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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운 Jun 21. 2021

마투리(2) 1948년 경성에 살다

영화 리뷰 ***스포주의***

마투리

부제: 1948년 경성에 살다


시대극/드라마 2021년 여름 개봉 예정

125분 15세 관람가

감독: 오세영

주연: 손호준 (항수) 성준 (국영) 이유영 (서화)


(2부...)


술에 취해 항수를 찾아갔던 일을 하나도 기억 못하는 국영, 오히려 자신에게 삐딱한 항수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서화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의심하게 되고, 어쩌면 둘이 무슨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몹쓸 상상에 잠을 설칩니다. 질투심에 불타는 국영은 말도 안되는 제안을 하죠. 바로 자기 아버지의 백화점에서 전시회를 하자는 건데요, 고향에 돌아갈 여비를 모으라는 솔깃한 제안을 합니다. 한푼이라도 더 모아서 얼른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오빠, 왜 갑자기 그 사람에 관심? 유명하지도 않고.. 백화점 위상이 있지, 그런 길거리 그림쟁이한테 초대전을 해 준다고? 왜? 친해? 착해보이긴 하더라.”


아무도 모르게 혼자, 항수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던 자영은 설레임 반, 의심 반으로 국영에게 진심을 묻습니다.


“안 친해. 그리고 안 착해. 정 선생 친구야. 동생 목숨 구해준 은인이래."

"오오, 짜증 많이 나겠다. 쫀쫀해 보일까봐 대놓고 질투도 못하고...그래서 차라리 친한 척 하는거야?"

"쪼끄만게..? 신경 쓰지마. 남자들 일이야, 힘겨루기 같은 거… 누가 더 센지 분명히 해 줘야 서열 정리가 되지. 그리고, 가끔은 싫어도 대인배처럼, 너그럽게 아랫사람을 챙겨야 점수도 따는 거야.”

“그 사람이 왜 오빠 아랫사람이야? 오빠가 더 어리잖아. 그냥 별로 안 친한 사람이겠지.”


눈치 백단 국영. 뾰로통한 자영의 심기를 바로 알아챕니다. 그렇죠, 안돼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아츠코 유키다. 정신차려. 가난뱅이 환쟁이 따위한테 마음 주지마.”

“아냐, 내가 뭘… (국영의 눈초리에 눈을 피하며) 알어, 알어... 나도 다 알아. 안그래도 좋아하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하는 중이야. 근데 자꾸 생각이 나..”

"너 사람들이 우리 집안 욕하는 거 알지? 가뜩이나 수근수근 없는 말 지어내고 난리도 아닌데, 네가 그런 놈하고 어울리면 경성 바닥에 얼굴도 못 들어. 알아들어? 그 자식은..."  


국영은 크게 한번 야단을 치려다 꾹 참고, 그새 기가 폭 죽은 어린 동생을 타이릅니다.


“그냥, 노력도 하지마. 억지로 노력하면 마음만 더 깊어져. 까짓거, 잠깐 마음 좀 줘도 돼. 진짜 마음만 줘. 이해해, 네 나이에는 잠깐 그럴수도 있어. 괜찮아... 대신, 그 놈 떠나는 날, 니 마음도 떠나는 거야. 그 놈은 내가 보낸다. 아주 멀리... 다신 못 돌아오게. 그러니까 너는 네 마음만 정리해. 할 수 있지?”


국영이 나가고 혼자 남은 방안에서 자영은 화장대 거울 앞에 섭니다. 한동안 자신을 응시하던 그녀가 서랍 속 깊숙한 곳에서 몰래 꺼낸 건 스케치 북... 온통 항수의 얼굴로 꽉 찼네요. 영혼을 담는다… 내 혼을 담는다… 그의 깊은 눈동자를 생각하며 조심스레 채워갑니다.


이런 동생의 속마음을 알리 없는 국영은, 백화점에서 항수를 기다립니다. 전시회 포스터 사진을 찍을 예정인데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최고의 제품으로 치장을 합니다. 일부러 서화를 불러내어 그의 통큰 자비심을 과시하죠. 항수의 머리에 자기가 쓰는 머리 기름까지 직접 발라주는 국영. 하.. 멋있는 척은 혼자 다 하네요.  


