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렷이 생각난다. 유난히 하얗게 빛이 나던 교복 셔츠, 새까만 짧은 머리, 조금 마른 체형에 휘리릭 날아가던 빠른 걸음… 종종거리며 녀석의 뒤를 쫒던 아주머니와, 그녀가 움켜쥐려 애쓰던, 봄바람 잔뜩 품어 이만큼 부풀어 오른 살구색 한복 치마… 비상등을 켜고 서있던 관광버스와 그 안을 꽉 채운 치마저고리 입은 여자들... 눈이 아프도록 예쁘던 봄날. 사거리 가득하던 하교길 아이들 모두 들었다.
“꺼져, 저리가! 꺼져버려! 으아아아~~!”
귀가 찢어지게 날카로운 소리... 그 녀석이다. 모두가 무서워 피하던 그 녀석은 처음에는 다른 애들과 별 다른 것 없이 그저 평범한 학생으로 보였다. 나보다 조금 큰 키에, 날카로운 인상… 녀석을 처음본 건, 전학온지 얼마 안된, 하늘 파랗던 새 학기였다.
종례를 마치고 와르르 쏟아져 나온 길거리는 정말 복잡했다. 한적한 곳을 찾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신호등에 다 왔을까 고개를 들었을때, 하필.. 꺼지라고 소리치며 뒤돌아서던 그 녀석과 마주쳤다. 얼마나 악을 썼는지, 터질것처럼 무섭게 핏대 선 목덜미가 가까와진다 싶던 순간, 녀석의 교복 카라에 눈을 찔렸다. 악… 아프다… 부딪혔나? …정적… 아마 영화에서나 보는 그런 시간 멈춤…? 주위가 조용해진다… 움찔 감아버린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짧고 거친 숨이 머리카락을 타고 귓바퀴로 쏟아져 내린다. 모두 숨었나보다.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없다…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고인다. 꼭 감은 눈 속에 까만 하늘만 보인다…
친구들이 팔을 잡아 끈다. 아픈 눈을 비비니 손가락이 젖는다. 꺼져, 저리가.. 아, 혹시 나보고 비키라는 거였나..? 시린 눈을 억지로 뜨고 올려다 본다. 눈이 마주친다. 잠을 못 잔 듯, 아니면 눈병이라도 걸린 듯, 곧 찢고 나올 것처럼 흰자위를 덮은 빨간 실핏줄.. 착각이었나.. 금방 와르르 쏟아질것 같은 눈물을 본 것 같기도 하다…
나를 데리고 뒷걸음치던 친구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그 녀석은 그저 잠시, 숨을 고르며 나를 노려보았다. 휙휙 신경질적인 바람을 일으키며 거칠게 내던지는 발끝으로, 바다가 갈라지듯, 순식간에 길이 열린다. 집에 오는 내내 미선이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라는 ‘그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 또래 가쉽 주인공이 늘 그렇듯이, 성질 못되고 주먹 센 양아치란다. 학교도 포기한 유명한 일진이니 조심하라고 했지만, 멀리서 이사 온 내게는 어차피 모두가 처음보는, 사방이 낯설고 불편 할 뿐이다. 관심없다. 어차피 오래 다닐 학교도 아니고…
달리 친분은 없었다. 두번째로 마주친건, 비가 많이 쏟아지던 시험기간이었다. 채점을 도와 드리고 나니 많이 늦었다. 비 쏟아지는 소리가 복도에 가득 울리고, 아, 우산이 없는데... 가방이 다 젖을거라는 생각에 교무실로 다시 뛰어가 비닐봉지를 얻어왔다. 그 안에 책들을 넣어 꽁꽁 묶고, 다시 가방에 넣어 자크를 잠궜다.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
“바보.”
깨끗한 셔츠에 검은 가방. 그 녀석이다. 내 쪽은 쳐다도 안보고, 하늘만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그런다고 안 젖냐?”
내가 기억하는, 딱 한뼘만큼 더 크던 그 녀석이 옆에 선다. 내 눈 높이에서, 가슴팍의 셔츠 주머니가 빗방울에 젖어든다. 명찰 아래 빨간 색 담배곽이 비친다. 미국 담배… 시선이 멈춘다…
“뭘 봐.”
너 따윈 상관없다는 듯, 정말 보란듯이, 천천히 한개피 입에 물고 옆을 지난다. 소매가 살짝 스쳤던 것 같다. 바람이었나. 그렇게 나를 지나 운동장을 걷는다. 투두둑 투두둑 빗물 떨어지는 소리, 철렁 철렁 고인 물을 밟는 소리, 몇 발자국 멀어지는 소리… 그리고 까만 접이 우산 하나가 툭… 내 앞에 던져진다. 저만치 앞서 간다. 담배 연기가 날아 오르는 어깨 아래로 하얀 셔츠가 젖어간다.
