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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운 Jun 21. 2021

마투리(1편): 1948년 경성에 살다

영화 리뷰 ***스포 주의 ***

마투리

부제: 1948년 경성에 살다


시대극/드라마 2021년 여름 개봉 예정

125분 15세 관람가

감독: 오세영

주연: 손호준 (항수) 성준 (국영) 이유영 (서화)



올 여름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소식입니다. <마투리: 1948년 경성에 살다> 인데요, 제목이 조금 생소하죠? ‘마투리’는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순우리말로, ‘한섬에 들어차지 못하고 남은 양’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어딘가에 선택되지 못하는, 소속되지 못하는, 나머지, 찌꺼기, 잉여품이라는 뜻이죠. 말뜻을 알고보니, 어쩐지 조금은 서글픈, 안타까운 기분이 듭니다. 암흑기인 그 시절, 사회 통념에 부합하지 못해 여기도, 저기도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우리 청춘들의 이야기 -  <마투리>를 소개합니다.     


영화의 배경은 1948년 - 해방 후 3년입니다. 과연 경성은 어떤 모습일까요? 첫 장면은 흑백 다큐맨터리처럼 시작합니다. 아직 완벽하게 개발되지 않은 서울 -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경성'이라는 말을 더 자연스럽게 쓰는 이 곳에서, 험한 산세를 타고 내려오는 카메라가 조선 총독부 건물로 쓰였던 광화문을 한바퀴 돕니다. 생각보다 복잡한 전차 전기줄을 타고 날아가듯 화면이 흐르면, 저 멀리 언뜻 남산도 스쳐 지나구요, 한눈에 봐도 지금하고는 많이 다른, 낮게 붙은 건물과 한산한 골목골목을 지나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배경 음악이 잦아들고 흑백 화면이 서서히 색을 피워냅니다. 상상 속 그 시절의 활기가 살아나면서, 옛것과 새것이 교차하는, 신구의 조화가 참 다채로운 이 곳 – 이 영화의 주 무대인 종로입니다. 고급 자동차와 사람이 끄는 달구지가 함께 지나가구요, 아직은 지붕을 얹은 나즈막한 한옥집도 보이지만, 4-5층 높이되는 고층 건물도 많이 들어섰죠. 양복점, 떡집, 서양식 모자 가게와 주단집이 뒤섞인 바로 그 코앞에, 버젓이 차려놓은 각종 좌판들.. 예나 지금이나 노점상의 모습은 도시 상권의 한 몫을 단단히 합니다. 한껏 멋을 낸 신여성의 양산과 구두.. 그 뒤를 따르는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귀엽네요. 싹둑 자른 머리와 반바지는 아무래도 서양식을 흉내내는 최신 유행이었겠죠?  


잘 지은 어느 건물 모퉁이… 남녀노소 잔뜩 모여든 무리들 사이로 잠시 카메라가 내려 앉습니다. 돈놀이 한판에 흥분한 야바위꾼의 함성, 부추기는 소리, 원망어린 야유… 그런데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 난데없이 팔걸이 의자 하나가 길거리로 내던져집니다. 놀란 사람들이 와다다 흩어졌다 슬금슬금 눈치보며 다시 모여드는 이 건물은, 다름 아닌 <종로 의원> 입니다. 서울 한복판 금싸라기 땅을 차지한 이 곳은, 그 시절 몇 안되던 현대식 서양 병원입니다. 싸움이 났나본데, 들어가 볼까요?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한 남자가 이 소란의 장본인 인데요, 손에 잡히는대로 부수고, 집어던지고… 잔뜩 겁에 질린 환자들은 이미 저만큼 멀리에 몸을 숨깁니다. 직원들이 말려보려 하지만, 역부족인 상황. 남자는 더 힘껏 소리를 질러댑니다.


“이런 XX 제기랄, 원장 어디갔어? 다 물어내! 경성 바닥에 어디 의사가 없어서 새파란 계집애가 애를 받아? 아, XX, 그러니 또 딸이지! 너 책임져! 잘못 꺼냈으니까 XXX 네가 책임지라고!”


