연습하며 피로를 풀 계획이었다. 마지막 리허설은 현지의 북조선 공관원들이 참관한다고 했다. 갓 스무살을 넘긴 젊은 여성 열 두명과 남자 조장 둘, 오랜 교육과 여행으로 지친 그들이 플랫폼에 내렸다. 습관대로.. 한줄로 길게 늘어 섰다. 공관에서 나온 요원이 한명씩 여권과 대조해 꼼꼼히 확인을 하고, 길가에 세워놓은 버스를 가르키며 짐을 옮기라고 했다. 버스 옆에는 운전 기사로 보이는 또 다른 젊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먼저 도착한 선발대의 조장급일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또다른 공관 사람…? 주방 인력이 먼저 왔다고만 들었지 몇명 인지는 알 수 없다. 같이 온 조장들까지 합하면 아마 장정들만 열명 이상은 되겠지... 목적지에 도착하면 감시의 눈이 더 많아진다는 얘기다. 힘든 척 옆구리 한쪽을 잡고 가방을 질질 끌었다.
“동무, 죄송한데 제 가방을 좀 실어 주기요. 몸이 안좋아 들기가 곤란합네다. 고맙습네다.”
남자에게 큰 가방을 부탁해 주의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옆에 섰던 동료들도 자신들의 짐을 부탁했다. 가뜩이나 여자들에 둘러싸여 어수선했을 그가 바빠졌다. 남자 조장 하나가 일행 중 네 명을 위생실 (화장실)에 데려갔다 오겠다며 알렸다. 짐을 싣던 남자가 잠시 허리를 펴고 여자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다녀오라 휙 한번 손짓하고 다시 짐을 싣기 시작했다. 작은 가방 두개를 한번에 들고 빈 공간에 쑤셔 넣으려 밀어댔다. 생각보다 쉽지않다… 넣어야 할 짐들이 길바닥 가득 널브러져 있다.
연희는 동지들을 따라 버스 앞문 쪽으로 걷는 척 하다가, 위생실 가는 사람들 뒤로 재빨리 따라 붙었다. 눈치채지 못했는지, 불러 세우는 사람이 없다. 앞서가는 조장이 뒤돌아 보지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검은 머리 사람들 속을 지났다. 혹시라도 그가 눈치채면, 그저 위생실에 가야해서 따라왔다고 답하리라… 머릿속으로 몇번씩 연습을 해본다. 다행히 조장은 앞장 선 여자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조금씩 거리를 두어본다. 와글와글… 웅성웅성… 누구를 목청껏 부르는 남자, 이리저리 뛰는 아이들, 스피커로 흘러 나오는 외국어 방송, 화난 듯한 자동차 경적 소리, 수공예품을 파는 상인… 혼이 쏙 빠지게 번잡한 플랫폼을 가로질러 조장과 네 여자가 건물로 향했다. 지금이다… 방향을 틀어 조금 더 거리를 벌렸다. 인파 속으로, 가방 끄는 어르신 옆으로… 구부러진 어깨가 아버지를 닮았다… 제발…돌아보지마라...
그들과 멀어졌다. 걷기경기(경보)를 하듯, 종종거리는 걸음 걸음 오금이 저렸다. 살아야한다… 숨어야한다… 당당한 척 허리를 꼿꼿히 세워보려 하지만, 겁이 나 고개를 들수가 없다. 시선이 발끝에 꽂힌채로… 당장이라도 누군가 목덜미를 확 잡아 후릴 것 같은 무서움에 눈물까지 고였다. 지금쯤은 위생실로 들어갔겠지… 속도를 올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배낭하나 손가방 하나… 모자달린 미제 옷 (후드티)을 한 껏 당겨 뒤통수를 가리고 본격적으로 뛰었다. 미친 개에 쫓긴다.. 발꿈치가 씹혀 나가는 참을수 없는 공포에 저절로 으아악 소리가 나오려한다... 달리고, 또 달렸다.
평양역만큼이나 복잡한 이 곳에서 목적지도 모르고 마구 달렸다. 저만큼 큰 도로가 나오고, 줄줄이 늘어선 각종 차들 사이에 이제 막 떠나려는 관광 버스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하늘이 핑핑도는 어지러움 속에도, 기적처럼, 앞 유리창에 붙은 손바닥만한 중국 국기를 알아봤다. 살았다… 전력으로 달렸다. 덜커덕… 닫히는 문을 몸으로 막으며 출발하는 버스에 뛰어올랐다.
“쌰오씨! (조심해!)”
깜짝 놀란 기사가 소리쳤다.
“바오치애, 바오치애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헉헉거리긴 했지만 완벽한 중국어… 살짝 눈웃음을 쳤다.
