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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운 May 10. 2021

목련

한번 더 내 품 가득, 그 향을 안으리라

수목장. 자연으로 돌아간다 했다.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으로 돌려준다. 다비를 거행하고, 허무할 만큼 가벼워진 잔재를 가루내어 흙과 섞는다. 구덩이를 판다. 뭉치지 않게 솔솔 풀어 조심스레 흩뿌린다. 지긋이 눌러주는 손끝으로 방울방울 눈물도 심어진다. 나무는, 흙과 뼛가루를 머금고 잘 자랄거다. 다 주지 못한 사랑은 줄기를 타고 올라 잔 가지로 흐를거다. 햇살 받아 잎이 되고 꽃이 되면, 그리운 향으로 다시 태어나 세상을 안아 줄거다. 내 선택이었다. 보통은 밤나무나 소나무를 많이 쓴다고들 했지만, 나는 목련이 좋았다. 튼실하게 자란 몸통 위로, 한껏 꾸민 선녀만큼 화사한 자태를 피울거다. 적막한 절 앞에 하늘 가득한 꽃을 보며 내 식구를 생각하고 싶었다. 그 뽀사시한 얼굴로 모두를 맞아주길 바랬다. 아픈 사람, 힘든 사람… 내게 그랬듯이, 이 절을 찾는 사람들 모두에게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위안을 줄거다.      


아이를 유난히 좋아하던 남편은, 삼남매가 훌쩍 커버리자 눈에 띄게 서운해 하는 것 같았다. 본인은 아니라 했지만, 전처럼 집안에 웃음도 없고, 썰렁하니 둘만 앉아 멀뚱히 야구중계만 보는 날도 생겼다. 아이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하나 더 있었으면… 어린 아기,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남자 아이가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사주에 자식이 많아 분명 아들이 둘 이상 있다고 했지만, 내 몸이 약한 탓에 연이어 유산을 했다. 그중에 하나쯤은 사내 아이라 믿어 정성껏 천도재를 지냈다. 김 아기 一, 김 아기 二, 김 아기 三… 화내지 마라, 서운해 마라... 아가야, 슬프다, 미안하다… 다시 오면 절대 놓치지 않을께… 용하다는 사람에게 약도 많이 지어 먹었지만, 다시 임신하기 힘들었다. 쑥쑥 자란 아이들을 보는 가슴 찡한 보람도 있었지만, 깜찍하고 귀여운, 가슴에 폭 안기는 그 행복은 다시 없을 것 같아 우울했다. 아이들이 노는 뒷자락에 흐뭇한 미소를 보이던 남편에게, 내 탓으로 더 낳을 수 없는 게 미안할 뿐이었다.


용하다는 그림, 부적… 아들 바위를 찾아 청양, 강릉, 지리산… 안가본 곳이 없다. 남편은 싫은 기색도, 그렇다고 부추기는 느낌도 없었지만, 안 생겨도 괜찮으니 속상해하지 말라 했다. 세째마저 국민학교를 들어갔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란 각오로, 입소문 타고 들리던 산골짜기 절을 찾아 백일 불공을 드리기로 했다. 남편이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래도 자매처럼 지내던 미용실 숙이에게 아이들 끼니를 부탁했다. 버스를 몇번이나 갈아타고 멀미를 참아가며, 밤이 되어서야 간신히 문경 너머 산자락에 도착했다. 꼭 낳는다… 딱 하나만 더. 백일간 텃밭의 채소만 먹었다. 일절 아무 딴 생각없이, 불공에만 전념했다.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작은 암자에는 서로 다른 이유로 치성을 드리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새색시처럼 자그마하고 어려보이던 나에게 사람들은 관심을 보였지만, 왜 왔는지, 절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부정탈까봐, 혹은 아이 하나도 없는 다른 사람들이 시샘할까봐, 차마 넷째를 바란다고 할 수는 없었다. 대신 꼭 다문 입으로, 매일 새벽 마당을 쓸고, 공양을 도우며 정성을 바쳤다. 하나만 더 주십시오, 딱 하나만 더.


백일이 지나고 이백일, 삼백일이 되어도, 아이 소식이 없다. 그래, 미신이지. 허튼 생각말고 있는 아이들이나 잘 키우자... 섭한 마음에 하루에도 몇번씩 버리지 못한 작은 옷들을 정리했다. 이 나이에 무슨, 네째는 욕심이지.

“자네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내 참 면목은 없지만...”

고향 사시는 형님 목소리가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눈이 많던 지난 구정부터 유독 남편이 큰댁을 자주 들락거렸다. 건강이 좋지않으시다 하니 이제부터는 명절도 조용히 보낸다며 아이들도, 나도 데려가지 않았다. 많이 안좋으신가... 얼굴 뵌지 한참되었다.   