깨끗히 말려 놓긴 했지만, 우산을 돌려주지 못했다. 집에 두고 오기도 하고, 주말이 되고, 다음에는 비가 안와서, 그러다 또 며칠 잊어버리고, 마침내 가져갔을 때는 그 교실까지 가서 걔만 딱 불러내기가 이상해서... 못 돌려 줬다. 궁리 끝에 방송반 친구에게 부탁했다. 마치 주운 물건 건네 주듯이, 최대한 쿨하게…
“강준형 너네 반이지? 이거 걔 꺼래.”
“강준형? 네가 걔를 어떻게 알어?”
의외라는 하이톤에 말이 길어질까봐 재빨리 뒤돌아 헤드폰을 썼다. 매주 화요일 아침은 내 코너다. 중얼중얼 연습하는 척 했다. 친구는 갸우뚱하더니 우산을 옆으로 치워놓고 기계를 점검한다. 큐 싸인이 들어온다.
“…비가 온다. 이런날 우산도 없다. 젖는거 싫은데, 집에 전화라도 해볼까…”
나는 그날의 일기 – 방송을 위해 쓴 일기 형식의 글-을 읽어내려간다.
“..뺨이 아플만큼 세진 빗줄기 사이로, 찌푸린 구름인 척 담배 연기가 피어 오른다. 그래, 니 몸 안에도 그렇게 가득 차고 있겠지. 두개밖에 없는 폐속에 아마 꽉꽉 압축되어 쌓이고 있을거야...”
우워어…복도 저쪽에서 학생들의 괴성이 들린다. 교내 아침 방송에서 담배 이야기라니, 유리창 너머로 방송부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하신다. 못본척, 계속 읽는다.
“..일찍 죽을지, 암에 걸릴지, 안해봐서 잘 모른다. 하긴, 뭐, 하나도 안 피워도, 일찍 죽을 사람은 다 죽더라. 어쨌거나, 그건 니 사정이고, 나는, 나한테 오는 냄새가 싫고, 공룡 콧구멍같은 네 모습이 우습다..”
책상 두드리는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방송부 선배들이 선생님 눈치를 보며 키득 거린다. 마지막 문장을 마친다.
“집에서 피워라. 건달 아저씨처럼 들고 다니지 말고. 오늘 일기 끝. 추신! 우산 잘 썼어. 고마워.”
친구가 앤딩 곡을 넣고 손가락으로 톡, 톡, 톡… 책상 위 까만 접이 우산에 박자를 맞춘다. 내쪽을 보는데, 아마, 웃고 있는 것 같다.
저녁 시간, 학원 버스를 놓쳤다. 오늘은 그냥 가지말까. 태풍이라도 오려는지 어둑어둑한 날씨에 자연스레 정류장 옆 시장통으로 들어선다. 행복한 냄새... 이쪽으로 가면 미선이 어머니가 하시는 분식집이 다. 저 끝 반대쪽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미선이네 가게로 향한다. 이쪽으로 걸어온다. 바쁠 시간이 아니라 가게 안이 텅 비었다. 곁눈으로 하얀 셔츠를 확인한다. 길가 쪽을 향한 커다란 떡볶이 철판 아래에서 동그란 철제 의자를 꺼내 앉는다. 나를 봤을까... 하얀 김이 올라온다.
“안녕하세요”
“날이 이상하다. 뭐 걸칠거라도 하나 가지고 다니지... 미선아, 시현이 왔다. ”
어머니는 벌써 접시를 집어들고 이리저리 떡볶이를 뒤집으며 맞아주신다. 튤립 꽃이 그려진 촌스런 플라스틱 수저통에서 포크를 꺼내고, 냅킨을 집는다. 세모로 접어 내 앞에, 포크를 그 위에... 또 한장 꺼내 똑같이 접어 옆에 놓고, 그래도 그중 깨끗해 보이는 걸로... 포크 하나를 더 꺼내 그 위에 반듯하게 눕힌다. 지금쯤 나타날텐데… 엄지 손가락보다 굵은 떡볶이가 얇은 비닐로 싼 접시위에 수북히 쌓인다. 방울방울, 국물이 맛있게 떨어진다.
“우와, 잘먹겠습니다.”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옆자리와 딱 가운데쯤에 놔둔 떡복이 접시에서 제일 통통한 놈을 찍었다. 옆에 있던 철제 의자가 드르륵 둔한 소리를 내며 당겨지고, 반으로 접힌 종이 가방이 무심히 발 옆에 던져진다. 호호 불어 한입 베어 문다. 절대, 안 쳐다봐야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는 체 같은 거 없이, 그 녀석이 옆에 앉는다.
“어머, 이게 누구야, 준형이네? 언제 이렇게 컸어, 응? 둘이 친구야?”
꾸뻑 인사를 하고 내가 미리 놔 둔 포크를 집어 든다. 만두 한접시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미선의 눈이 놀란 토끼가 된다. 아무말 없이 먹기만 한다. 접시가 넘치도록 쌓였던 떡볶기와 만두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팔을 뻗어 오뎅 꼬치를 하나 집어들자, 멀리있던 간장 그릇을 집어 내 앞으로 놔준다. 손가락이 예쁘다.
“감사합니다. 안녕히계세요.”