“부 하오이 스 워취 다울라 (제가 좀 늦었어요), 바오치애.”
기사는 헐떡거리는 연희를 한번 흘겨보고는 급히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았다. 혼자 뭐라뭐라 욕을 하는 듯 소리가 들렸지만, 모른척 빈자리를 찾았다. 서서히 핸들이 돌아가고… 버스가 움직였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에 땀을 닦는 척 얼굴을 가렸다. 제일 먼저 커텐을 닫았다. 의자에 앉고 나서야 다리에 힘이 풀린다. 전기처럼, 마비처럼… 심하게 덜덜 떨리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남이 볼까 배낭을 벗어 무릎 위에 얹었다. 다행히 다들 바깥 구경을 하느라 연희에게 관심이 없었다. 식은 땀이 줄줄 흘렀지만 모자를 최대한 바짝 잡아 당겨 눈아래까지 덮었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숨을 고르며 의자에 몸을 맡겼다. 다리도, 허리도, 펴지지 않고 자꾸만 쪼그라 들었다. 태연하게…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다… 숨소리가 너무 큰 것 같다... 괜찮은 척, 태연한척 한다… 천리 길 네팔에서, 그렇게 조국을 등졌다.
시간을 끌기로 했다. 바로 망명을 시작하는 건 더 위험하다고 들었다. 공안을 따돌리느라 네팔의 구석진 시골 마을로만 돌아 다니며 부탄으로 향했다. 일손 부족한 농가나 환경 열악한 고아원 등에서 공짜로 일을 해주며 숙식을 해결했다. 아무리 안전하다해도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사람들과 친해지면 정체가 드러날 수 있다. 절대 금기다. 탈북자는 1, 3, 5, 7… 홀수로 저주가 내린다. 1개월을 못넘기고 발각되고, 3개월안에 팔려가며, 잘 숨어 5개월까지 버티고 나면 죽을 병에 걸리거나, 7개월에 배신을 당해, 9개월이면 정신병을 얻는다 했다. 결국은 1년을 못채운 11개월에 어떻게든 죽는다... 참 잔인한 저주다. 실제로 사방팔방에 탈북자를 찾아 포상받으려는 자들이 득실거렸다.
돈 주고 사는 안내자 (브로커)도 믿을 수 없다. 금액이 적거나 사소하게라도 비위를 건드리면 오히려 그들에 의해 공안에 넘겨졌다. 탈북자의 목숨은 국적을 막론하고 아주 짭짤한 사업 아이템이다. 평양에 살 때, 아파트 한채 값이면 한 가족 모두가 편안히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그렇게 해서 나올 걸… 그때는 귓등으로도 듣지않았었다. 후회스럽다. 준비없이 저지른 일이라 더 막막했다. 하루라도 빨리 동생부터 찾고 싶었지만, 당장은 자기 자신의 앞일도 장담하지 못한다. 한동안은 중국 국경의 친척집도 감시 당할 게 뻔해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매일 밤, 작은 방에 갇혀있는 동생이 울부짖는다. 꿈인 걸 알지만, 꿈에서 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가슴이 찢어진다. 어떤 날은, 딱 세 발자국만큼 떨어져 절대 잡을 수 없는 아버지를 따라 산속을 헤매었다. 촛점없는 눈… 아버지는 한번도 연희를 쳐다보지 않았다. 먼 곳을 응시한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연정이를 찾고 계실까… 나를 원망하실까… 가끔은 예전처럼 반듯하게 다려진 제복을 입고 호텔에서 일하는 꿈을 꾼다.
“왜 벌써 왔습네까? 이왕 멀리 간 거 열씸히 하지 않구?”
“당의 은혜로 감사히 돌아왔습네다. 이제 다 잊고 열심히 살겠습네다.”
자상하던 상사의 표정이 바뀐다. 책상 위 전화기로 손을 뻗는다.
“아니요, 그렇게는 아니되지요. 연희 동무 하나 없어져서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배신의 댓가는 치뤄야합네다. 여보세요? 공안이지요? 여기에 조국을 배신한 자가...”
“잘못했습네다, 용서하시라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네다! 꽁꽁 숨어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습네다!”