남자는 병원을 온통 공포에 빠뜨립니다. 문을 걷어차고, 벽에 주먹질을 하며 찢어진 웃도리를 아예 벗어제낍니다. 그리고는 복도 끝에 설치된 이 물건을 발견합니다! 연필꽂이같이 생긴 이 통... 무슨 물건인지 아실까요? ‘타호’라고 하는데요, 당시에는 치사율이 아주 높던 결핵을 막기위해서, 사람들이 가래를 뱉어 모으는, 그러니까 정말로, 결핵 환자의 균이 섞였을지도 모르는, 가래통입니다. 이성을 잃은 이 남자분, 결국은 타호를 휘두르며 사람들을 위협합니다.


“꺄아악…”


피하려는 사람들이 뒤엉켜 난장판이 되는 순간, 아까부터 지켜보던 중절모의 신사 – 이국영 (성준 분)이 나섭니다.

 

“아, 잠깐! 잠깐만요! 선생님, 그건 내려놓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다 본인이 뒤집어 쓰면 큰 병 얻고 세상 뜹니다. 아시죠? 한방에 휙 가는거..? 맨손으로 만질 물건도 아니고, 좀 참으셔야죠. 무슨 일입니까? 제가 얘기를 좀 들어드릴까요?”


잘 차려입은 양복에 모자, 분하게 수첩을 꺼내드는 깨끗한 손... 무엇보다도 목에 걸고있는 고가의 카메라..! 한눈에 봐도 신문사 기자인듯한 모습에 남자는 기꺼이, 최대한 침착하게 답을 합니다.    


“우리 애엄마가, 분명히 태몽도 말입니다, 호랑이 한마리가 지발로 걸어와서 턱, 하고 안기는 아들 꿈을 꿨어요. 그리고 점쟁이도 이번에는 절대로 아들이라고 했고, 응? 알겠어요? 우리집 3대 독자 아들이 나올 차례였는데, 그래서 내가 돈 싸들고 병원을 왔는데, 저 여자 보여? 저기 저, 재수없게 어디 젊어빠진 계집애가 의사라고 나서서 또 딸이 나왔다고. 딸이면 집에서 물 한 가마 끓였지, 뭐하러 여길 와? 야! 니가 의사야? 이리와, 당장 이리와서 빌어!”


다시 난동을 시작하려는 남자를 온몸으로 막아내는 직원들, 그리고 그가 손가락질하는 복도 저쪽 끝에, 흰 가운을 입은 여자 의사 서화 (이유영 분)가 보입니다. 겁먹을만도 한데 참 태연하게, 당당하고 꼿꼿하게 서있는 그녀... 이런 어거지 쯤이야, 이미 지겹게 겪었네요.


“그러니까, 낳고보니 또 딸이라 병원비가 아깝다, 못 낸다, 그 말씀이잖아요. 어쩌죠, 마음이 좀 아프네. 그 딸이 커서 훌륭한 인물이 되어도, 애비 공이 하나도 없을거에요.”


귀를 의심케 하는 차가운 말투... 멍하니 굳어버린 남자들을 지나 뚜벅뚜벅 갈 길을 갑니다. 이와중에 재빨리 서화를 스캔하는 국영, 아유, 남자들은 참... 갑자기 멈춰선 서화가 뒤돌아서서 한마디 쐐기를 박습니다.


“아, 요즘 천연두 접종하고 있어요, 아시죠? 딸들 다 데리고 오세요. 그리고, 주사는 꼭! 남자 선생님한테 맞게 하세요. 그러면, 한 3일 지나서 면역이 생길때, 전부 아들로 바뀐대요. 맞죠? 여자 의사 손에 태어나면 딸, 남자 의사한테 주사 맞으면 아들… 축하드려요. 아들 부자 되셨네. (혼잣말인척 손으로 세며 중얼중얼...) 어우, 아들이 몇이야… 위로 넷에, 오늘 태어난 애까지 다섯…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사라진다) ”


“이런, XXXX, 너 이리 안 와? 여자가 어디서 싸가지 없게...!!”


다시 서화에게 덤비려는 남자, 그런데 그를 막으려던 국영이 밀려 넘어지면서, 그만 그 비싼 카메라가 먼저 바닥에 쿵... 세게 부딪히고 맙니다.


“어, 어..? 아아~, 이거 조선에 없는 건데… 선생님, 이거 영국에서 가져온 거에요. 얼마 짜리인지 알아요? 사람을 그렇게 밀면 어떻해요? 부서진거, 이거, 물어낼거에요?”


돈 얘기에 그제서야 슬금슬금 꼬리를 내리는 남자. 상황은 진정이 되고, 카메라를 살피는 척 서화가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는 국영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스칩니다.


