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죽었니 살았니 1
죽어남은 자와 살아남은 자
11.1.1 서장실
종태와 석호가 류시환 성폭행 고소건을 보고한다. 크게 기뻐하지는 않아도 안도하는 서장.
"잘했어, 잘했어. 며칠만이야, 이게? 주말동안 발로 뛴게 보람이 있네. 리화가 빨라, 응? 잘 가르쳐봐."
"상태 좋아요. 애들 중에 제일 멀쩡합니다. 어디서 찾으셨어요?"
"안산에 있는거 빼왔지. 외국인들 엄청 나잖아. 평택이랑 나랑 걔 데려올려고 기싸움하다가 내가 이긴거야. 힘들었어, 외국어 되지, 몸 싸움되지.. 파트너 누구 붙이나?"
"아직 모르겠습니다. 징계 위원회 진행되는 거 봐서.."
석호가 답한다.
"무고가 크니까 감봉정도에서 끝날거야. 고가 떨어져서 지 혼자 손해보는 거지, 팀에는 큰 불편 안 주게 해야지. 그리고 그 영상, 민규가 보냈다고? 그 자식은 왜 그런 걸 몰래 찍었대? 조사해봐야하는 거 아냐? 그렇게 안 생긴 놈이 숨어서 영상을 찍어?"
"진우가 얘기 해봤는데, 그날 계단 옆에서 담배 피우고 있다가, 이채은을 봤답니다. 몰카 할 생각은 없었고, 시환이한테 술주정을 하길래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나중에 진우 보여줄려고, 몰래 찍었는데, 대화가 그렇게 갈 줄은 몰랐겠죠."
"사람들하고 돌려본 건 아니고?"
"아닙니다. 내용이 좀 그래서, 가지고만 있었는데, 이번에 고소 들어오고나서 고민하다가 찬호한테 보냈습니다. 이런게 도는데 봤냐, 뭐 이런 식으로.. 그리고 사실, 그날 목격자는 꽤 됩니다. 영상 아니었어도, 재판 가게되면 증인 세우려고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증거자료니까 그냥 넘어가지만, 조팀장 통해서 구두 경고 줘. 함부로 술취한 여자 몰카 찍고 그러다 큰일난다. 혹시 모르니까, 그놈 전화기랑 컴퓨터랑 한번 싹 검사하라 그래. 얌전한 놈이 그런 걸 하네.. 요즘 사람들 툭하면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거 큰일이야."
전화가 온다. 서장이 손을 내젓는다.
"어, 잠깐만.. 이거 잠깐 받고.. 어, 나야, 오랜만이지? ... 그래, 그렇다니까. 나도 기절하는 줄 알았다, 거기에 계셨어... 갔다왔는데, 얼마 못살겠더라. 눈은 잠깐 떴어, 알아보는 것 같기는 해... 그래, 시간들 내서, 너무 늦기전에 가서 인사드려... 응, 여기저기 좀 전해주고.. 그래, 또 연락해.. 응..."
전화를 끝는다. 종태를 본다.
"대전 내려간 동진이. 생각나냐?"
"알죠, 경찰 학과 가신 분. 은퇴 하셨을텐데?"
"그래, 기환이 형이랑 둘 다 일찍 때려치고, 그때는 경찰 안하면 뭐할거냐 말렸는데, 둘 다 잘 찾아갔지. 교수가 낫지, 정년까지 현장 뛰는 것 보다.. 내가 어제 아는 놈들 한 백명은 연락 한거 같애, 기환이 형 병원에 가보라고.."
석호를 향한다.
"너는 송 교수 모르지? 강지율이 친아버지.. 요양병원에서 찾았어. 경찰 그만두고 유학갔다가, 대학에서 애들 가르쳤거든. 갑자기 연락이 안되서 이상하다했는데, 거기 있었네.. 고향이라 그런지, 큰 아들이 거기있어서 그런지.."
석호가 말없이 가만히 듣고있다. 바쁘게 머리를 굴린다. 질문이 들어오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하나..