돈을 놓고 일어섰다. 그 녀석도 말없이 일어나 꾸뻑 인사하더니 종이 가방을 들고 먼저 뒤돌아 간다. 엄마 옆에 달라붙어 있던 미선이가 잠깐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지만, 못알아들은 척... 같이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섰다.
두명 간신히 지나갈 좁은 시장길을 앞뒤로 나란히 걷는다. 뒤도 안돌아본다. 사람 키 두배만큼 뻥튀기를 높이 쌓은 자전거가 딩딩 벨을 울린다. 그 녀석이 멈추고 길을 내어준다. 나도 급하게 따라 멈춘다… 바로 코 앞 요만큼에, 줄 잡아 반듯하게 다려진 어깨선이 보인다. 어, 뭐지… 그새 더 컸나…? 자전거가 지나가고 다시 걷는다. 녀석이 한박자 기다려준 것 같다. 이번에는 나란히 옆으로 속도를 맞춘다.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 어릴때 들은 노래가 생각난다. 학교갔다 집에 올때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 큰길까지 나와 약국 앞 계단에 걸터 앉는다. 담배를 꺼낸다.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다. 햇살속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본다. 모르는 버스가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일어섰다.
“간다.”
대꾸도 없는 그 녀석을 두고 버스에 오른다. 들었겠지?
쌀쌀해진 어느 날 오후, 싸움이 났다. 남자애들끼리 여럿이서 치고받고 난리라고 한다. 시끄럽다... 이어폰을 꽂는다. 말리긴 커녕 더 부추기는 것 같다. 환호성과 비명이 섞여 아수라장이다. 선생님들 뛰어가는 소리, 그보다 더 크게 우루루 아이들 뛰는 소리… 교실로 돌아가라는 지시에도 창문과 현관은 구경하려는 애들로 가득하다. 수위 아저씨들과 남자 선생님들이 총 동원되어서야 조금 진정되고, 크게 다친 듯한 남학생들이 양호실로, 혹은 학생부실로 끌려 간다. 흥분에 들뜬 아이들의 목격담이 시작되고, 점심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에도 시끌시끌하다. 핏자국, 찢어진 옷, 부러진 이 조각도 봤다는 아이들도 있다. 싸운 애들은 치료 후 보호자들과 함께 귀가 조치 되고, 며칠 동안 그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도데체가, 그 녀석은, 부모님 모시고 오라 그래도 들은 척을 안해. 전화 번호, 집주소, 다 옛날꺼고… 요즘은 하도 학교폭력이니 뭐니 경찰 들락거리고, 그렇게 하면 안되는데...”
김밥 꽁지를 집어 드시며 작은 아빠가 투정하신다. 혹시 그 녀석 말씀이실까 안듣는 척, 김밥을 담는다.
“친구들이 좀 알겠죠? 물어 봤어요?”
“몰려 댕기는 무리도 없고, 딱히 친한 애가 없는 거 같애. 특이한 놈이야. 시장 안에 편의점에서 일한다 그러길래 다른 선생이 하나 갔다왔는데, 아예 거기 창고에서 먹고 잔대. 부모가 없는 건지, 서류에는 둘 다 살아있는데 말이야, 가출한 것 같기도하고, 도무지 말을 안해.”
“안됐네, 고2면 아직 어린 앤데, 뭐 특별히 사고 치는 애는 아니구요?”
“치니까 문제지, 이 사람아? 걔 하나를 당할 놈이 없어요, 선생들도 슬슬 눈치를 봐.”
“근데 어떻게 처벌은 안 받아? 공부는 잘 해?”
“중간은 하지. 근데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이게 참... 사고를 쳐도, 꼭 딴놈들이 먼저 찝쩍거리다 맞는거라서... 먼저 시작은 안해. 대신 건들면 죽는다, 뭐 그런 거야. ”
“어머,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겠다? 잘생겼어? 요새는 그런애들 좋아하잖아, 만화 주인공 같은 애, 그치, 시현아?”
작은 엄마가 물으신다. 작은 엄마는... 항상 귀엽다...
“어, 제가 아직, 학교 애들을 많이 몰라요.”
“그래, 아직 잘 모르겠지. 있잖아, 한국은 드라마를 많이 봐서, 약간 그런 남자애들 좋아한다?”
“어허, 쓸데없는 소리! 그런 놈들을 뭐에다 써? 가까이도 가지마. 너! 바로 니 아빠한테 보내 버릴거야.”
“그러지말고 당신이 좀 챙겨줘요. 부모가 없으면 선생님들이 더 잘 해줘야지. 오늘 등산은 오나?”
“에유, 몰라, 며칠 학교 못 나왔어. 저번에 맞은 놈들 부모들이 하도 난리를 쳐서, 좀 쉬라 그랬어.”
“어머, 웃겨, 지 자식들이 먼저 시비 걸었다면서 왜 난리를 쳐? 그래서? 부모 없는 애는 학교도 나오면 안돼?" 작은 아버지는 별 대답 없이 배낭을 챙기셨다.