대 끊어 먹는다 잔소리 폭격 당하던 노총각... 이상향을 찾았을까요? 요란했던 첫 만남 이후, 국영은 서화를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병원을 들락거리게 됩니다. 기다란 키와 팔다리... 바짝 말라 딱히 그의 취향은 아닌 듯 하지만, 지적이고 고상한 모습을 쉽게 잊지 못합니다. 국영은 일 때문에 여자 의사를 취재해야한다는 핑계를 만들어 마침내, 그녀와 마주 앉았습니다. 여자도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르던 시절, 나이 많은 남자만 의사 대접을 받는 풍토를 논하며, 둘은 상당히 잘 통한다느낌받습니다. 이걸 놓칠 국영이 아니죠..


“그럼 이제 일 얘기 말고 … 나 어때요?”


이.국.영… 이 아이가 태어난 건 국가적 영광이다.. 해서 이름이 '국영'인 이 멋진 남자는, 수재들의 상징 경성 제대를 나온 앨리트로, 조국 일보 기자랍니다. 이미 경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인기남인데요, 외모, 학벌, 직업에 성격까지 좋으니 당연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 가문의 유명세 때문이기도 하죠. 조상 대대로 나라일을 해 온 명문가 출신으로, 경성 안에만도 여러 채의 건물과 땅을 가진데다가, 특히 청계천 옆자락의 7층짜리 <한양 백화점>이 무려 이 집 소유입니다.


“만약에 선생님이요, 정서화 선생님이 나, 이 미천한 이국영을 만나주신다면, 나는 선생님께 뭘 해 드릴수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이 남자, 정말 진지하죠? 사랑에 폭 빠진 저 눈빛…!


“선생님이랑 이렇게 자주 시간을 보낼수 있다면, 나는 우리 백화점에 있는 물건 전부라도, 통째로라도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내가 썩 괜찮다, 나랑 같이 살겠다, 기꺼이 내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주겠다 하신다면, 나는 선생님께, 아니, 정서화씨 당신께, 새 병원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어중이 떠중이 저런 무식한 인간들이 들락거리면서 당신 괴롭히는게 싫어요. 많이 배우고 부유한, 대한민국의 상류층 여성들만 상대하는, 깨끗하고 우아한, 여성 전문 병원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어때요?”                    


아… 이게 혹시 저 시절 다 가진 자의 프로포즈인가요? 엄청난데요? 저런 고백을 받는 여자는 과연 어떤 기분일까요? 하루가 멀다하고 서화에게 보내지는 꽃다발과 아기자기한 선물, 편지… 퇴근을 기다려주는 고급 자동차까지! 국영은 가끔 한번씩 출장 간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대신 기사를 내보내기도하는, 치밀한 밀당을 시작합니다. 결국 냉랭한 서화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죠. 둘은 점점 가까워지고, 퇴근길이 하루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됩니다.


영화 <마투리> 속에는 역사책에나 나올 법한 장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1948년의 청춘들이 모이던 낙원동 벽돌길이 그 중 하나인데요, 일찌기 요절해버린 박인환 시인의 서점 <마리서사>, 책과 음악을 함께 즐기던 모나리자 다방, 한글보다 한자가 더 많이 쓰이던 수공 인쇄소와 빈대떡으로 유명하던 유명옥 선술집… 국영과 서화는 이 수많은 종로의 명소에서, 어떤때는 연인처럼 다정하게, 어떤때는 그 시절 지식인다운 모습으로 토론도 벌이며, 조금씩 서로를 알아갑니다.

 

여기서 잠깐!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정신세계까지 백프로 똑같을 수는 없겠죠. 서화는 이따금 한번씩, 마치 커다란 벽같은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건 국영이 가진 넘치는 자신감이나 우월감 뿐만이 아닌,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은, 태생부터 다른 이.국.영. 만의 문제였습니다.


“독립투사의 자식이 그 집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게 아니잖아요. 친일파의 자식도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태어나보니 부유했고, 자라보니 대대손손 뜻이 남들과 달라요. 그게 가풍이고 내 가족이라면, 부정하거나 숨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것 간수 잘 하고, 받은 것 잘 쓰겠다는데, 부끄러울 필요 있나요?”         