"근데 낼모레 돌아가셔도, 이제는 법적으로 아버지가 아니라서 강지율이가 휴가가 안될거야. 있는거 땡겨 써야될테, 얼마나 남았냐? 그 자식 벌써 많이 썼잖아.."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다른 가족이 없으니까, 너희가 시간내서 도와주고.. 다들 이름은 알거야, 국과수에 송창률이라고, 우리랑 일 많이 했잖아, 부검하는 친구. 지율이 오빠니까 겸사겸사 가서 인사들도 하고.. 나가서 일 봐. 종태 잠깐 남고."
석호가 나간다. 말이 없는 종태에게 사탕하나를 툭 던진다. 까서 입에 넣는다.
"잠은 잤냐?"
"나이드니까 누워도 잠이 잘 안 와요."
"형님 보고와서 더 그렇지. 나도 어제 한숨 못 잤다. 어쩌다 그렇게 되셨는지.."
"요새 60 이면 젊은데.. 뭐 바쁘다고.."
"몸이 불편했다잖아, 쓰러지고 나서.. 야, 근데, 그러면 타임라인이 나온다, 그지? 형님이 쓰러져서 창률이 일하는 대학병원 있었고, 지율이가 미국에서 병문안 들어왔다가 시환이 사고를 목격하고.. 건강 안좋아지니까 다 그만두고 강원도로 옮기면서, 아들하고 같이 사는데, 지율이가 한국 들어오고.. 그치?"
"그러네요. 근데 병원은 서울이 낫지않나? 왜 원주까지 옮겨, 엄청 시골인데?"
"아들이 의사인데, 알아서 했겠지. 요양 겸 쉬라고 내려갔던가.. 좋겠다, 그래도 의사 아들이 있었네. 전화 딱 안 받더니, 누워있었어. 참 그 시절에 몸 좋았는데.."
"아유, 엄청 났었죠. 경찰 될라고 태어난 사람이었잖아요. 지금 은석이처럼 딱 벌어져가지고.. 그때는 참 크게 봤는데, 어제 보니까 완전히 반토막이 되서.."
말을 잇지 못한다. 속이 쓰리기는 서장도 마찬가지.
"그 형님, 맨날.. 선배와 하느님과 아버지는 동급이라 그러더니, 곧 하느님한테 가겠네."
"후배는 자식이랬어요, 제일 좋은거요."
"뭐가 좋아? 웬수라는 얘기지."
"하.. 그래도 애들이 돌아오네요? 진우, 시환이, 지율이.. 경찰 아버지 싫었을텐데.. 왜 그렇잖아요, 의사집 애들이 의사하고, 법관집 애들이 법관하면, 어머, 애들 잘 키웠네요.. 경찰집 애들이 경찰하면, 아이구 힘들었구나, 근데 그걸 또 할라고..?"
"그건 양반이야. 대부분은, 누구 복수 할 사람 있어?? 그거부터 물어보지."
웃는다. 속이 상해 눈물이 고이려다 만다. 손을 내민다.
"사탕 몇개만 줘봐요. 애들 갖다주게."
"네가 사다 줘, 얼마나 한다고.."
"아이, 나갔다 와야 되잖아, 몇개만 줘요, 지율이 갖다주게."
지율이라는 말에 사탕 한 주먹을 쥐어준다. 세어보며 일어선다.
"두개 더 줘요, 모자라요."
"아이, 새끼 진짜.."
"민규랑 아래층 찬호도 줘야지. 시환이 돕는다고, 비번인데 얼마나 싸돌아 다녔는데?"
두개를 더 꺼내준다. 받아들고 서장실을 나선다.
10.5.2 로비
리화와 나란히 앉은 찬호. 그리고 마주 앉은 민원 할아버지와 딸. 왔다갔다 복잡한 1층 로비다. 휴게실에서 커피를 타왔다.
"좋은데서 밥이라도 먹자고 했더니, 정말 여기밖에 안되요?"
"규정에 어긋납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리화가 대답한다. 입을 꼭 다문 찬호. 할아버지가 들고 온 서류 봉투를 본다. 발신인이 강지율이다.