헉헉 거리며 올라간 산꼭대기... 교장 선생님이 등산을 좋아 하신다고 했다. 극기훈련이다…! 투덜거리며 겨우 그늘로 자리를 잡는다. 새벽부터 작은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을 꺼낸다. 누군가 미선이와 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털썩.. 옆에 앉는다. 그 녀석이다. 도시락은 커녕, 음료수 하나 없이 빈 손이다. 친구들이 슬쩍 쳐다보는 듯 했지만, 무서운지, 아무도 뭐라고 하진 못한다.
김밥과 젓가락을 내밀었다. 제 것처럼, 넙죽 받아들고 먹는다. 친구들은 서로 눈치보느라 말 한 마디없이, 뭐 삼키는 소리까지 다 들릴만큼 조용히, 먹고만 있다. 과자 몇 개 입에 넣고 망설이다가, 몇 개 남지 않은 김밥으로 손을 뻗는다. 그제서야 내 쪽으로 조금 내어주며, 대신 내가 마시던 음료수를 가져간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아랫 입술에 엄지 손가락을 대고 천천히 기울인다. 쏴아아… 사이다 김 올라오는 소리, 파리한 멍자국, 손가락 두개에 남은 붕대...
작은 아빠, 아니, 학생주임 선생님...이 오셨다. 내 등뒤에 쪼그리고 앉아 녀석이 들고 있는 도시락에서 김밥 하나를 집어드신다. 녀석이 태연하게 꾸뻑 인사한다. 먹어, 먹어, 하는 손짓에 하나를 입에 또 넣고, 마지막 하나를 내쪽으로 내민다. 천천히 꼭꼭 씹으시며 둘을 번갈아 바라보시다 가신다. 잠시 후 다른 학생부 선생님이 오신다.
“강준형이, 너 왜 여기 와있냐, 너네 반 안가고?”
“괜찮아요. 저, 많이 싸왔어요.”
내가 대신 대답하자, 조용했던 친구들이 처음으로 큭큭 웃음을 터뜨린다.
“야! 너때문에 선생님들이 자꾸 오잖아. 저리 가!”
미선이의 말에 그 녀석이 살짝 웃은 것 같다. 웃기도 하는 구나… 처음 본다. 얇은 입술이 살짝 주름을 펴며 좌우로 팽창했다 다시 줄어든다. 내 소다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털어넣고 나서야 일어선다. 낮은 목소리… 나한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
“간다.”
소풍 내내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나만 쳐다 보는 것 같았다.
학교. 집에 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아빠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 끝 과학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제일 가까운 의자를 아무렇게나 잡아당겨 앉는다.
“어, 언니, 소포 받았어, 고마워.... 히힝.. 자꾸 언니래.. 이제 엄마라고 해야 되는데..”
“괜찮아, 편하게해. 학교 어때? 잘 지내?”
좋다. 숨소리도, 목소리도… 어릴때처럼 하루종일 같이 뒹굴어도 좋을 것 같다. 가벼운 안부, 웃음… 쓸데없는 이야기들… 심심하면 꼭 한번씩 생각나는 사람.
“알았어, 내 걱정 말고, 아빠랑 잘 놀아. 지금 학교라 길게 통화 못해. 다음에 얘기해? 그때는 엄마라고 부를께? ... 크크크, 어, 언니도 안녕~~.”
“너 엄마 없냐?”
깜짝이야… 통화를 끝내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 과학실 저쪽에 서 있는 그 녀석.
“너, 왜 여기있어?”
“아까부터 있었는데? 생물 시간에 자다가, 벌 청소.”
아, 급하게 들어오느라 못봤나보다. 다 들었겠네..
“너도 엄마 없냐고?”
그 녀석을 바라본다. 아마 이게, 처음 해보는, 대화라는 것..? 역광이라 잘 안보인다. 삐딱한 어깨위로 셔츠만 빛난다.
“어. 없어... 돌아가셨어, 나 어렸을때.”
침묵이 흐른다. 일어서서 나가려는데 한마디 던진다.
“희안하네. 공부 잘 하는 애들은 다 엄마아빠 있던데.”
할말이 없다. 전화기를 만지작거려본다. 드르륵 철컥, 드르륵 철컥… 하나씩 창문을 내려닫으며 내 쪽으로 걸어온다. 대답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뭐라고 해야하나… 공부 잘해도 엄마 없을 수 있다..? 공부 못하는 애도 엄마는 있다…? 아, 뭔가 말이 꼬인다… 뚜벅, 뚜벅, 내 앞에 와 멈춰선다. 한뼘거리 눈 앞에 명찰이 보인다. 셔츠 주머니가 비어있다. 어? 담배가 없네? ...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반쯤 내려뜬 속눈썹 사이로 내가 보인다… 세뼘, 두뼘, 한뼘 앞에 왔다… 기분 나쁘지 않게 아주 조금, 몸을 옆으로 기울여 피해본다. 녀석이 한쪽 다리를 뻗어 몸을 낮춘다. 파란 명찰이 어깨를 스친다. 내가 앉았던 의자를 툭 발로 차 테이블 아래로 넣는다.
“청소 다했다. 줄 맞춰놔라.”
하아… 잠시 멈춰졌던 숨이 몰아서 나온다. 짜식, 선수다… 어색함에 전화기를 만져본다. 녀석이 가방을 둘러메며 앞장서서 나간다.