국영이 시키는대로 일단은 이렇게 저렇게 포즈를 취해 보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서화가 무척 신경쓰입니다. 서화 역시, 누가 작가인지 모델인지 모를 매력에 잠시 국영에게 심취하지만, 어쩐지 점점 시선이 항수에게 가네요. 벌써 여러번... 국영 몰래 눈이 마주치는 두 사람. 안 본 척 해보지만, 빨개진 귀는 어쩔건가요. 결국 발이 꼬인 항수, 넘어질듯, 기우뚱... 쿵... 아이구...


"괜찮아요, 잠깐 헛딛었어요."

"힘들죠? 수고 많았어요. 이정도면 좋은 거 많이 건질 것 같아요. 옷이랑 물건들은 다 가져가요. 내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아닙니다, 전부 비싼 물건들인데,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뇨, 오늘 사용한거라 다시 팔지 못해요. 고향 갈 때도, 그정도는 차려 입어야 부모님이 좋아하시죠."


선심은 항수에게 쓰면서 계속 서화의 눈치를 살피는 국영. 그런 국영의 의도를 빤히 들여다보는 항수... 이정도면 멋있다 칭찬이라도 기다리는 지, 안쓰러울만큼 티나게 서운해 합니다.

  

"작품 준비는 잘 되고 있죠? 높은 분들께 초대장도 많이 보내니까, 특별히 신경 써주세요."

"안그래도 제 그림이 그렇게 화려한 것들이 아니라서요... 그분들 취향과는 좀 맞지 않을겁니다. 정말 전시회를 해야 한다면, 차라리 자선 모금 같은 걸 하고 싶습니다."

"색을 좀 사용해주세요. 목탄은 너무 어두워서 호불호가 갈리죠. 여사님들은 밝은 색을 좋아하십니다."

"저는 그런 색을 .."

"우리나라 최고의 백화점이고, 최고의 화랑입니다. 믿으세요. 제가 그분들의 취향입니다. 제 말대로 하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오빠~!"


문이 벌컥 열리며 젊은 여자가 뛰어들어오다 멈춰섭니다. 자영이 아닌 다른 여자가, 국영을 오빠라 부르죠. 그물망을 반쯤 덮어 쓴 얼굴에 짙한 화장, 굴곡대로 꽉 줄인 듯 몸에 달라붙은 양장 치마에 요란한 보석... 단번에 여자를 알아본 항수의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날 밤 초상화를 그려달라던 술취한 그 어린 여자...! 서화가 함께 있는 이 자리에까지 부르다니...! 숨길수 없는 분노에 국영을 노려봅니다. 그러나 정작 국영은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맞이합니다.


"괜찮아요, 들어와요... 서화씨, 인사해요. 이쪽은 작년 미스 조선 박초연양, 우리 백화점 모델이에요. 초연씨, 이쪽은 곧 나와 약혼하실 정서화 선생님, 그리고 이쪽은 다음달에 여기서 전시회를 하실 화가 채항수 선생님."


세 사람은 어정쩡하게 인사를 나눕니다. 항수는 혹여나 자신을 알아볼까, 아예 등을 지고 돌아서버립니다.

 

"저한테는 다 가족같은 분들이네요. 이렇게 모인김에 저녁이라도 함께하면 좋겠지만, 오늘은 아는 영화 감독하고 선약이 있어요. 제가 우리 초연양을 배우로 키워 볼 생각입니다. 잘 되면, 그때 크게 한잔 사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서화를 데리고 나오는 항수. 문이 닫히자 초연이 장갑을 벗어 던지며 툴툴거립니다.


"뭐야, 별로 이쁘지도 않은데 뭐가 좋다고 그래?"

"말 조심해. 네 형님 되실 분이야."

"그냥 내가 부인하면 안돼? 나 첩 싫어. 바꿔줘."

"철없다. 네 주제에 한양 백화점 첩 자리면 됬지, 이쁜 거 빼고 내세울 거 뭐 있다고 의사 선생님 자리를 넘봐? 그냥 시키는대로 가만히 들어앉아서, 너 딱 닮은 예쁜 애기들이나 많이 낳아."


초연이 국영의 무릎으로 폴짝 올라앉습니다. 이미 보통 사이가 아닌거 맞죠?