완벽한 남자 이국영의 가장 큰 자랑인 한양 백화점이, 사실 그의 가장 큰 단점이기도 했죠. 막강한 이씨 가문의 ‘부’가 문제인데요, 사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일제 강점기 시절의 대표적인 친일파로, 온갖 부정한 혜택을 다 누려왔습니다.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이 되면서, 뒤늦은 민족주의가 유행을 하게되자, 친일파 고위층이과 일본인만을 상대하던 사쿠라 백화점을 <한양 백화점> 으로 이름만 바꾼채, “조선 사람이 세운 민족 백화점” 이라는 선전 문구를 내세워, 갑자기 엄청난 애국심을 노래했던 겁니다.


"난 남들보다 백배 더 노력했어요. 최고의 학교를 나왔고, 최고의 신문사를 다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조상 덕을 본 건 없어요. 매일 코피를 흘려가며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반칙이다 특혜다 욕하며 부정해요. 친일파 후손이라고 모두 잘 사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몇배를 더 독하게 노력해야, 그 부와 명예를 지킬수 있어요."    

     

*


국영 가족의 친일적 모습은 여동생 자영에게서도 예외없이 나타납니다. 늦둥이 귀한 딸로 자란 자영은 미술 학도를 꿈꾸지만, 예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좋은 집안의 멋진 남자에게 시집을 가기위한 수단일 뿐이죠. 외국에서 사들이는 희귀한고 값비싼 재료와 도구들 덕분에 여기저기에서 수상을 하고, 미술 천재로 승승장구합니다. 일어를 한국말처럼 구사하고, 여전히 일본을 동경하며 사랑하는... 잘가꾼 화초처럼, 스스로를 일본 사람이라 생각하는 신여성입니다.


“동경 미술 전문대에 갈거야. 교수가 못 되어도 좋아. 다시는 안돌아오고, 거기서 평생 그림만 그리며 살고 싶어. 자영이 뭐야 촌스럽게.. 유학만 가면, 이름부터 되찾을거야. 아츠코 유키다… 내 원래 이름으로 학교 갈 수 있는거지? 거기서 조선인인거 소문나지 않게 해줘. 오빠는 능력 있잖아, 할 수 있어, 응?”


둥글게 웨이브 넣은 서양식 올림 머리에 짙은 화장, 일본풍의 레이스로 치장한 자영은, 생일을 맞아 한양 백화점 화랑에서 전시회를 엽니다. 이곳은 운보 김기창, 월전 장우성 등 유명 화백들만 초대하는 곳으로 유명했는데요, 뭐, 하나뿐인 딸이 전시회 좀 해달라는데 거절할 아버지 있나요? 게다가 따로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원래 가지고 있는 백화점에서, 원래 가지고 있는 화랑 벽에 그림만 좀 걸면 되는 걸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


“다 죽은 그림이야. 영혼이 없어.”


나혜석의 뒤를 잇는 천재 여류 화가… 라는 다소 과장된 칭찬에만 익숙하던 자영은, 자신의 전시회에서 초라한 행색의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교장의 지시에 억지로 학생들을 인솔하고 전시회에 오게 된 미술 선생 항수 (손호준 분). 그는 자영의 작품들을 무표정하게, 정말 리액션이라고는 1도 없이, 한심스럽게 바라봅니다. 그런 항수가 너무 싫은 자영, 끝내 참지 못하고 따지고 들죠. 그녀의 그림 앞에 대치하는 두 사람.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그림 속 어르신을 한번 봐요. 본인 작품이니 잘 알겠네요. 도데체 뭘 그린 겁니까?”

“뭐긴 뭐에요, 전차 기다리는 노인네지.”

“그리고요?”

“그리고 뭐요? 전차가 안 오잖아요. 그래서 쭈그리고 앉아있는 거에요, 올때까지.”


항수는 자영의 그림이 왜 부족한지, 어째서 죽었지... 조목조목 이야기 합니다. 어르신의 표정에 감정이 없다, 앉은 자세에 생명이 없다, 어디를 가는지, 하루가 어땠는지, 누구를 만나 행복했는지 아니면 서러웠는지…


“이정도는.. 붓하고 물감만 있으며 아무나 그려요. 기계적인 거니까... 겉에 보이는 것만 고대로 베껴오면 되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정말 화가라면, 저 분의 영혼까지 그려야 해요. 그렇게 본인의 혼도 함께 담아져요. 저 인물을 통해서 당신이 어떤 화가인지, 당신이 보는 세상이 어떤지가 고스란히 우러나게 되죠.”