"그까짓 밥 한끼가 어쨌다고, 높은 것들은 더 큰 거 받으면서..."
딸이 툭툭 친다. 헛기침을 하는 할아버지. 종이뭉치를 꺼내 찬호에게 내민다.
"이찬호 순경님, 내가 우리 딸까지 데리고, 그때 그 일, 사과하러 왔어요. 이거 그 여자 경찰관이 보내준건데, 다 읽고 나서, 이 순경님 만나서 차 한잔 하면 합의 보겠다고.."
2년전 그의 사고에 관련된 기사들이다. 리화가 달라고 손을 내민다. 잠깐 주저하다가 건네준다. 한장한장 훑어본다.
"미안합니다. 나이가 들면 뭘 자꾸 잊어요. 그런 큰 일 겪은 사람인거 모르고, 내가 허튼 소리를 했어."
딸이 거든다.
"원래 이런 분 아니신데, 작년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좀 화가 많아지셨어요. 저희가 상담 받아보시게 예약도 했어요. 죄송합니다."
"내가 여기 오래 살았어요. 동네 일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 민원을 내야 고치고, 그게 좋은 일이라고 착각한거야. 거기다가 일 열심히 하는 젊은 분한테 함부로 말을 하고...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잘 살아줘서 고마워요. 위험한 일인건 들어서 알지만, 그런 걸 실제로 겪은 분이신 건 몰랐어요. 내가 많이 부끄럽습니다. 미안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찬호가 답한다. 많이 놀란 얼굴의 리화가 다 읽은 기사들을 봉투에 집어 넣는다.
"내가, 알고보면 그렇게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여기 내 제자들도 아주 많아. 이석호 경감이라고, 얼마전에 뉴스에 나왔었지? 그 친구도 내 제자에요. 아주 똑똑하고 잘 생기고, 옛날 얼굴 그대로야. 오늘 있나? 직통 전화가 없는지, 연결을 안해줘.."
채은 가족과 대질 심문을 마치고 잠시 쉬러 나가던 지율과 진우를 본다.
"어이구, 어이구, 이봐요, 여자 경찰관님!"
"어, 오셨어요? 말씀 중이세요?"
"그럼요, 보내준 거 다 읽었고, 고마워요. 내가 그때 크게 실수한거, 이분한테 지금 사과 중이에요."
"잘 오셨습니다. 그럼 그때 일은 없던걸로 하구요, 말씀 잘 나누세요. 저희는 식사 가는 중이라.."
"같이가요, 같이. 내가 한끼 살께요."
"아닙니다, 저희 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리고 외부 접대는 못받게 되어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할아버지가 밥한끼도 못해주나, 옛날 은사님 만났다 생각해요. 내가 이석호 경감도 직접 가르친 사람이라니까."
"정말요? 언제요?"
모두가 솔깃해한다.
"내가 걔 중학교때 담임이었어요. 2년을 내리 맡았어. 아주 똑똑했지, 잘 될 줄 알았어."
"아, 혹시... 그 무렵에 갑자기 지방으로 이사간 거 기억 나세요?"
"왜 그래, 뭐 할라고?
지율이 진우를 돌아본다. 진우가 가만있으라 눈짓한다.
"그럼, 기억하지. 이상하다 했거든. 적응을 잘 못해서, 몇번을 집나와서 우리 집에서 자고 가고 그랬는데?"
"선생님, 오늘 저랑 점심 같이 드세요. 지율아, 너는 가서 형들이랑 밥 잘 먹어? 있다 보자. 가세요, 어디, 좋아하시는 데 있으세요?"
지율을 남기고 할아버지와 걸어간다. 딸이 따라 나선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율이 그냥 돌아선다. 앉았던 자리를 치우고 있는 리화와 찬호에게 인사를 하고 올라간다. 리화가 서류 봉투를 집어 찬호에게 내민다. 손을 저으며 종이컵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찬호.. 위층으로 올라가는 리화.