“주책이야. 남사스러워서 원, 그래서 말인데, 자네한테만 한번 물어보려고."

아기... 내 귀로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백일 치성의 효험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형편에 넷은 힘들어. 애기가 무슨 죄야. 넉넉한 집에서 잘 컸으면 좋겠어.”


오십을 목전에 두신 큰 형님이 늦둥이 아들을 낳았다. 남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 못했다 하신다. 셈을 해보니 암자에 올라갔던 그때쯤이다. 이런게 기적이구나 싶었다. 내 몸이 부실하니 형님께 대신 주셨다는 생각에 단번에 승락했다. 그 주말로 바로 남편이 내려가 아이를 데려왔다. 잠이라도 깨울까 조심조심, 몇년만에, 한줌짜리 갓난아이가 다시 내 품에 안겼다. 시댁 쪽 유전자 그대로 뽀글거리는 곱슬이었다. 허공을 볼때마다 움푹 패이는 진한 쌍꺼풀도 큰 아이들때와 똑같다. 사촌이라 더 다행인, 형누나를 꼭 닮은 막내가 생겼다.


복덩이다. 짝달막한 막대기 하나를 들고 대장 놀이를 하면, 동네 사람들이 초코파이 하나씩 쥐어주었다. 아이가 별로 없던 온 골목골목을, ‘고맙습니다’ 를 외치며 누볐다. 미장원, 다방, 구두방… 저 이뻐하는 사람들을 찾아 온 종일 뛰었다. 겨울이면 어디서 주워 온 정부미 포대를 깔고 앉아 썰매를 탔다. 띠동갑 큰 형의 오래된 동화책을 읽어달라며 넙죽넙죽 아무의 무릎에나 올라 앉았다. 송아지같이 큰 눈을 껌뻑이며 활짝 웃으면, 낡은 소매도, 엉덩이골이 다 들여다보이던 늘어진 고무줄 바지도 고급 아동복처럼 보였다. 부잣집 도련님, 귀티나는 아이, 복 받을 상이라 했다. 복을 부르는 얼굴, 복이 가득한 얼굴… 이 사랑스러운 복덩이를 가끔이라도 큰집에 보여드리는게 예의다 싶었지만, 형님께서 되려 오지말라 못박으셨다. 정들면 안된다, 좋은 부모 만났으니 잘 살면 되었다 하셨다. 솔직한 생각으로는, 고마웠다. 혹시라도 언제고 마음이 변해 아이를 돌려 달라고 할까봐 불안했었다.


“잘 키울께요, 형님, 걱정마세요.”

“자네가 일이 많아서 어째? 힘들어도, 그게 다 공이고 덕이야. 복 받을거야.”

녹슬어 벗겨지는 주황색 공중전화 끝퉁이를 만지작거리며 행여 아이가 따라 나와 엿들을까 주변을 살폈다. 형님의 한숨이 전해져왔다. 눈이 젖었다. 늦게 본 귀한 자식을 보내다니, 불쌍한 분. 가슴 속 재가 됬을거다. 어쩌다 한번 거는 전화도 짧게짧게, 독하게 끊어버리셨다. 이제부턴 명절에도 찾아 올 필요없다며 점점 만날 일을 줄이셨다. 남편도 애 넷을 다 데리고 다니기 힘드니, 큰 아들만 데리고 가겠다 했다. 처음의 죄송스런 마음은 암묵적 허락 아래 비로소 편안해졌다. 의도했든 안했든, 큰집은 마음에서, 머리속에서, 점점 멀어졌다. 내게는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학교 끝날 시간이 되면 막내는 저 멀리 정류장까지 걸어가 버스를 기다렸다. 퐁퐁 물에 요구르트 빨대를 넣어 걸음걸음 비누 방울을 날리며 형누나를 기다렸다. 유난히 작은 누나를 많이 따르고 늘 손을 꼭 잡고 따라다녀, 나중에 장가가기 힘들겠다 우스개 소리도 들었다. 가끔 한번씩은 사남매가 우르르 같이 들어오기도 했다. 어느날, 형 등에 업혀 왕자처럼 신나게 집에 온 아이가 옷자락에 매달려 수다를 시작했다. 바가지만큼 커진 입이 뒤집어것 같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아직은 내 배꼽까지밖에 미치지않는 꼬맹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꼬질꼬질해 하이타이 모델 하라던 말이 듣기 좋았다. 예쁜 놈.

“엄마, 형님이랑 누나들이 말 태워줬어.”

“장난감 말? 그 오십원짜리?”