중국인으로 위장했다. 잠꼬대도 중국어로 할 만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위장에 뒷돈에.. 간신히 찾아간 부탄의 작은 절에서 탈북민을 많이 돕는다는 스님을 찾았다. 오직 중국어로만 소통하는 이 젊은 여자 역시 탈북자라는 걸 알아챘겠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절과 멀지않은 비밀 장소에 묵으며 따뜻한 숙소와 식사를 제공 받고, 마음을 추스려 나갔다. 사지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평생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큰 위로였고, 감사였다. 수만명의 탈북자가 선택하는 수만가지의 길… 그러나 어차피 한 사람에게는 한가지 길 뿐이다. 한번의 실수에도 증발하듯 사라질거다. 불신과 공포로 끝까지 한국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을 채 절을 떠났다. 스님이 남 얘기 하듯 슬쩍슬쩍 던져준 대로 이곳 저곳을 거치면서 혹시 모를 추격자를 따돌렸다.
생각보다 긴, 숨 쉬고 살아보려니 너무도 아슬아슬게 한 계절이 지나고, 상대적으로 국경 경비가 허술한 미얀마로 내려갔다. 1, 3, 5의 저주대로, 몸과 마음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스트레스와 악몽으로 심한 불면증을 앓았고, 피부병과 위경련, 섭식장애까지 왔지만 병원은 갈 수 없었다. 가로세로 일미터도 안되는 과일 박스 바닥에 몸을 구겨넣고 검문을 피했다. 반 쯤 무너져 비가 새는 외진 폐가에서 쪽잠을 자기도 했다. 태국으로의 밀입국을 도와준다던 사람은 돈만 받고 나타나지 않았고, 관련이 있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탈북자 두 명이 국경 가까이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끝나지않는 공포이고 고문이었다. 지나가는 아시아 남자만 보면 북한 사람일까 숨이 멎었다. 도망다니는 반년 동안, 행복, 기쁨, 자유.. 이런 말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자동차 한 대 값을 주고서야 꽤 실적이 좋다는 안내자 (브로커)를 구했다. 벌써 네번째다. 아버지가 주신 ‘여행경비’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차라리 미얀마 어디 시골에 정착 하는 게 낫지 않을까…아직도 더 믿어야하나… 그가 시킨대로 인적없는 폐가에 숨어 지냈다. 비 쏟아지던 밤, 발목까지 올라오는 진흙탕 똥물을 질척거리며 그를 따라 나섰다. 부실한 우비는 입으나 마나였다. 속옷까지 흠뻑 젖은 채로 따라 들어간 싸구려 모텔에서 그가 숨겨 둔 여권을 꺼냈다. 정교하게 사진을 바꿔붙인 중국 여권이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 했다. 급하게 찍은 싸구려 사진속에 근심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뭔가 해볼 만 하다는 희망을 갖기로 했다. 그는 아무 표정없이 뚱한 얼굴로, 양곤 공항에서 비행기로 국경을 넘는다고 했다. 그의 계획은, 연희를 따로 여행 왔다가 일행을 놓쳐 낙오된 사람으로 속여, 중국에서 온 다른 여행사팀에 웃돈을 주고 끼워 넣는 것이었다.
저 멀리 환하게 아우라지는 양곤 공항을 바라보며, 좀처럼 손에서 여권과 비행기표를 내려놓지 못했다. 내일 아침… 또 한번 사지로 들어간다. 두려움에 식사도 거르고 방에 처박혔다. 혹시 몰라 스탠드까지 옮겨 문앞을 막았다. 몇번이고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계획을 세운다... 그들이 저 문을 부수고 들어오면 창으로 뛰어내려 공항까지 뛴다..?? 눈 앞에 보이는 공항 건물은… 그 역시 절대 안전하지 않다. 그곳은 탈북자들에게 또 하나의 무덤이다. 누가 어디서 손목을 낚아챌지 모른다. 죽음의 냄새를 쫒는 하이애나처럼, 곳곳에 그들이 숨어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모습을 보이면 순식간에 포획 당한다고 했다. 공항에서 잡히거나, 도망 끝에 죽거나… 어떤 이유로든 남한 땅에 내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다 포기하고 이대로 중국 사람이 되어 숨어 살까… 몇 번이고 방문에 바짝 귀를 대고 호텔 복도를 살폈다. 딱 하룻밤만 더 무사히 살수 있다면, 뭐라도 결말이 보일거다. 내일은, 새 삶의 첫 날이거나, 이 끔찍한 삶의 마지막 날이 될거다...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동틀 무렵, 탈북 후 처음으로 단동에 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잡히면 누가 될까 종이는 진작에 버렸고, 수천번 머리 속에서만 되뇌어지던 전화번호… 너무 오래 연락이 없어 죽었을거라 생각했다는 아주머니의 반가움도 잠시, 예상대로 동생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대신 오래전, 아무 연고가 없는 곳에서 편지 한 통이 왔다고 했다. ‘김창선’이라는 사람이 (아마 아버지 이름의 ‘창’자와 어머니 이름의 ‘선’자를 따서 만들었을거다) 건강히 잘 살고 있으며, 다같이 ‘좋은 곳’에서 만나길 고대한다고 했단다. 다같이… 연희를 기다린다는 말일까. 혹은 아버지가 같이 오길 바랬을까? 분명 연정이다. 아버지와 연희에게 전하는 메세지... 편지를 바로 없애버려 주소도 갖고 있지 않다고 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가짜 주소이거나, 진짜이더라도 편지를 보낸 그 순간 바로 떠났을거다. 배운 적은 없지만, 도망자는 끊임없이 어디로든 가야한다는 걸 안다. 본능 같은 거다. 사람이 물을 마셔야 하는 것 처럼, 탈북자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 서둘러 끊으려는 아주머니께 한마디 더 물었다.