“나도 엄마 없어. 죽진 않았고...”
대답할 말이 없다. 이번에도 그냥 듣기만하면 되나? 쿵... 과학실 문을 닫는다.
“갔어, 미쳐서.”
이런 버르장머리… 지 엄마한테…? 성큼성큼 앞서 간다. 혼자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다. 옅은 담배 냄새가 나는 것도 같지만, 그정도는 뭐, 별로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사계절 중, 아쉽게도 가을이 제일 짧다. 대신, 호떡 리어카가 돌아왔다! 줄 서서 기다릴만큼 인기가 좋다. 폰을 들여다보며 서있는데 스윽 옆에 다가와 선 그 녀석. 그 새 더 큰 걸까, 살이 빠진걸까. 턱 선이 뚜렷해서 그런가 옆모습이 더 멋지다. 남자애들은 좋겠다, 볼 때 마다 길어지니… 에잇, 나는 왜이리 안 크는지... 유전이다... 아아, 아버지... 호떡을 보는 척 허리를 펴고 목도 한번 쭉 빼보지만, 어깨만 간신히 넘기는 것 같다. 위에서 보면 내가 더 작아 보이겠지… 아주머니의 빠른 손놀림에 오래지 않아 내 차례가 되었다. 주문하려는데 그 녀석이 먼저 돈을 내민다.
“4개 주세요.”
아, 살쪄서 하나만 먹을려 그랬는데… 봉지를 받아들었다. 마땅히 앉을 곳도 없는 길거리다. 손바닥보다 작게 자른 종이 조각을 네모로 꼭꼭 접어 호떡을 들고 걸었다. 한입 베어내니 끈쩍끈쩍하게 틈이 벌어지며 잘 녹은 갈색 설탕물이 흐른다. 호호불어 혀로 핥으며 입맛을 다신다. 옆에 걷던 그 녀석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뭐 어때? 너도 먹어.”
폼생폼사… 대꾸도 없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큰 걸음으로 편의점 쪽으로 향한다. 재빨리 호떡 세개 남은 봉지로 돌아서는 팔뚝을 툭 쳤다.
“가져가. 먹고 해.”
그 녀석이 멈춰서서 뒤돌아 본다. 호떡 봉지를 다시 내밀었다.
“먹고 하라고, 밤새 알바 한다며.”
반쯤 먹고 있던 호떡에서 설탕물이 한방울 흘렀다.
“아 뜨거!”
웃는다. 이번에는 확실히 그 녀석이 웃었다. 봉지를 찢어 손가락을 닦아준다. 가까이에서 보니 또 누구한테 맞았는지 군데군데 흔적들이 보인다. 도데체 뭐가 그렇게 붙을 일이 많은지? 남자애들은 눈만 마주쳐도 싸운다더니, 그 녀석도 그런가보다. 찬바람에 뜨거움이 금방 가신다. 손가락을 놔준다. 한번 더 봉지를 건넨다.
“저녁 먹어야지. 가져가.”
“싫어. 안 먹어.”
왜…? 하는 표정의 나와 눈이 마주친다. 2초..아니 한 3초? 그대로 굳는다. 또 할 말이 없다. 그 녀석과 눈만 마주치면 머리가 멈춰버리면서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잠깐 망설이다가, 그 녀석이 입을 연다.
“… 겨울에 나갔어. 아버지는 병원에 있었고, 어릴때라서 혼자 라면도 잘 못 끓였어. 누가 이런 거 갖다주면 먹고, 아님 말고... 그때 많이 먹어서 질렸어.”
그동안 들은 말 중에서, 아마 제일 긴 한마디 였던 것 같다. 제일 솔직하고, 제일 슬픈 이야기… 제일 착한 눈빛, 제일 안스러운 마음… 편의점 유리문이 열렸다 닫히고, 녀석이 사라졌다. 문 틈으로 아주 잠깐, 온기를 느꼈다.
쉬는 시간. 사진이 왔다. 언니가 애기를 낳아 이젠 정말 엄마가 되었다. 내 새 엄마, 내 동생의 엄마... 발그레한 얼굴에 눈이 통통 부어있다. 웃긴데 예쁘다. 언니가 안고 있는 사진, 아빠가 언니와 함께 아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 코딱지만한 손톱을 클로즈업한 사진… 별별 사진을 다 보내셨다. 열 일곱살 차이나는 내 동생! 방학하면 가봐야지… 달력을 본다. 기말고사 끝나고, 이때가 비행기가 좀 싸려나, 아직 10월 말이니까 지금 예약하면… 이런… 10월? 엄마 생일이...? 지났다. 따로 거하게 챙기지는 않았어도, 늘 아빠랑 둘이 케익 한 조각씩은 먹었었다. 그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그래도 나름 기억속에 남아있던 엄마의 생일.