 

태어나 한번도 비판이라는 걸 받아 본 적 없던 자영은, 꼬재재한 항수가 마음에 들지않습니다. 위아래로 행색을 훑어보며 비웃을 꺼리를 찾던 그녀의 눈에 갑자기... 그림에 열중한 따뜻한 눈동자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짙은 눈썹에 날카롭게 선 콧날, 듣기 싫지만 할 말 다 하는 입술… 거칠고 푸석푸석한 이 남자는 절대 그녀의 이상형이 아니었지만, 어쩐일인지.. 조용조용한 그의 목소리마저 그녀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댑니다.


“제가 보기에 이 그림은 그냥... 비싼 물감 마음대로 쓰는 부자 아이가, 자다깨다 하도 할일없고 심심해서 그려오는 미술 과제 수십장 중 하나에요. 이런 곳에서 전시하고 판매 할 만큼의 작품 수준은 아니란 얘기죠.”

“팔려요.”

“예?”


너무도 당당한 자영의 모습에 항수는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이 그림, 좋은 값에 팔린다구요. 내기 하실래요? 이거 오늘 안에 팔리면, 나한테 사과해요. 만약에 안 팔리면, 내가 그쪽을... (돌아보던 항수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는 자영) ... 그러니까 그 쪽을... 이름이 뭐에요?”

".....예...?"


자영보다 더 당황한 항수...!


"아니, 내 말은... 그쪽 이름을 알아야 .. 제가 그쪽을... 평생 모실거 아니에요, 스승으로???"

"누가 지금 그림 가르친대요?"

"어쨌든, 그쪽이 내 그림보고 엉망이라고 악담을 하니까, 이 그림이 정말 안 팔리면 내가 평생 ... 스승으로 모시겠다고요. 나 비싼 사람만 선생써요. 영광인줄 알아요... 그래서 이름이 뭐에요?"  

"...."

“자영아...?”


할 말을 잃고 선 항수를 구한 건 자영의 오빠, 국영입니다. 마침 서화와 함께 전시회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서로 아는 사이인 서화와 항수...! 평소답지않게 많이 당황해 하는 항수를 국영에게 소개합니다.


“전에 말씀 드렸었지요? 채항수씨라고, 저희 집에 머물고 계신 손님이세요, 남동생 은인…”

“아, 이분이 그분이세요? 이국영입니다. 서화씨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림 그리신다면서요? 우리도 하나 그려주세요. 약혼식에 쓰게.”

“저기, 갑자기 약혼식이 무슨…”


일방적인 약혼 얘기에 서화가 놀라자, 항수가 한마디 거듭니다.


“그 약혼식은… 서화씨랑 하시는 겁니까?”      

"예...?"


두 남자의 요상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서화… 이 세 사람, 이대로 괜찮을까요?


한편, 어색한 기운을 감지한 자영이 슬쩍 자리를 빠져나와 화랑 직원에게 귓속말을 합니다.


"저 그림 내려. 아무한테도 팔지마. 절대 팔리면 안돼. 내가 도로 가져갈거니까 잘 숨겨놔."  


*


항수와 국영. 이 두 남자가 신경전을 벌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먼저 국영은, 서화 혼자 사는 집에 얹혀산다는 젊은 남자가 탐탁치 않았겠지요. 남동생의 부탁으로 잠시 머문다고는 하지만, 성인 남여 사이,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얼굴을 본적도, 말도 해본 적도 없지만, 국영은 걱정과 동시에 질투가 쌓여가고 있었겠죠.


그리고 항수, 이 사람은요... 평소에는 순하디 순한 사람이, 왜 이렇게 국영에게 뾰족하냐구요?

 

항수는,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길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립니다. 종로에서도 연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핫플레이스 - 숭미관 옆 골목의 소문난 초상화 거리가 그의 일터입니다. 불과 며칠 전 밤 늦은 시간에, 자리를 정리하던 항수에게 한 여자가 초상화를 부탁합니다. 술이 많이 취한, 보기드문 미인이었는데요, 함께 온 남자 역시 약간 비틀거렸습니다. 너무 취했으니 다음에 다시 오시라고 권하는 항수, 그러자 남자가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그에게 건넵니다.