10.5.3 식당
아는 사람을 만날까 싶어, 24시가 아닌 다른 백반집으로 들어가는 진우. 할아버지와 둘이 앉았다. 질문부터 시작한다.
"오래전 일인데 기억을 하시나봐요."
"그럼요, 석호같은 놈은 십년에 하나 볼까 말까한, 선생들의 드림 학생이에요. 모르는 사람없지."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된 거요, 배경이 좀 궁금해서요. 아시는 거 있으세요?"
"겨울방학 중이었는데 갑자기 애가 혼자 찾아왔어요. 부산에서 올라왔는데 잘데가 없다는 거야. 걔가 할아버지랑 살았는데, 우리 마누라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셨어요. 이상해서, 왜 갈데가 없냐, 할아버지네 가지, 했더니, 거기 이제 안 산다고, 며칠 전에 부산 어디로 갔다는 거에요..."
/회상
"부모님이 너 여기 온거 아시냐?"
"아니요, 여기는 모르실거에요. 오늘 하루만 재워주시면, 내일 내려갈께요."
아이를 살피는 선생님. 옷차림과 머리 모양... 평소의 깔끔한 그 모습이 아니다. 이미 집을 나온지 며칠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잘했어, 제대로 잘 찾아와서 다행이다. 씻어. 밥부터 먹자."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는 석호. 아내에게 식사를 부탁하고 소파에 앉는다. 핸드폰을 뒤져 석호네 부모님 전화번호를 찾는데, 욕실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
"울음소리요?"
"아유, 처음이었어요, 그 녀석이 우는 거, 그것도 그렇게 서럽게 우는거.. 그래서 뭔가 잘못됬구나, 생각했지. 일단 애하고 먼저 얘기를 해보기로 하고, 부모한테 전화도 안하고 기다렸더니, 한참 있다가 씻고 나오더라고."
"이야기 하던가요, 왜 그랬는지?"
"그때 걔 제일 친한 친구가 죽었어요. 집에 강도가 들어서 어머니랑 애랑 죽었어. 그것 때문이었지."
백반 2인분이 나온다. 잠시 이야기가 중단된다. 아주머니가 가고, 진우가 다시 묻는다.
"송시율이요?"
"어? 아시네! 맞아요, 시율이도 우리반이었는데, 에효, 둘이 아주 친했거든요. 근데 석호가 갑자기 부산을 가면서 시율이가 죽은걸 몰랐대요. 내 생각에는 아마, 부모가 석호 모르게 할라고, 일부러 애를 데리고 내려간 것 같애. 충격받을까봐.."
육계장을 한수저 뜬다.
"크.. 나중에 뉴스를 보고 알게 되서,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온거에요, 말도 안하고... 근데 와봤자 별거 있나, 그 집은 경찰이 못 들어가게 다 막아놨지, 할아버지네는 갈 수도 없지.. 근데 시율이가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걔가 병원에 입원을 해 있었어요, 충격을 크게 받아가지고.. 석호가 병원도 찾아갔었는데, 이 쪼꼬만애를 목격자라고, 경찰이 문에 딱 지키고 서서 못들어가게 하더래요. 잠깐만 애 좀 보자고, 오빠 친구라고 그렇게 부탁을 해도 안되고, 혹시 남은 가족들이라도 만날까해서 병원 로비에서 이틀을 자면서 버텼는데, 결국은 동생 얼굴도 못 보고 거지꼴로 우리집에 찾아왔더라구요."
어르신의 얼굴에 진심이 묻어난다.
"그 녀석들이 참 친했는데, 한놈은 검사한다 그러고, 한놈은 경찰 한다고.. 친구 장례식도 못가보고, 지 친동생 같이 이뻐하던 아이 얼굴도 한번 못 보고.. 다음날 부산은 내려보냈는데, 그 다음에도 두어번 더 왔어요, 올때마다 그렇게 통곡을 하고, 부모하고 사이가 벌어져 가지고 집 나오겠다고, 우리 집에 살게 해달라고 난리를 치고.. 힘들었지, 애도 부모도, 구경만 하는 나도.."