올해는 잊었다. 아가 때문에, 예정일이 지났다며 안절부절 걱정하던 아빠 때문에, 까맣게 잊었다. 기억에도 없는 엄마의... 잊어도 되는 생일이지만, 그렇다고 진짜 지나치다니? 엄마, 미안해… 눈물이 쏟아진다. 이상하다. 하나도 안 슬픈데 멈출수가 없다. 별일 아닌데, 그럴수도 있는데... 무슨 일이냐고 묻는 친구들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나갔다. 옷소매만으로는 더이상 눈물이 닦아지지 않는다. 빈 양호실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 앉았다. 베게로 입을 꼭 막아봐도 울음이 새어나온다. 누군가 따라와 어깨를 감싼다. 얼마나 울었을까, 종소리에 정신이 확 든다. 옆에 앉은... 강준형..? 담담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눈물을 닦아준다.
"괜찮아?"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사고 치다 들킨 것처럼 창피하다. 그제서야 눈물콧물 다 발라놓은 베게를 손가락으로 닦아본다. 그 녀석이 베게를 내려놓고 내 손을 잡아 끈다.
“바보, 그런다고 없어지냐?"
잡힌 손을 굳이 빼지 않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조용한 걸 보니 다들 수업 갔나 보다. 잠바도 없이 그대로 교문을 나섰다. 쌀쌀하다. 그 녀석이 교복 자켓을 벗어준다. 소매가 좀 길다. 학교를 빠져나와 시내를 무작정 돌아다녔다. 해 떨어진 늦은 저녁까지... 어두워지고 나서야 다시 동네 입구에 왔다. 마감이라 떨이로 파는 찹쌀 도너츠를 한봉지 샀지만, 그 녀석은 이번에도 먹지 않는다.
시장 입구에 세탁소가 보인다. 아무도 없이 빈 가게를 그 녀석이 문을 열고 들어간다. 뒤돌아서서 교복 셔츠를 벗어놓더니 옷걸이 한쪽에 걸려있는 다른 티셔츠를 걸친다. 검푸른 멍 자국이 덮어진다. 다리미 테이블 위에 반으로 접은 종이 가방을 집어 든다. 딩딩.. 소리와 함께 모르는 아저씨가 들어온다. 각자 좁은 통로으로 갈라지며 말 없이 길을 내어준다. 아저씨가 내게 눈인사 하신다. 나도 가볍게 목례를 하고 걸어나왔다.
“아는 사람이야?"
“아버지."
도너츠를 베어 문다. 아, 그래서 옷이 항상 깨끗하구나...
“다 아니야."
“뭐가?"
"애들이 떠드는 거, 다 거짓말 이라구."
들은 적 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 혹은 수배중이라고 했다. 사고로 죽었다고도 했다. 가난, 혹은 폭행 때문에 엄마가 가출했다, 아니면 정신병원에 있어서 연락이 되지않는다, 또는, 엄마가 동네 사람들에게 크게 빚을 지고 도망갔다, 그래서 그 녀석은 편의점에서 일하며 빚을 갚는다… 뭐, 대충 이런 이야기들이다. 더이상 묻지않았다. 마지막 도너츠를 꺼내들었다.
“먹을래? 하나 남았어."
"안 먹잖아. 너 먹어."
"살 빼야되는데.."
“빼지 마, 예뻐.”
뭐라고…? 잘못들었나 올려다 보는 순간 그 녀석도 당황한 듯, 휘리릭..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걸음을 멈춘다. 어깨에 또 코를 박을뻔 했다.
“뛰어. 기다리신다."
앗.. 건너편에서 이쪽을 보고 계시는 분은 작은 아버지 = 학생주임 선생님...
“갈께, 안녕!"
그 녀석에게 남은 도너츠를 넘겨주고, 최대한 빨리 걸었다. 뭐라고 변명하지, 누군지 알아보셨나? 에휴~ 오후 수업 다 빠진건 이미 아시겠지..
“야 임마, 지갑이랑 전화기는 가지고 가야지. 배 안고파? 뭐 좀 먹었고?
같이 있던 사람이 누구냐고, 어디 갔냐고 묻지 않으신다. 다행이다. 거실에 교실에 두고 온 교복 자켓과 책가방이 놓여있다. 헉… 교복 자켓! 그러고보니 아직도 그 녀석의 자켓을 입고 있다. 강준형 - 아주 눈에 잘 띄도록 밝은, 샛노란 실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두 분 다 나름 열심히, 친절할 수 있는 말 (?) 을 찾고 계신 것 같아 얼른 방으로 들어간다. 그 녀석의 자켓을 툭툭 털어 반듯하게 걸어둔다. 빼지 마, 예뻐… 예뻐, 빼지마… 크흐흐…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겨울 방학... 드디어 아빠가 오셨다. 안식년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데리러 잠깐 들르셨다. 같이 집으로 가자고 하셨지만, 거절했다. 고등학교 마치고, 아마 대학 갈때, 아빠 학교로 가겠다고 말했다. 서운해하는 언니와, 아니 새엄마와 아빠를 보며 씩씩하게 웃어주었다.
“생각보다 안 어려워요. 한국말도 많이 배우고, 친구도 생기구요. 방학때 놀러 갈께요.”