“응, 두번이나 탔어. 그러고 이렇게 뺑뺑이 도는 거, 그것도.”

“아이구, 동생이라고 그걸 태워줬어? 무슨 돈이 있다고?”

“애들하고 다같이 있었는데, 나만 태워줬어. 딴 애들은 아무도 못 탔다.”


얼굴에 가득한 자랑스러움. 뱃속이 시원하도록 함께 웃었다. 구경만 했을 동네 꼬맹이들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이렇게 커다란 형, 누나들이 있는 것도 다 네 복이다… 아이들은 스프링 말을 참 좋아했었다. 별것도 아닌 말모양 쇳덩이에 앉아 네 다리에 붙은 스프링을 늘었다 줄었다하며 튕기는게 다였다. 둥근 축에 매달려 허공을 빙빙 도는 ‘뱅뱅이’도 달랑 간이 의자 너댓개를 묶어 아저씨가 손으로 돌렸다. 위험해 보여 못타게 했는데, 형이라고 막둥이에게 선심 쓴 모양이다. 별일 아니라는 듯, 어느새 방으로 들어가 숙제를 하는 아이들. 기특한 것들... 다 컸구나... 남편이든 나든, 누구하나 일찍 죽거나 앓아 누워도, 이젠 저것들이 있으니 막내 걱정은 안해도 되겠구나... 눈물이 나왔다. 주책이다.


반백의 머리로 백팔배를 올린다. 남편이 예전같지않다. 위 암 진단 후 노인네처럼 확 움추려든 어깨... 아직도 그가 우리집 대장이라는 걸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남편이 볼까 몰래 땀을 닦는 척, 눈물도 닦아낸다. 우리 막내… 금지옥엽 아끼면서도 늘 가슴 아프고 미안한 아이. 잠시 절을 멈춘다. 아직도 내가 친엄마인줄 알고 있는 순한 녀석. 올 한해도 큰 고비없이, 고등학생 막내를 위해서라도 남편이 치료를 잘 버티게 해주십시오… 백에 도달한다. 남은 여덟번. 하나, 둘, 셋… 잘 될거다… 넷, 다섯, 여섯번… 다 잘될거다… 일곱, 여덟… 되었다… 잘 되어야 한다… 엎드린 채 한동안을 그렇게 있었다. 어깨위로 받들어 올린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숨이 가라앉고 나서야 비로소 허리를 세우고 부처님을 올려다 보았다. 저 미소… 살 것 같다. 도와주실거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은근한 밤바람에 땀이 식었다. 흥건하니 밑으로 흘러 허리춤이 차다.


축축한 눈 언저리를 훔치며 맡는 기분 좋은 냄새. 은근한 향도 향이지만, 오래된 나무같이  친근한 절 특유의 냄새가 있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콧속을 타고 뇌를 지나서 머리 꼭대기까지 맑은 공기가 올라간다. 고민도, 두통도 싹 없애 줄 것 같은, 하루 종일을 맡고 있어도 좋을 것 같은, 내 아버지를 닮은 냄새… 어린 내 손을 잡고 와 절에 온 정성을 다하던 아버지에 비해, 남편은 멀뚱히 앉아 명상만 한다. 젊을때도 그는 삼천은 고사하고 백팔배도 올린 적 없다. 꼭 절을 해야 정성이냐며, 반배 한번 올리고 저 구석으로 가 눈을 감고 있다. 요즘들어 부쩍 부처님쪽은 쳐다도 안 보는 것 같다. 말수도 반은 줄었다. 아픈게 부처님 탓도, 자기 탓도 아닐진데, 괜시리 내게까지 별 말이 없다. 뭔 생각을 그리 하는가... 누가보면 죄라도 지었나 할거다. 몸이 안좋은 건 알지만, 아직 재발도 한번 없었고… 그래, 자식을 넷이나 두고 마음이 안 좋겠지… 머리속이 복잡 할 때마다 한번씩 와르르 토해내야하는 나에 비해, 분명 같은 시간 같은 삶을 살면서도 남편은 한박자 느리게 천천히 갔다. 삼키는 듯, 숨기는 듯… 말 할듯, 안 할듯 한 두툼한 입술, 언제나 저렇게 오래가는 침묵.


“이 사람아, 진정해. 그렇게 팔딱팔딱 난리 칠 거 뭐 있나? 어차피 때되면 가는거, 살아있을 때 잘 하면 됬어.”