진우도 식사를 시작한다. 어르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고1때면 진짜 힘들었겠네요. 나중에는 좀 진정 되구요?"
"잘 넘겼나봐요, 똑똑한 놈이니까... 언젠가 부모님이 한번 학교로 찾아왔어요. 석호 담임을 2년을 했어도 얼굴 한번 못 본 사람들이, 애가 와서 몇번 자고 가니까, 고맙다고 찾아왔더라고. 좀 나아졌습니까, 물었더니, 죽은 친구네가 미국으로 갔대요. 그러고 나니까 애도 좀 포기하고, 서울 생각 안하고 마음 잡는 것 같다고 그러시더라고... 천만다행이지. 그 나이 때는 애들이 많이 예민해요, 남자애들도..."
"그때 만나보시니까, 부모님들은 어떠셨어요? 뭐 특별히 기억나는 거라도.."
"좋은 분들이지, 많이 배우고, 교양있고, 차분하니.. 그러니까 애도 그렇게 잘 컸겠지..."
한마디 덧붙인다.
"몇번을 계속 물어보더라구요, 애가 우리집에서 실수 한 건 없는지, 말 실수 같은거요.. 혹시라도 홧김에, 아니면 충격이 너무 커서, 이상한 소리 한게 있어도, 진심이 아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라고, 몇번을 그러더라고. 하나도 없다 그랬지,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니까..."
10.5.4 사무실
점심으로 과자를 먹고 있는 지율. 리화가 다가와 서류 봉투를 내민다.
"선배님, 이거 .."
"다 보셨대요? 폐기해도 되요. 종결된거에요."
"일하다 저정도 다치면, 치료비는 제대로 나옵니까?
리화를 본다. 걱정 반, 호기심 반.. 마지막 한모금을 마시고 캔을 치운다.
"처음에 응급 치료비 정도는 나오는데, 이후는 자비에요. 액수 제한도 있고, 자기 과실인거 따지고..그러면 점점 줄어들죠. 소송해서 좀 더 받는 경우도 있고."
"화상은 눈에 보이니까 알았는데, 그 분이 그 분인줄은 몰랐습니다. 뉴스에서 본 것 같은데.."
"오래 되었죠, 저도 몰랐어요. 사건 파일 뒤져보니까 있어서.. 찬호씨 대단하죠?"
"멋집니다. 본인은 아프겠지만.."
"아직도 치료 중이에요,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요. 정신적으로도.. 친한 사이 아니고는 말도 잘 안해요."
"주말동안 같이 다녀보니까 아직 손으로 뭐 잡는 것도 힘들어하시더라구요. 특히 작은 거.. 핸드폰 잡는데 손등이 탁 터지면서 피가 나고.."
"예전에는 문 형사님이랑 당구도 치고 그랬다는데.. 그렇게 됬네요."
리화가 서류 봉투에서 자료를 다시 꺼내 든다. 자리로 돌아가며 한장한장, 꼼꼼히 읽는다.
/2년 전, 용산구 문배동
길게 늘어서 통행을 막는 경찰들. 경찰차와 방송국 차량까지 뒤엉켜 북새통이다. 여기저기 좋은 자리를 선점해 생방송 하려는 기자들, 소방차가 들어와야 하니 차를 치워달라는 고함 소리.. 아랑곳 하지않는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고, 저 높은 곳을 본다. 새로 분양한 아파트 8층 베란다에서 여자가 소리치고 있다.
"살려주세요! 아이가 있어요!"
돌아서서 베란다 문을 두드리는 여자, 그러나 안으로 잠긴 문은 열리지 않는다. 아래에 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주문을 한다... 꽉 잡아요, 조심해, 유리를 깨고 들어가, 기다려요, 소방차 와요... 누군가 볼멘 소리를 한다.
"경찰은 뭐하는 거야, 빨리 안 올라가고?"
"벌써 올라갔어요, 근데 다 잠겨 있어서 못들어가나봐요.."