아빠와 언니는 떠나기 전에 학교를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토요일 저녁 텅빈 교실과 교무실, 커텐이 닫힌 양호실 문앞을 지나 맨 꼭대기 층 발자국 소리까지 울려대는 휑한 강당에 올라갔다. 한층씩 계단으로 내려온다. 음악실, 미술실, 그리고 다시 복도 끝 과학실. 쪼로록 줄 잘 맞춰진 의자들을 보며 재잘재잘 기분좋은 수다를 떤다.
조용한 운동장에 날이 저문다. 노을 속 주차장에 아빠 차가 보인다. 아직도 머뭇거리는 언니와 아빠를 서둘러 보낸다.
“얼른 가세요, 도착하면 전화 주시구요.”
“냉정한 놈. 똥고집 부릴때는 딱 지 엄마야.”
웃는다. 생긴것도, 고집도, 엄마를 닮았다고 한다. 사실 난 엄마를 잘 모른다. 엄마 아빠가 유학 중일때 태어났지만, 긴 머리에 예쁜 미소는 사진에서만 봤을 뿐,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늘 힘든 모습이었다. 잦은 입원으로 자주 볼수도 없었고, 어쩌다 한번 만날때면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그나마 임종병원으로 옮기고 나서는 면회도 몇 번 못갔다. 엄마가 원치 않았다. 너무 아파서 웃어 줄 수가 없다고 했다. 대신 아빠와 같은 학교 유학생이던 은영 언니가 나를 돌봐주었다. 유치원 보호자 연락처에는 늘, 아빠와 언니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엄마는 내가 1학년을 시작 하기도 전에 떠나버렸고, 오랜 보챔 끝에 언니는 작년에서야 내 엄마가 되어주었다. 안식년을 핑계로 늦게나마 둘을 ‘신혼여행’ 보냈다. 걱정 많은 아빠와 언니 때문에 나는 이 멀리 한국까지와서, 딱 1년만, 작은 아빠 학교를 다니기로 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지났고, 이제 다시 두 사람을,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려 보낸다. 셋이 잘 어울려 다행이다. 특히 아가를 안고 있으니 아빠가 전보다 훨씬 젊고 행복해 보인다. 차가 출발하고 작은 엄마가 물으신다.
“너 정말 괜찮니? 아빠 안보고 싶겠어?”
“보고 싶긴요, 달라는 사람 있을때 얼른 줘야되요. 같이 살면, 저 연애도 못해요. 이제 독립입니다. 만세!”
“그래도 공항까지는 나가보고 싶지 않아?”
“언니네 부모님이 오신대요. 저는 이번 주에는 숙제도 많고, 미선이네가서 같이 하고 올께요, 먼저 가세요.”
저만큼 앞 신호등에 아빠 차가 서 있다. 일부러 멀리, 반대쪽으로 돌아 길을 건넌다. 안보이게 골목으로 숨어든다. 뛰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쿵쿵 거린다. 괜찮아, 괜찮아, 금방 사라질 허전함 같은 거야... 눈물이 조금 나오려 하지만, 참을 수 있다...
예고 없던 전화에 미선이가 가게 앞까지 나와 있었다.
“왜 울어? 강준형이랑 싸웠어?”
어이가 없어 허허 웃고 말았다. 그래, 나한테는 그 녀석이 있다. 다음에는 그 녀석한테 가야겠다.
새학기. 작은 아빠는 자원해서 그 녀석의 담임을 맡았다. 학부모 상담을 핑계로, 내가 슬쩍 알려드린 세탁소에 가서 아저씨도 만나셨다. 사고로 몸이 안 좋으셨다는 이야기, 아는 사람 세탁소를 봐주면서 거기서 숙식하신다는 이야기, 몸에 안좋은 화학 약품을 많이 쓰기 때문에 그 녀석은 거기서 못자게 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사이비 종교에 빠져 집을 나간 그 녀석 어머니의 이야기도 듣고 오셨다. 아저씨 사고를 핑계로 여러 사람에게 돈을 빌려 사라졌다고 했다. 보험금, 전세 보증금까지 몽땅 챙겨 가고는 벌써 몇년을 연락도 없다고 했다. 그럼 혹시, 그때 관광버스 타고 학교 앞에 와있던, 살구색 한복의 아주머니...?
“아버지도 그렇고, 나쁜 녀석은 아닌거 같긴 한데, 그래도 너무 가깝게 지내지는 마라?"
"안됬긴 한데, 걔도 참, 왜 그렇게 싸운데요? 싸움만 좀 안해도 선생님들이 더 잘 챙겨 줄텐데."
“그게 아마, 전에 돈 떼인 사람들한테 많이 당했나봐. 학교에도 찾아 왔었대. 동네 애들한테 끌려가서 맞고, 돈될만한거 뭐 훔쳐오라고 시키고, 그러다보니 쌈닭이 됬다는데, 자세한 건 모르지."
그 녀석 이야기를 하실때마다 두분은 나를 살피신다. 일부러 딴곳을 본다. 내가 뭐라도 털어놓길 바라시는 눈치지만, 모르는척 하기로 했다.