"저 여자는? 저 여자는 애 안 낳아?

"정선생은 나이가 많아. 보통 여자들같으면 애들이 학교 다닐 나이야. 애 못 낳을 수도 있어."

"오빠 미쳤어? 그걸 알면서도 저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애는 네가 낳으면 되잖아. 우리 정선생은, 어디 공식 행사... 우리 집안이 신여성 의사 며느리가 들어왔다... 뭐 그런거면 충분해. 그리고, 내가 본 여자 의사 중에 제일 반반해. 꿀리지 않아."

"나는? 나는 데리고 다니면 많이 꿀려?"

"넌... 좀 부족하지? 아니다, 어쩌면 네가 딱 일거야. 나라 팔아먹은 친일파 집구석 수준에 딱 맞는 미천한 섬 계집애... (진한 키스를 나눈다) 말 잘듣고 이쁜데, 집안은 거지에, 머리는 텅 비었고... 나 안만났으면 어쩔뻔 했냐. 넌 나밖에 없지?"

"응... (키스하며) 난 오빠가 최고야."

"그래, 넌 나한테 최고는 아니지만, 이렇게 작은 유리장에 가둬 두고 나 혼자 즐기는, 내 꼬마 인형... (초연의 키스에 묻히는 말소리)"  

  

한편,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서화는 항수와 함께 집 부근에 도달합니다. 이미 많이 어두워진 골목길... 어김없이 또 삐끗하는 항수...


"조심해요, 잡아드릴까요?"

"아니에요, 잠깐 딴 생각을 했나봐요, 괜찮아요."

"누가보면 꼭 억지로 전시회 하는 것 같아요. 좋은 기회인데 마음이 불편하세요?"

"그냥... 그 백화점이요, 예전에는 일본군의 돈줄이었고, 지금도 친일파들이 운영하는... 아, 꼭 이국영 기자 얘기하는 건 아니구요.."

"해방된지 한참 되어도, 여전히 친일이다 아니다 나눠지네요. 그런거 다 떠나서, 항수씨한테 필요한거니까, 이왕이면 기쁘게 하시는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생각보다 어렵네요. 돈이 필요한 건 맞는데... 고향은 못 가더라도, 서화씨한테 이렇게 얹혀사는 것도 그렇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곧 방 얻어 나갈께요."

"아니에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고.."

"저도 아니에요. 어찌됬든 결혼도 안한 남여가 한집에 사는 거, 남들 보기 이상해요. 전에는 창유라도 있었지만, 떠난지 한참인데 제가 아직 여기 사는 건 잘못이죠. 곧 결혼도 하셔야 하고.."


결혼 얘기가 나오자, 서화는 더이상 답을 하지 못합니다. 안그래도 국영이 항수에게 예민한게 구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곧 부모님께도 인사 드리기로 했는데, 이래저래 좋게 보이지는 않겠지요. 항수가 말을 돌립니다.

 

"제가, 이름이 항수잖아요, 흐르는 물을 거역하는... 남들이 다 한길로 가도, 나는 주관있게, 내 갈 길로 가라고.. 할아버지가 지으셨어요. 대단한 독립 운동가는 아니지만, 부끄럽지 않게 살려 그랬는데.. 광복군까지 하던 제가 이제와서 친일파의 도움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게.."

"거기서 전시회 사는 사람들, 아직도 다 그쪽 사람들이라 더 그러시죠?"

"유명한 사람들이 다 친일이었으니까요. 그래야 유명했고, 살아남았고, 작품을 계속 할 수 있었겠죠. 박원수, 김은호... 형제 조각가 김경승, 김인승... 전부 친일파고, 그 화랑에서만 전시해요. 입장료도 받는데, 교사들 한달 월급이래요. 그런 더러운 무리에 섞이기 싫으면서도... 정말 다른 방법이 없네요."

"좋은거만 생각해요. 돈을 거저 받는거 아니잖아요. 항수씨 그림을, 재능을 파는 거니까, 절대 부끄럽지 않아요. 그 돈으로 좋은 일을 하면 되죠."

"좋은 일이라... 이미 해방도 다 되고.. 그 돈 받아서 써야 할 좋은 일이 뭐가 있을까요?"