누가 암인지 헛갈릴 만큼, 본인은 무덤덤했다. 그리 오래 같이 살았어도 도무지 속을 모르겠다. 심장 작게 태어난 죄로, 늘 긴장하고 놀라는 건 내 몫이다. 평소 코골이가 심한 남편이 유난히 조용히 자는 날이면, 밤새 몇번씩 남편의 코 끝에 손가락을 대어 보기도 하고, 잘 자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깨우기도 했다. 자던 얼굴 그대로, 영원히 가버릴까봐 무서웠다. 안된다. 눈꺼풀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살아야 한다. 암 까짓것, 이긴다… 하루에도 몇번씩 슬펐다, 기뻤다 하면서, 가까스로 부부연 삼십해을 넘겼다. 부정할 수 없이 뚜렷하게 이별이 보일 때,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설득 당할 때, 그래도 끝까지 고집 부려볼까 고민할 때, 혹시나, 설마 하는 복잡한 감정에 시달려 밤잠 설칠 때, 결국 남편은 모른 척하며 조용히 갔다. 바짝 마른 입술을 반쯤 열고, 지긋이 나를 바라보다 유언 한마디 없이 떠났다.


남편이 없는 채로 지냈다. 큰 애들도 살림차려 나가고 휑하니 빈 슬라브 집을, 막둥이가 함께 지켰다. 훤칠하니 잘 자란 아이는 다들 힘들다던 IMF에도 먹고 살만한 곳에 취직했다. 축하한다며, 효도한다며, 젊은 애들이나 가는, 평생 남편과는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시내 경양식집에서 데이트를 했다. 익숙하게, 돈까스를 잘라준다.

“이 칼은 좀 세워서, 앞으로 이렇게 해야 잘 썰어져.”

요 녀석, 누구랑 벌써 많이 해 봤구나. 다 컸다. 장가만 보내면 되겠다. 아빠없이, 남편없이, 우리 둘 다, 참 잘 했다. 창창했다.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출근을 몇 주 앞두고 받은 형식적인 건강검진에서, 한번도 병이라고는 앓아본 적 없은 스물 일곱의 젊은 아이에게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대학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급성 혈액암, 내 아이가, 하필 그 아이가, 그런 병이었다. 골수 이식을 권했지만 당장에 기증자를 찾을 수도 없었고, 대기자 명단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채로 시간만 흘렀다. 어느새 아이는 방 귀퉁이에서 누워만 지냈다. 그 예쁘던 얼굴이 검게 변해갔고 멀건 죽 한모금도 넘기기 힘들어했다. 아이 넷, 어미 된지 사십년, 아직도 자식의 고통을 대신해 줄 방법을 모른다. 깨물지도 않은 손가락이 아플 때는 어떻해야하나. 그저 이렇게 같이 울고만 있는 바보같은 상황이 끔찍했다. 몇번이나 계속 찾아오는 마지막 순간... 또 한번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가 선고되었다. 자꾸만 준비를 하라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준비는, 아무리 여러번 말해도, 아무리 많은 시간을 주어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어도, 절대 준비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아이도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거라 생각했다.        


“형님, 막내 말이에요, 얼마 안남았는데 친부모가 누군지 말해줘야 할 것 같아요.”

어렵게 입을 떼었다. 형님의 긴 한숨이 들렸다. 숨소리만 가득한 침묵에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차마 아이에게 보일 수 없어 꾹꾹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길죽하게 자란 모습으로 나를 위로하던 아이... 부루마블에 열중하던 오목조목한 그 작은 꼬마는 사라졌어도, 아직도 한참이나 어리숙하던 내 막둥이다. 못하는 술이라도 먹고 들어오면 엄마 미안해 하며 이불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던 철없는 녀석에게, 난 네 엄마가 아니다… 말해줘야 한다.

“그 아이, 서방님 아들이야. 예전에 집앞에 머리하던 아가씨 있잖아, 자네 절에 갔을 때 잠깐 그랬다나봐.”

미용실 숙이. 집 비운 동안 아이들 좀 챙겨달라고 부탁했던, 사근사근하니 예쁘던 사람. 서울에 취직했다고 갑자기 떠났는데 그게 아니었나. 어쩐지 자리잡고 연락한다했는데 전화 한통 없었다. 숨길 것이 있었구나.