“그러지 말고, 자! 그림 선생, 이거 비싼 거에요, 경성에서 집 열 채 값이야. 이 시계 줄께 그림 하나 그려줘요. 우리 이쁜이가 소원이라잖아. 이게 조선에는 들어오지도 않아, 스위스 오메가 시계거든.. 일본에도 딱 열개 온 거 내가 하나 가져왔지… ”


꼭 부둥켜 앉고 민망하게 쪽쪽거리며 서로의 입술을 핥아대는 두 사람. 항수는 짐을 챙겨 돌아섭니다. 남자가 황급히 그의 팔을 붙잡습니다.


“어이, 환쟁이… 사실 내가 여기 신문사 기자야. 당신 기사 한번 크게 내 줄께, 우리 오늘 밤새 그림이나 그리자. 한 오백장 그려주면 내가 신문 1면에다가 이만하게 내줄게, 장사 엄청 잘 될거야, 응? 자, 내 명함! 기분이다, 시계도 가져가! “


남자가 내민 명함은 바로 ‘조국 일보 기자 이국영.’ 항수는 거칠게 그를 뿌리치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합니다.


"야! 이젠 환쟁이 자식까지 날 무시해? 너 우리집 망했다고 깔보냐? 웃기지 마! 친일하다 모가지는 짤렸어도, 아직도 돈이 넘쳐나게 많아! 내가 누군지 알아?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가 누군지 아냐고?? 나 아직 대한제국 1프로야!"


항수의 뒤통수에 대고 악을 쓰는 국영... 정말 많이 취했나보네요. 여자의 무릎으로 쓰러지며 중얼 거립니다.


"... 짜식들아.. 친일은 반역이 아니라 개혁이야... 미래 조선을 위한... 개발계획이었다고.. 니들이 뭘 알아... 왜 나를 욕하냐고... 돈 많은 게 죄야...? 그래, 가라... 다 꺼져라... "

  

걷고, 걷고, 걷고... 집앞에 와서야 겨우 한숨 크게 내뱉는 항수. 그는 전에도 국영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서화를 집에 데려다 주던 그 사람, 정확히 말하면, 그의 고급 자동차와 비싼 양복을, 담벼락에 바짝 붙어 몸을 숨기고 지켜본 적이 있었죠. 친절하고 다정한, 서화를 많이 사랑하는 능력 좋은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상 저런 놈이라니… 세상 참, 마음같지 않네요.


*


전시회 이후, 국영의 여자 문제를 끝끝내 서화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항수. 자꾸 피하다보니 어색해지는 것 같아 더 신경이 쓰입니다. 평소처럼 달을 바라보던 늦은 시간, 서화가 마당으로 나옵니다. 아마 일부러, 뭐라도 말을 걸어 보려고 나온 거겠죠?


"깜깜한데 또 나와있어요? 다치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오늘은 한번도 안넘어졌어요."  


마루 끝에 와서 앉는 서화. 평소에 자주 넘어지는 항수를 걱정합니다. 영양 결핍인지 자꾸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어디든 부딪쳐 멍들고 그러네요.


“창유가 통 소식이 없어요. 편지 보낸지 한참 되었는데… 도착했을까요?”

“잘 있을거에요. 사할린은 우편이 더 힘들거라더니, 그런가보죠.”

“또 달빛 보세요? 부모님 생각하죠?”


항수는 대답 대신 웃어보입니다. 서화도 더 묻지않고 조용히 어두운 하늘만 올려다 봅니다. 동생 생각이 나겠죠. 하나 뿐인 남동생 창유가 또 멀리 갔으니까요.  이번에는 생각지도 않은 이유로, 정말 화나고 어이없는 이유로 쫒겨갔습니다. 한창 유행하던 노래 <선구자>가 이승만 박사를 위한 것이라는 극우주의자들의 선동적인 신문 기사에 반박하는 글을 낸 것이 문제였습니다. 대학생이던 창유가 주요 신문도 아닌, 자신의 학교 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창유 목소리)

/…메마른 중국 땅에 피 쏟은 적 없는 자는, 감히 그 입으로 선구자를 논하지 마라.

     멸망한 왕족의 씨앗이 발아했다 우겨도, 그대의 황궁은 돌아오지 않는다.