"항수씨 작품이요, 더 좋은 작품 계속 만들고.. 다음 세대 가르치고... 그런 좋은 일이면 충분하죠."


잠시 침묵하던 항수가 어렵게 말을 꺼냅니다.

 

"서화씨, 달빛이요, 전에 말한 그 달빛... 눈을 꼭 감고, 앞이 하나도 안보여도 마음에 남는 빛이 있잖아요... 저 이제 그림 그만 하기로 했어요. 이번 전시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돈을 얼마나 벌수있을지, 뭐 사실, 하나라도 팔릴지, 그것도 잘 모르겠지만.. 이제 나머지는, 혼자 빛으로 그리려구요. 마음속에만 보관하게..."


무슨 말을 하는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깊은 뜻이야 잘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뭐가 중요한가요. 그냥 이런 조용한 밤에 둘이 함께 걷는 걸로 충분하잖아요. 달빛도 있으니 마음속 어딘가에 각자의 한 사람씩을 그리면서, 같이 가면 되는 거죠...


****


"이 기자님, 왜 저런걸 써 놓으셨습니까? 저는 외국에서 유학 한 적이 없습니다."


드디어 전시회날, 멋드러진 포스터 사진 아래에 쓰여있는 가짜 학력을 보고, 항수가 따지고 듭니다. 몸에 익은 자연스런 친절함으로 여기저기 인사하며, 별일 아니라는 듯, 국영이 설명합니다.  


"일본군 징병 갔잖아요, 러시아 국경까지. 그러고 탈출해서 중국 가서 광복군 훈련받고.. 그런게 다 경험이고 공부죠. 그림에 영향을 주니까, 유학이 별건가요. 걱정 말아요. 항수씨 그림이 워낙 특이해서, 저 정도 써놔도 다들 믿을거에요."

"하지만, 그건 다 거짓말..."

"쉿... 손님들 오시네요. 인사 잘 드려요. 특별한 분들이니까."

     

그의 말대로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항수의 그림때문이라기 보다는, 한양 백화점의 오랜 인맥으로 끌어모은 VIP들... 그러나 이런 부자 모임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화가 선생님은, 자꾸만 구석으로 숨어들어 사람들을 피합니다. 대신 멋지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국영이 손님을 맞이합니다. 그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은 서화도 행복한 얼굴로 여기저기 함께 인사를 다니네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항수... 마음이 어떨까요..


"화가님, 그림이 정말 특이해요. 어쩌면 색을 이렇게 잘 써요?"

"서양에서는 유화를 이렇게 추상적으로 한다던데, 우리집에, 유화 하나 따로 주문 해도 되죠? 요즘은 유화가 유행이에요.."


가난한 거리의 화가 항수는, 펜이나 연필, 목탄을 주로 씁니다. 값비싼 유화 물감을 구하기도 힘들고, 어디서 배운게 아니라 혼자 끄적거리다 완성시킨, 혼자만의 스타일이기 때문이죠.


"몇년전에 육당 선생이 들여오신 외국 책 있잖아요, <불쌍한 동무 (플란다스의 개)>라는... 목탄이라 인정 못받고 죽어가는 어린 화가... 우리 신인 화가님이 완전 그 분위기신가 봐요."

"어린시절 러시아 눈밭을 거닐며 그림을 그리던, 고독한 젊은 화가? 호호호.."

"저는 색을 좀 많이 넣고 우리 부부 초상화 두 점 해 달라고 했어요. 목탄은 너무 어둡잖아요.."

  

이름만 전시회지, 원조 친일파들의 친목 모임이 되어버립니다. 서로들 돈 자랑을 하느라고, 보란듯이 그림을 주문합니다. 역시, 화랑의 입맛이 그들의 입맛이라고 자신하던 이유가 있었네요. 어차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맞춤 주문을 하는 고객들... 어쩐지 길거리 초상화하고 많이 비슷해집니다. 예쁘게 해주세요, 갸름하게 해주세요, 눈 크게 해주세요...   


"루이스 댁 취향은 내가 잘 아니까, 나한테 맡겨. 화가님은 기본 터치만 하세요. 제가 마무리 할께요."