“아버지는요? 혹시, 아버지는 어찌되셨나요?”
“돌아가셨겠지. 너 가고 전화 딱 한 번 왔었는데, 숨도 잘 못 쉬더만… 딸들 잘 부탁 한다고, 연락오면 아버지 걱정말고 잘 살으라 하셨다. 꼭 살아라, 알겠지?”
그 말이었다. 간절히 듣고 싶었던 그 말… 걱정마라, 잘 살아라, 꼭 살아라… 그 말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눈물을 닦아내고 또 한번 더 용기를 내어본다. 아버지와 연정이를 위해… 바짝 마른 두 팔을 쭉 뻗어 어깨를 한번 풀어주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자유의 공기를 깊이 들이 마셨다. 한번도 제대로 풀어 본 적 없는 배낭을 다시 둘러멨다. 가보자… 1시, 3시, 5시… 홀수의 저주를 피해 공항 버스를 타고, 홀수의 저주를 피해 공항에 들어섰다. 8개월간의 도피는 그렇게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합류하기로 한 단체 관광객들은 상하이에서 온 중년 여자들이었는데, 원래 친구 사이였는지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연희를 본척 만척 했다. 다행이다… 이대로 몸만 끼어서 가자… 그들의 가이드가 다가왔다.
“첸 씨죠? 엊그제 연락 받았습니다. 어쩌다 일행을 놓쳤어요, 큰일 날 뻔 했네. 방콕 공항까지만 같이 가시구요, 도착하면 바로 환승입니다. 이번에는 잘 따라오세야 되요.”
잠 한잠 못 잔 긴장이 무색하게, 미얀마에서의 출국은 너무도 쉬웠다.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주지 않았다. 가짜 여권도 문제 없었다. 짧은 비행 내내 혹시 모를 질문을 피하기 위해 자는 척 했다. 방콕 공항에서 중년 여자들은 가이드와 함께 상하이로, 연희는 인천을 거쳐 칭타오로 가는 비행기를 타러 각자 다른 길을 갔다. 게이트 앞에는, 한눈에 봐도 한국 사람들이 많았다. 혹시라도 북한 사람인게 티날까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어르신, 여행 다녀오세요? 안 피곤하세요?”
게이트에서 탑승을 기다리던 노부부 옆에 앉아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중국에서도 한참 아래쪽 사투리를 쓴다. 아들네 집에 왔다 가는 데 둘 다 해외 여행이 처음이라 걱정된다고 했다.
“저랑 같이 가시면 되요. 인천에서 갈아 타시죠?”
굳어있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퍼졌다. 연희는 할머니의 여행 이야기를 들어주고, 순간순간 가족 이야기도 지어내면서, 누가보면 정말 딸이라도 되는 양 살갑게 굴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모든 아시아 남자들이 다 북조선 요원들 같았지만, 쳐다보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로는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노부부의 짐까지 들어주며 함께 탑승하고나서야 목숨을 건 숨바꼭질은 끝났다 싶었다. 모처럼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웅웅 거리는 비행기 소음이 자장가 같다…
깊은 잠 속에 5시간이 순식간에 지났다. 비행기는 인천에 내렸고, 조급해진 심장이 쿵쿵 거렸다. 마지막으로 딱 한 곳… 갈 곳이 있다… 만나야 한다… 어디로 갈지, 누구를 만날지는 모른다… 노부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뒤돌아 섰다. 중간중간 제복입은 남자들을 지난다. 경찰인지 항공사 직원인지 알 수가 없다. 상점들이 즐비한 면세점 통로에 들어섰다. 이렇게 생겼구나… 밝은 조명 아래 먼지 한톨 없는 바닥… 저절로 움직여 지나는 통로위로 자기 몸만한 가방을 끌며 서둘러 종종 걸음 걷는 사람들… 이리저리 헤메는 누구도, 막힘없이 갈 길 가는 누구라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초행길 연희도 절대 어색해 보이지 않는 곳이 공항이었다. 내국인이어도 당연하고, 외국인이어도 당연하다… 인천 공항은 숨는 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 처럼, 평온했다.