     일제에 베인 상처 하나없이 깨끗하다면, 당신이 탄다는 그 멍청한 말은 대한제국을 달릴 수 없다…/


한창 인기가 치솟던 <선구자>의 작곡가 윤해영이, 어느날 갑자기 월북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혹자는 이승만 박사의 세력이 누명을 씌웠다고도 했고, 혹자는 북한이 아니라 중국으로 갔다고도 했지만, 아무도 그의 흔적을 찾지 못하죠. 대신, 창유처럼 일개 대학 신문에라도 선구자와 관련된 글을 쓰거나 노래를 했던 사람들을 잡아들였습니다. 겉으로는 빨갱이 세력을 처단한다는 이유였지만, 자꾸만 김구 선생 쪽으로 기우는 민심을 꽁꽁 얼려버리려는 그들의 수작이었습니다. 어쨌든 노래는 금지곡이 되고, 몇글자  동생은 다시 한번 조국을 등지게 됩니다.

 

어둠에 쌓여 눈빛만 흐릿하니 보이던 이었습니다. 창유는 오히려 비맞고 선 누나와 항수를 걱정합니다.


“형, 이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어요. 남에서 왔다는게 알려지면, 그쪽 가족도 다 죽을 수 있어요. 여기서도 북쪽 이야기만 나오면 끌려가 죽는다는데, 마음잡고 정 붙이고 살아요. 나 대신 여기서, 우리 누나 좀 부탁해요.”

“여기 걱정 말고, 너만 생각해.”

“누이, 난 아무래도 도망다닐 팔자인가봐. 그래도 적군에 쫒길 때는 애국심이라도 있었는데… 같은 한국 사람한테 쫒겨다니니 괘씸하네."


왜 두번째 도망이냐구요? 창유는 해방 전, 스무살도 안된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떠났었습니다. 광복군이 되어 조국을 구하겠다는 마음 하나였지요.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 강제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항수도, 바로 그 광복군에서 만나게 됩니다. 둘은 서로를 응원하면서 추위와 굶주림, 힘든 훈련까지 다 버텨냈지만, 얼떨결에 해방이 되면서 강제로 해산 당하고 말죠. 광복군을 게릴라로 규정하며, 대한민국 군대로 인정하지 않던 정치 세력 때문에, 오고싶은 사람은 각자 알아서 귀국하라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끼니를 구하기도 힘든 악조건에, 값비싼 교통편을 이용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창유와 항수는 그렇게, 끝도 보이지 않던 기나긴 귀국길을 함께 합니다.


평안도 출신인 항수에게는 조금 가까운 여정이 될 수도 있었지만, 여행 중에 얻은 콜레라로 죽다 살아난 창유를 혼자 가게 할 수 없었죠. 결국 그는 서화가 있는 경성까지, 간신히 숨만 붙은 창유를 업고 내려옵니다. 병약해진 그를 챙기고, 생활비에 집안일까지 도맡았던 항수의 도움으로, 무사히 의과 대학을 마친 서화… 이쯤되면, 말로는 하지는 않아도, 전혀 마음이 없을 수는 없지 않나요? 최소한 둘 사이에, 약간은 서로 은인같고, 고맙고, 기댈 수 있는… 그런 신뢰같은 거라도 좀 쌓이지 않았을까요?


창유가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 학교로 돌아가게 되자 비로소 마음을 놓는 항수.. 늘 그립던 부모님 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 상상도 못했던 3.8선이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미 수년전부터 장난처럼 농담처럼, 니 땅이니 내 땅이니 하던 것이었는데, 김구 선생께서 북한에 들러 성명을 발표하고 돌아오신 이후, 사람은 물론 편지 한통도 왕래 못하도록 싹뚝... 우리 땅이 두 동강 납니다. 어디가서 억울함을 호소하기는 커녕, 그러다 불온 세력으로 몰리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흉흉한 소문만 돌고, 결국 항수는 고향인 북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늦은 밤이면 달을 찾아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그의 마지막 일과가 생긴거죠.  

       

“서화씨는 달이 왜 좋아요?”

“해는 너무 뜨겁고, 눈 부시고.. 달은… 없으면 많이 허전할 거에요. 항상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난것 처럼요.”

“달은... 아마 달은 사라져도, 빛은 남을 거에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요, 달은 안보여도 빛은 보이거든요. 서화씨도 눈 감아봐요. 세상이 온통 깜깜해도, 지금처럼 앞이 하나도 안보여도요… 빛은, 마음 속에 있는 그 사람처럼, 아니면, 그 사람이 되어서… 내 안 어딘가에, 계속 남아요.”


서화가 눈을 감습니다. 하늘이 내려 달을 덮습니다. 이 빛... 마음 속 이 사람은 내 빛으로 남아줄까요...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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