엄청난 개별 주문에 조수를 자처한 자영.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니만큼, 항수의 그림에 약간의 양념을 얹어 일등급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이 사람들... 그림을 알고는 사는 건가요... 그나저나, 작업을 핑계로 항수와 둘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자영이 걱정되지만, 자영은 오히려 오빠를 안심시킵니다.


"걱정마. 마음은 없고, 목표가 생겼어. 저 사람한테는 있고 나한테는 없는 그거.. 화가의 영혼 말이야. 그것만 빼오면 난 유명한 화가가 될거야."


티격태격 하는 모습에 여전히 신경은 쓰이지만, 그래도 작업에만 몰두하는 무심한 항수를 보며, 지나친 간섭은 안하기로 합니다. 대신 서화를 데리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게 되지요. 불편하고 어려웠지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됩니다.   


"친아들처럼 키웠어도, 쟤는 나 안좋아해요. 반평생 첩으로만 살다가 정부인 된지 얼마 안됬으니까. 난 욕심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우리 자영이만 잘 부탁해요. 너무 늦게 낳아서, 그새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버렸어. 남편 죽고나서 새엄마라고 내쫒아도 할 말 없지만, 우리 자영이는 꼭 좋은데 시집 보내줘요."

"어허, 새 아가자리 앉혀놓고... 이렇게 훌륭한 의사 선생님께서 우리 아들에게 와주신다니 고맙습니다. 경성 의전 출신이시라니 더 반갑구요. 혹시 혼인 후에도 일을 계속 할 생각입니까?"


미처 답을 하기도 전에, 국영의 새어머니가 먼저 이야기 합니다.

 

"뭘 계속 해요? 여자 나이가 있는데 얼른 애부터 낳아야지.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요. 우리같은 사람들은 언제 독살 당할지 모르고.. 얼른 식 빨리 올리고 바로 들어와 살게 해요. 지금 사는 집은 그 미술 선생한테 주던가 하고.. 아무리 은인이래도 그렇지, 다 큰 사람들이 같이 사는거 보기 안좋네요. 그나저나 뭘 하느라 그 나이까지 결혼을 못했어.."

"아, 공부하다 그럴 수도 있지요."

"손이 귀해 손주라도 많이 봐야 한다더니, 그것도 글렀네요."

"어허, 이 사람 참.. 실례가 큽니다. 이해하세요, 요즘 일본이 힘들어지면서, 자영이 유학 문제로 이 사람이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내달에 바로 약혼식하고.. 선생님도 괜찮죠? 우리 국영이가 그렇게 진득하게 기다리는 애는 아니에요.."

     

항수의 그림이 하나씩 완성되고, 서화의 약혼식도 차근차근 준비됩니다. 때마침 도착한 동생 창유의 편지... 사할린에 머문다는 집 주소가 왔습니다. 서화의 만류에도 항수는 미술도구를 정리합니다.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그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 했으니까요. 국영 덕분에 수중에 돈도 충분하고, 서화도 곧 결혼해 이사를 갈터이니, 더이상 그 집에 살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자신은 아무래도 경성에 어울리지 않으니, 창유가 있는 사할린으로 가겠답니다. 차마 잡지도, 그렇다고 기뻐하지도 못하는 서화... 그녀의 약혼식 후에 떠나기로 합니다. 직접  보고 가야 창유에게 대신 말이라도 전해주겠죠.


기다리던 두 사람의 약혼식. 한양 백화점이 떠들석하게 화려한 행사가 거행됩니다. 종로통을 꽉 막아버린 자동차들과 신문에서나 보던 고위 관료들이 몰려 듭니다.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느라 현직 고위 관료 못지않은 호화 파티를 열었습니다. 약혼식이 이정도인데 결혼식은 어떨까 지레 걱정부터 앞섭니다. 빽빽히 늘어선 사진 기사들 사이로, 열심히 펜으로 파티를 기록하는 항수... 아닌 척 해도, 두 사람을 그리는 표정이 어째 밝아 보이지는 않네요. 그때 있는 멋 다 부리고 나타나 슬쩍 시비를 거는 자영.