누구 한 사람 눈 마주치는 일 없이 제일 한가해 보이는 잡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간식거리, 여행 가방, 잡지책… 고려 호텔에서 팔던 품목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뚜벅뚜벅… 아는 사람 찾아가듯,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앞에 선 두 사람이 계산을 마치자, 점원이 연희를 바라봤다.
“손님,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한국말... 어떻게 알았을까… 이곳에서는 한국 사람처럼 보였나보다. 카운터로 바짝 다가섰다. 직원을 보며 딱 두 번,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내쉬었다.
“북에서 왔습네다. 사람 좀 불러주시오.”
침묵이 흘렀다. 1초, 2초, 3초... 마주보고 있던 눈동자가 많이 흔들렸다.
“… 잠시만 기다주십시오. 호출 하겠습니다.”
직원은 작은 목소리로 어디엔가 연락을 하고는, 매장 안에 있던 다른 손님들에게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손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잠시 문을 닫습니다. 다음에 다시 들러주십시오…”
그들을 내보내고 퉁퉁퉁퉁퉁… 철컥... 철컥... 기다란 셔터문이 내려와 잠기는 소리에 눈물이 쏟아졌다. 직원이 다가와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에게 생수 한병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좀 앉으실래요?”
그녀가 가르키는 쪽에 기대 앉을만한 자리가 있었지만, 다리가 움직여 주질 않았다. 연희는 물병을 받아들고 천천히 맨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어지러운지, 몸살인지… 토할 것 같다… 여기다… 정말 다 왔다… 직원이 옆에 다가와 연희를 부축해 벽에 기대게 도와주었다. 매대에 걸려있던 잠바를 가져다 덮어주었다. 직원도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아마 20대 초반 쯤… 비슷한 나이…?
“조금만 참으세요, 오고 있어요…”
제복 입은 남자에게 탈북자임을 다시 한번 밝혔다. 안내받은 사무실에 들어서자, 친절까지는 아니어도 사람 좋아보이는 한 중년 남자가 연희를 맞이했다. 곧이어 여자 경찰 둘이 들어와 몸과 가방을 수색하고 간단한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필요 없어진 중국 여권은 그 자리에서 가져갔다. 두어번 사람이 바뀌고, 전화벨이 울리고, 여러번, 문이 열렸다 닫혔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그들을 따라 어디로 가느냐 묻지도 않고, 검은 색 큰 차에 올랐다. 이미 하루가 다 지나고 있었다. 어둠이 익숙해 두렵지 않다. 환한 조명을 뒤로하고 저높이로 비행기가 사라졌다. 중국..? 태국..? 노부부는 이미 출발 하셨겠지…
다리 건너 부터는 더이상 비행기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몇 배는 더 많아진 불빛… 막힘없이 싱싱 달렸다. 진하게 코팅된 검은 유리 너머로 빠르게 지나치는 자동차 라이트, 빌딩을 가득 채운 화려한 간판, 층층히 쌓인 아파트 불빛…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밝음이었다. 정전 되지 않는 도시, 손전등이나 양초가 필요치 않은 곳… 다행이다… 남조선이다… 문득, 너무 넋놓고 내다보는 것 같은 민망함에 시선을 돌렸다. 차 안의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에 의자 시트 봉제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 그제서야 차가 눈에 들어온다. 푹신한 가죽, 넉넉한 팔걸이, 키에 딱 맞는 등받이… 한국산 자동차 일까… 옆자리의 남자가 담요를 내밀었다.
“피곤하시죠? 많이 가니까 좀 주무세요. 안전합니다.”
안전합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법처럼 잠이 쏟아졌다. 순한 아가처럼, 바로 잠들어가는 자신에 놀란다. 눈꺼풀이 내려오고 머리가 스러진다. 남자가 담요를 펼쳐주는 것 같다. 눈물이 흐르는 것 같지만 닦을 힘도, 눈을 뜰 힘도 없다. 괜찮다. 인사는 다음에 하자… 지금은 이대로, 숨만 쉬고 싶다… 살았다… 그가 말한대로, 나는 … 안전하다…
<에미나이 전편 끝>
* 전에 올렸던 <에미나이> https://brunch.co.kr/@smilekay/65 의 전편입니다. 잊으신 분들을 위해 링크 걸어요.. 먼저 다 써놨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후편을 먼저 올렸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재미로 떠들 이야기가 아니라 조심스럽습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