“언제 학교 끝나고 한번 데리고 와요. 한참 클 나이인데 잘 먹어야지. 그러면서 애도 좀 살펴보고... 아니야, 일단은 일하는데로 좀 싸다 줄까? 다짜고짜 선생님 집에 오라그러면 불편하겠지?"
“어, 그래, 그게 좋겠다. 전에 보니까 그 녀석이 당신 김밥을 잘 먹더라구. 그치, 시현아?”
"김밥 좀 줬어? 잘했네. 언제? 산에서?"
궁금해 하시는 작은 엄마의 동그란 눈을 피해 방으로 들어간다. 문 밖에서 소근소근 계속되는 두분의 대화...
“여보, 그래서 말인데, 큰 애 방 비어있는 거, 애 제대할때까지, 그 녀석이 좀 와서 쓰면 어떨까?”
“아예 데리고 있자고? 진심이야? 시현이 있는데?"
“애가 창고에서 사는걸 알면서 모른체 하기도 그렇고, 시현이 하고도 말이야, 차라리 둘 다 눈앞에서 보고 있는게 낫지, 이놈들이 밖에 나가서 뭔짓을 하는지 알수가 있어야지?”
“아이구, 괜찮아요,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쟤들만 연애하나? 왜 걱정해? 시현이 어차피 지 아빠 따라서 미국으로 대학 갈거고…”
“공부를 해야 가지, 미국은 뭐, 대학 거저 들어가? 아이고, 저놈 자식을 그냥…”
어려서부터 당연히, 아빠가 있는 학교를 가야한다고 생각했었다. 엄마가 자주 이야기 하던, 소망같은 것이기도 했다. 아빠가 교수가 되면, 대학생인 나와 같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걸 보고 싶다고 했었다.
“나 그냥 한국에서 대학갈까봐."
“미국 안 돌아가고? 너 교포라며?"
빠르게 물건을 정리하는며 녀석이 묻는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박스를 접는다.
“응, 근데 여기도 살다보니까 괜찮은 거 같애. 자꾸 옮겨 다니기도 귀찮어.”
“좋겠다, 오라는데 많아서."
“오라는데가 어딨어, 갈데가 없으니까 여기저기 방황하는 거지. 아 근데, 한국 말이... 말은 하겠는데, 공부는 너무 힘들어."
“그래, 너 좀 많이 해야겠더라. 홍익인간하고 홍의장군도 구분 못하고.”
“그건, 그분들께서 이름을 잘못 지으셨다니까. 딱 들어도 헷갈리잖아, 홍익, 홍의... '홍'자가 왜이렇게 많아? 홍수, 홍시... 야, 난 그래도 영어는 해. 넌 뭐 잘하는데?”
“편의점 3년이면 바코드를 외운다. 볼래?”
푸하하 웃었다. 그 녀석도 웃는다. 가느다란 보조개가 들어가고, 활짝 열린 입술 사이로 맑은 소리가 난다. 언니가 웃을 때 처럼 듣기 좋은 소리, 언니가 웃을 때처럼 예쁜 얼굴... 금새 창고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퇴근이다. 얼음 넣은 1200원짜리 아이스 커피를 집어든다. 스타벅스보다 백배는 맛있다.
“근데 너네 엄마 가셨다는 거기, 대학도 있다면서? 가족은 다 받아 준대."
“대학 갈라고 거기까지 가냐? 그 사이비 믿지도 않는데."
“그래도 거기 가면, 엄마 찾을 수 있지 않어? 안 보고 싶어?"
쪼록... 쪼록... 아껴서 조금씩 마신다. 대답하기 싫은가 보다. 금새 바닥이다. 그래, 맛은 있는데, 양은 좀 적다.
“아직도 엄마한테 화났어?"
“아냐, 그런거 없어. 오래전이라 기억도 안 나. 상관없는 사람 같애. 그냥 지 좋은 거 하라 그래. 난 나 좋은 거 할거니까. 거기서 그러다 죽어도, 별로 안 슬프기로 했어.”
“바보, 안 슬프기로 하면, 그게, 안 슬퍼지냐?"
“어, 그럴꺼야. 신경 끄면 화 안 나. 잊으면 돼."
녀석이 자란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조금씩 너그러워진다는 뜻인 것 같다. 가겠다는 시간은 잘 보내주고, 다 지난 옛날 기억에 울지 않는다. 슬픈 건 슬프니까 흘려 버리고, 미운 건 미우니까 돌아선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에 빈 틈이 생기면, 여유도 생길거고, 웃을 일이 생길거다... 운이 좋으면 같이 웃어줄 사람도 생길 거다.
쭉 뻗은 단단한 팔로 빈 커피 컵을 훅.. 쓰레기통에 던진다. 습관처럼 내 가방까지 두개를 앞뒤로 메고 편의점을 나선다. 서둘러 쏙쏙 의자를 줄 맞추고 따라 나서면, 사거리 신호등 앞, 또 이만큼 자란 녀석이 나를 기다린다. 십대의 봄날에는 햇살도 비타민으로 쏟아진다. 눈부심 속에 그 녀석이 손을 내밀면, 하얀 셔츠에도 바람이 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