 

"그림 좋네.. 근데 선생님, 우리 오빠를 너무 못생게 그렸어요. 어유, 그림속에 질투가 그냥 팍팍.. (항수가 쳐다보자) 에이, 농담이에요, 언니를 너무 이쁘게 그렸다 그거죠. 저도 한장 그려주세요. 새벽부터 준비하느라 잠도 잘 못잤는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파티장에서 그나마 자영이 동무가 되어줍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마냥 즐거운 자영에게, 항수는 다음날 떠난다며 작별인사를 합니다. 복잡한 표정의 자영이 애써 슬픔을 감추죠. 모르는 척, 못 본 척... 자신이 쓰던 펜을 건네주고 파티장을 떠납니다. 멀어지는 음악 소리만큼 커져가는 항수의 홀로 걷는 발자국 소리... 어느새 텅빈 집 마당에 들어섭니다. 내일이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봅니다. 자신의 다락방에 올라가 종이를 꺼냅니다. 어두워 글씨가 삐뚤겠지만, 괜찮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많이 어두우니까요.

  

다음날 아침, 카메라는 서울역을 비춥니다. 창유에게 전달 할 물건들까지, 꽤 묵직한 가방들이 걱정입니다.


"혼자 다 들고 가실수 있겠어요? 제가 너무 많이 싼것 같아요."

"가져갈께요. 거기는 추워서 모두 요긴하게 쓸겁니다. 걱정 마세요."


중국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두 사람, 그런데 반대쪽에서 내린 초연을 데리고 나오는 국영과 마주칩니다. 일부러 보여주는 듯 반갑게 흔드는 그녀의 손...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서화 것과 똑같은 반지 하나... 항수가 순간 눈을 감아버립니다. 드디어 터질게 터지나 봅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바바리 코트 자락이 벌어지며 몸체를 드러내버린 둥근 배... 몸 무거워지기 전에 고향 가서 인사하고 왔다며 환하게 웃습니다. 당당하게 국영의 팔짱을 끼고 그녀 앞으로 다가옵니다.


"정 선생님, 약혼식 잘하셨어요? 우리 첫 아이라서요, 아직 몇달 안됬는데 티 막 나죠?"


국영은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않고 먼곳을 봅니다. 이 사람, 어제 서화와 약혼 한 그 남자 맞는 거죠?


"잘가요, 항수씨. 우연찮게 배웅까지 하네요. 이 사람 몸이 무거워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할 말을 잃은 두 사람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광장으로 나갑니다. 차에 오르자마자 초연이 큰소리로 웃기 시작합니다.


"아하하하, 오빠 그 사람들 얼굴 봤어? 아, 속이 다 시원해. 너무 충격받아서 저대로 도망가는거 아냐? 차라리 그러면 좋겠다, 흐흐흐흐.. 약혼식 다음날 이거 완전 똥바가지 썼네, 아하하하..."


반면에, 웃음기 하나 없는 국영. 기사에게 집으로 가라하고 뒤돌아 섭니다. 초연이 소매 끝을 잡습니다.


"어딜가? 나 오빠 애 낳잖아! 혼자 집에 가기 싫어!"

"가. 서화씨랑 할 말 있어."

"무슨 말? 정말 사랑하는 건 나라는 말? 정서화는 의사라서 결혼한다는 말?"

"착각하지 말랬지. 넌 첩이야. 내 아이 낳아주는 여자. 평생토록 두번째일 여자!"

"불공평해! 왜 나한테만 이러고 살으래? 왜 난 오빠 부인이 되면 안돼? 저 여자 사랑하지도 않잖아."

"아닌 척 하는거야. 그럼 버려질때 덜 비참하니까... 가. 쉬어. 애 나오면 전화해."


초연의 울부짖음을 뒤로하고, 국영은 다시 기차역으로 향합니다. 서러움이 북받치는 초연... 언제까지나 이렇게 기다리며 살아야 하나요. 백밀러 속으로 멀어지는 서울역 지붕만 바라봅니다.


한편 여전히 벤치에 앉아있는 두 사람... 아무말이 없습니다. 다른 여자랑 애까지 가진 약혼자를 눈앞에서 봤으니,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어렵사리, 항수가 먼저 입을 엽니다.


"그래도 좋아하죠? 심장 뛰고.. 긴장되고.."

"...."