“못 키운다고 몇번을 거절해도, 갓난 걸 진짜로 안고 온거야, 여기서 자네 몰래 키워달라고. 그게 어떻게 되겠나? 그래서 내가 낳았다고하고 자네한테 보냈어. 내 마음도 편치는 않았지만, 말 안했네. 가시기 전에 다 말씀하시라고 해도, 미안했는지 차마 못하시더라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진정시키려 벽에 기대었다. 맞잡은 두 손이 벌벌 떨렸다. 순식간에 멈춰버린 눈물이 식어 턱 아래로 떨어졌다. 누가 들을까 아주 조용히, 깊게, 길게 숨을 고른다. 남편의 아이… 그래서 큰 아이들과 꼭 닮았었나. 사촌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제보니 너무 똑같던 눈, 코, 입… 길죽한 키부터 곱슬머리까지... 그랬구나, 남편의 아이였구나. 그 사람 참, 다 큰애한테 뭐 해꼬지라도 할까 그랬나, 갈 때라도 슬쩍 한마디 해주지... 잠시 나갔던 혼이 돌아온 듯, 멍하니 앉아 지난 일을 떠올렸다. 그토록 멀리 돌아 내게로 왔나. 남편이 안고 와 내 품에 넘겨 준 아이. 밖에서 낳아 온 것도 모르고 이쁘다, 귀엽다, 물고 빨고 하던 나를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평생을 문지기처럼 곁에 있어주던 든든한 사람을, 이제라도 미워해야하나. 속았다 분하다, 충격으로 기절이라도 해줄까.


두꺼워진 손바닥으로 축축한 뺨을 닦아냈다. 이제와 아무 의미없다. 해 떨어지는 저녁 빛 한 줄기 속에 건너편 경대에 비친 무표정한 얼굴을 본다. 둔해졌다. 억울하지도 않다. 분할 것도 없다. 그래, 늙었다. 남편이 기다리던 게 이거였나. 이렇게 무뎌질때까지 기회를 보고 있었나. 액자 속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무겁게 엉덩이를 끌고 가 유리에 앉은 먼지를 닦아냈다. 할 말이 있는 듯, 물끄러미 날 보고 있다. 이 입술, 이 침묵…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이만큼 살아보니 알겠어요. 팔딱팔딱하던 성질도 다 죽었고, 싸울 사람이 벌써 가고 없으니 나 혼자 뭘 어쩌겠어요. 말 안해준 건 서운하지만, 저 꼴로 누운 아이가 마음 아파 화낼 힘이 없네요. 나쁜 사람... 애비가 되어가지고 그런 병을 주셨소? 혹시, 당신 자식이라고 빨리 데려가려고 그러셨소? 데려다 나한테 줬으니 내 아들이지. 주워왔든 낳아왔든, 이십칠년을 키웠는데... 내가 정말, 애가 아프니 봐주는 거에요. 부처님이 시켜서가 아니고, 당신하고 산 의리로, 진짜로, 다 괜찮네요. 죽냐 사냐 하는 마당에 누구 자식인게 뭐.. 뭐가 중요해요? 이왕 이렇게 된거, 저 가여운 놈이 죽어서 당신 찾아가면, 그때는 내 대신, 내 눈치 볼 거 하나 없이, 마음껏 잘 해줘요.’


흙길을 따라 쉬엄쉬엄 올라 아이를 만난다. 꽃을 준비하는 손톱만한 몽우리에 눈 앞이 흐려진다. 어떻게 기다리나, 어떻게 봐야하나… 해 준 것 없이 그렇게 보냈다. 뭐든, 뭐가 되었든 더 해줬어야 했다. 남들은 이제쯤 잊으라 했지만, 내겐 아직도 오늘이 그 날 같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 가슴만 찢는다. 억울할텐데, 슬플텐데, 무서울텐데, 아무 위안도 되어주지 못했다. 보고싶다, 미안하다, 아프도록 울어봐도, 꿈에서조차 만나지기 힘들다. 짧은 바람에도 휘청이는 나뭇가지가 두 팔 크게 벌려 안으러 온다. 헛것이다. 내가 보는 너도 헛것이고, 네가 보는 나도 헛것이다. 만질 수 없는데, 볼 수가 없는데... 이승 저승이 다를 뿐 곁에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나마 다행이다. 나무이기에, 이승의 나무가 되었기에 다행이다. 만약 네가 동물이라 눈이라도 달렸다면, 그 둥그런 눈망울로 나를 그리워한다면, 한이 되고 화가 되어 또 함께 울었을거다. 다행이다, 나무라서, 네가 나무로 자라서. 눈이 없어 볼 수 없고, 눈물이 없어 울 수 없으니, 너만은 참 다행이다.


‘아들, 잘 있었어? 혼자 겨울나기 춥지? 엄마는 이젠 걸어다니는 것도 힘들다. 그만 너한테 가도 될 것 같은데, 아침마다 자꾸만 눈이 떠져. 이렇게라도 널 볼 수 있어서 좋은가봐.’

남편의 아이로 태어나 내 아이로 죽었다. 올해도 화사한 꽃으로 피어날테니, 한번 더 내 품 가득 그 향을 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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