여자의 남편, 그러니까 아이의 아빠가 자신의 아이를 인질로 경찰과 대치 중이다. 간신히 배란다로 탈출한 여자는 온 몸에 피를 흘리며 도움을 요청하지만, 오히려 안에서 문을 잠궈버린 남자가 아이를 안고, 여자를 협박한다.
"비켜요, 소방차 들어와요! 비켜주세요!"
인파를 비집고 간신히 접근하는 소방차. 사다리를 편다. 만약을 대비해 구조용 공기 안전매트도 설치한다. 5층용이라 불안하지만, 그래도 사망 사고는 막을 수 있을거다.
승강기가 올라간다. 찬호를 포함한 경찰 두명이 탑승했다. 여자를 먼저 내려보내고, 베란다를 통해 안으로 진입할 계획이다. 아이가 위험해 질 수도 있지만, 이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4층, 5층, 6층... 사다리를 올리는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경찰이 올라오는 걸 본 남자가 재빨리 베란다 문을 열고 여자를 낚아챘다.
7층, 8층... 베란다에 내려섰다. 블라인드를 닫아 집안이 보이지 않는다. 삼단봉을 꺼낸다. 유리를 깨고 안으로 들어선다. 남자가, 부상이 심해 보이는 여자를 무릎으로 눌러 올라타고 있다. 한 팔에는 서너살 가량의 아이를 안고, 목에 칼을 댔다. 눈물콧물 쏟으며 엄마를 부른다. 아직은 모두 살아있다 알리고 싶지만, 무전기 사용을 못하게 할거다. 아이부터 구하기로 한다.
"오지마, 가까이 오면 얘 먼저 보낼거야."
"아이는 저희한테 주세요. 원하시는게 뭡니까? 들어드릴께요."
"내려가.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 내려가라고."
"선생님, 진정하시고 아이를 주세요, 안전하게 대피시키겠습니다."
"니들이 뭔데? 내 새끼 내가 데리고 갈거야. 살고 싶으면 너희나 꺼져."
아이가 운다. 엄마, 아빠를 부른다. 여자가 운다, 그리고 남자도 운다..
"선생님, 아이부터 내려보내고, 저희랑 말씀 좀 하시죠, 부인께서도 병원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 쿵쿵쿵...
"문 여십시오! 강제 개방합니다!"
남자가 당황한다. 찬호가 침착하게 설명한다.
"곧 문이 열릴겁니다. 경찰이 들어와도,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걱정마시고, 차분하게, 아이부터 내려놓으세요. 저희에게 잘 협조하셨다고 보고 하겠습니다."
무릎 아래에 깔린 여자가 점점 힘을 잃어간다. 가슴 아래로 피가 새어나온다.
"선생님, 아내 분 부상이 심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응급처치를 해도 되겠습니까?"
그제야 아래를 내려다 보는 남자.. 드르르르... 드릴로 문을 따는 소리.. 남자가 무릎으로 물러나며 아이를 바닥에 내려 놓는다.
찬호가 천천히 다가가 여자의 상태를 살핀다. 아직 살아있다.. 동료 경찰이 아이를 안고 베란다로 향한다. 남자가 뒷걸음질을 치며 부엌 끝으로 물러난다. 찬호가 아이 앞을 막아서며 혹시 모를 일을 경계한다. 둘이 안전하게 사다리차에 오르는 걸 확인하고, 내려가라 손짓한다.
"같이 타. 금방 문 열릴 거니까 저쪽에 맡겨."
"여자를 죽일지도 모릅니다. 최대한 제가 막아보고, 확실히 제압되는 거 보고 함께 내려가겠습니다."
사다리차가 내려간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멀어진다. 자박자박 깨진 유리를 밟으며 다시 집안으로 들어선다. 드르르... 또한번의 드릴 소리...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휘발유.. 아까와는 다르게 휘발유 냄새가 난다. 쓰러져있는 여자에게 뛰어간다. 베란다로 데리고 나가야한다... 축 늘어진 여자를 어깨에 두른다. 여자의 몸에서 강한 휘발유 냄새가 난다... 화르르... 불길이 다가온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