"제가 보기엔, 이기자님도 서화씨 많이 좋아해요. 그냥 그 사람들은, 사는 방식이 조금 다른거 같아요. 자존심 세고.. 욕심 많고.. 그 쪽은 다들 그렇게 사니까... (서화를 한번 살핀다) 미안해요, 이게 위로가 안 될텐데... "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리고, 머뭇거리던 항수가 선물을 꺼냅니다. 그림 한 장, 편지 한 통...


"어제 썼는데, 지금도 맞는건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서화씨 주려고 쓴거니까... 기차 떠나고 나면 읽어요. 옆에 있어주고 싶은데 어차피 저는 도움이 되지도 않을거고... 뭐 더 해드릴게 없어요, 미안해요."

"아녜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제가 지금 정신이... 조심해서 잘 가요. 창유 만나면 꼭 연락 주세요."


두 사람의 이별은 큰 변수 없이 진행 됩니다. 그 흔한 악수 한번 안하고 기차에 오르는 항수와 손에 쥔 편지와 그림을 놓지 못하는 서화... 그리고 조금 떨어져서 이 둘을 지켜보는 국영... 예정대로 기차가 떠나고 그제서야 그림을 펼쳐보는데요, 하필 아주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약혼식 모습입니다. 서화가 고민합니다 쓰레기통에 찢어버려야 하겠지만, 항수의 마지막 그림이네요. 이거 어쩌죠?


편지를 펼칩니다. 연필로 진하게 꾹꾹 눌러 쓴 글씨가 어색합니다. 항수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내려갔습니다. 처음 창유를 업고 와 문을 두드리던 날, 매일 마주치면서도 또 똑같이 어색하던 모습.. 생각해보니 어색한게 아니라 설레였던 것 같다는 많이 늦은 고백. 그리고, 징병때 일본군의 폭행으로 망막을 다쳐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써있었습니다.     

 

/(항수 목소리) 괜찮아요. 그렇게 그림자와 어둠을 먼저 그리다보면, 빛은 저절로 그려지거든요. 눈치 챘나요? 내 그림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는 거요. 아마, 서화씨를 마지막으로, 누구에게도, 작은 거 하나라도 그려주는 일은 없을거에요. 그럴수가 없겠죠.


다행이에요, 더 늦지 않아서.. 아직은 어둠이라도 볼 수 있어서, 당신을 남길 수 있었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이런 거지같은 세상에 살아서... 그런거라도 드릴 수 있었잖아요. 나중에 더 좋은 세상이 오면, 이따위 그림자를 그릴 수 있다 해도, 감히 당신께 드리지 못하겠죠.


창피하겠죠? 지금까지 그래 온 것 처럼, 많이 창피할 거에요. 난 언제나 부족한 사람이었고, 그럼에도 늘 곁을 지켜주던 당신이 좋았어요. 걱정말아요. 눈이 안보여도, 당신은 이미 내 빛으로 마음 속에 남았으니까. 당신은 내 마지막 눈부심입니다.


행복해야되요. 당신이 반짝반짝 빛이 나야, 내게도 그 빛의 한조각이 전해질 겁니다. 내가 못나 당신을 더 빛나게 해드리지 못합니다. 대신 당신을 웃게해 줄 사람을 만났으니 축하해요. 할말은 많지만, 나는 이렇게 비겁하고 겁 많은 사람입니다.


만약 내 삶에서 하루를 되돌릴 수 있다면, 창유를 업고 당신을 처음 만나던 그날로 가겠습니다. 그날처럼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고, 대신 창유만 내려놓고, 앞만 보고 뛰어 도망가겠습니다. 아예 당신을 만나지 않은 채로 살아 갈 수 있도록, 그렇게 딱 하루를 되돌렸으면 좋겠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도망을 갑니다. 앞으로의 나를 당신에게 보여줄 자신이 없어요. 우리가 그날 만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추억을 지워가며 남은 날을 살아갈겁니다... 사랑합니다. 용서하세요. 보이지 않으니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겨우 그말을 하네요.


행복하세요/   


      


(자막이 올라가고...

The End 끝)   




작가의 말:


영화 <마투리>는, 자꾸만 낙오되는, 뭔가가 자꾸 어긋나는 듯한 청춘들의 이야기 입니다. 당당하고 똑똑한, 그러나 잔정도 많고 자기 감정에 충실한 여자 의사 서화를 중심으로 1948년을 이야기 합니다. 주인공 서화와 똑닮았죠, 여자들의 배우 - 이유영님이 열연하셨구요, 그녀를 사랑하지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떠나는, 꾸욱 절제된 슬픈 그림쟁이 항수는, 눈빛으로 호소하는 남자 손호준님, 그리고 버림받는 걸 두려워하는 나쁜 남자 '국영'은, 제대와 함께 돌아온 성준님의 찰떡 캐스팅이었습니다.

 

                                       이유영 / 서화 역


                                        손호준 / 항수 역


                                          성준 / 국영 역




*글의 일부 인명과 지명은 극의 사실화를 위해 실명을 포함했거나 가명을 썼습니다.

*실제 친일파 명단에 오른 인물들이 거론되었습니다.

*세 주연 배우는 제가 희망하는 캐스팅입니다.



***이 글은 아직 쓰여지지 않은 제 소설을 바탕으로 한,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영화를 리뷰 먼저 했습니다. 이런 영화 없습니다. 기다리지 마세요 ^^ ***                       





<보너스 컷>      


금새 도시와 멀어진 기차. 항수는 모자를 눌러쓰고 자는 척 해보지만, 한방울씩 흘러내리는 눈물은 막아지지 않는다. 몇번이고 손으로 훔쳐내는 모습... 아닌척 마음을 추스리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때 무릎 위에 얹어지는 손수건. 모자를 올리고 앞을 보는 항수.. 자영이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둘로 내려 묶은 갈래 머리. 수수한 원피스에 굽없는 신발... 멍하니 눈만 껌뻑거리는 그에게 자영이 어색한 핑계를 댄다.


"왜, 그 그림이요, 예전에 노인네가 전차 기다리는 그거.. 그거 안팔렸잖아요. 생각 안나요? 그거 안 팔리면 내가 그쪽.. 내가 평생 모신다고.. (미심쩍은 항수의 눈빛) 아니, .. 스승으로요... 평생..."

"내려요."

"싫어요."

"이봐요, 내가 지금 누구를 챙길만한..."

"챙기지 마요. 내가 알아서 해요."

"알아서 하기는 뭘..."

"다 알아요, 눈 잘 안보이죠? 이번에 같이 작업하면서 눈치 했어요. 잘 안보여서 대충 색 쓰는데, 그림도 모르는 그 무식한 인간들이 열광하는 거잖아요. 선생님은 안보이니까 목탄이나 펜화만 했던 거고."

"그래서 여길 따라 나서요? 얼마나 힘든 곳인 줄 알고?"

"몰라도 되요. 어차피 가는거, 알고가나 모르고 가나.. 이거, 솔직히 다, 선생님 잘못이에요. 나도 평생 그림만 그렸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재능 없다면서요? 그럼 난 어떻해요? 그만두고 그냥 살아야지? ... 이왕 살거, 행복하게..? 왠만하면 ... 좋아하는 사람 옆에 붙어서... 더 행복하게..."


한숨과 함께 다시 모자를 눌러쓰는 항수.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그를 보며 슬그머니 웃음짓는 자영. 몰래 노트를 꺼내 항수를 그려보는데요, 하필 바로 눈을 번쩍뜨는 항수.


"야, 너는 도데체 어린 애가 말을 안들어..? (그림 노트를 보고) 그거 뭐야? 이리 내."

"싫어요, 안돼요.."


자영의 노트를 빼앗은 항수, 페이지마다 가득한 자기 얼굴에 놀랍니다. 자영을 보며 노트를 덮습니다. 뭐 어쩌겠어요, 이미 기차는 출발했는데.. 창밖을 보며 한숨만 쉴 뿐이죠. 혼날까봐 눈치보는 자영의 무릎으로 노트를 툭 던집니다.


"유화 때려 치워... 펜이 훨 낫네."


환하게 웃는 자영, 다시 모자를 쓰고 잠을 청하는 항수... 빠르게 지나는 창밖 풍경으로 시선 처리가 바뀌고, 어느새 산길을 지나는 기차길만 화면을 가릅니다.




<불이 꺼지고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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