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1 가평 - 원혼을 달래는 곳
누운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벌써 밖이 훤하다. 신기하게도 지율의 팔을 베고 있다. 이게 무슨... 분명히 자기전에 먼저 지율에게 팔베게를 해주었었는데.. 자는 동안 바뀌었다..? 지율이 눈을 뜬다.
"잘 잤어요? 이상하죠..? 분명히 내가 선배 팔베게 해줬었는데... 자고 나니까 내가 안겨있네.."
지율이 웃는다. 꼭 안고 있는 시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무나 해주면 어때요, 편하게 잤으면 됐지."
"팔 안아퍼요? 내가 안아 줄까요?"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는 시환이 다시 눈을 감으며 묻는다.
"아니요, 괜찮아요. 따뜻하고 편하고.. 더 자요."
팔을 뻗어 지율에게 감아 당긴다.
"진짜 잘 잔거 같은데, 아침이 너무 빨리 왔어요.. 해가 일찍 뜨나?"
"설마, 산 속인데요? 한참 된 거 아닐까요? 늦잠 잔것 같은데.."
그제서야 몸을 돌려 시간을 본다. 7시가 넘었다... 겨우, 세시간쯤 잤나보다.. 다시 이불을 잡아당기며 안긴다.
"일어나기 싫은데 자는 척 할까요?"
"서울 가야죠. 지문 찾고, 차 넘기고.."
"서울 가면 인제 우리집에서 와서 자요? 사무실에서 그러지 말고.. 불편하면 따로 자도 되요. 귀찮게 안 할께요. 원래 윗층이 자는데에요, 매트리스 좋은거 있어요. 선배는 허리도 아프니까.."
벌떡 고개를 들고 지율을 내려다 본다.
"허리 괜찮아요? 안 아퍼요?"
지율이 고개를 젓는다. 안심하는 시환. 지율의 팔을 접고, 대신 자기 두 팔에 지율을 꼭 안는다.
"원래 이렇게 해서 재워줄려 그랬는데... 멋있게.. 아, 난 왜 선배한테 하나도 안 멋있을까요."
"멋있어요."
"거짓말... 나도 알아요. 진우형이나 차형사님처럼, 그런 남자들 멋있잖아요. 차 형사님은 좀 어렵긴한데, 남자가 볼 때는 진짜 최고거든요. 진우형이야 뭐, 여자들이 많이 좋아할 것 같고.. 그죠?"
"시환씨는 왜, 뭐가 달라요? 그 사람들이랑?"
"다르죠, 나는.. 선배도 나한테 하는게 다르잖아요. 차 형사님이야 원낙 선배시니까 그렇다치고, 진우형은.. 선배한테 형은 남자 아니에요? 나는, 그냥.. 붙어다니는 동생..?"
"진우형이 나한테 남자면, 시환씨가 질투해야 되는 거 아닌가? 둘이 왜 아직도 친하지?"
"아직도 친하지?? 뭐야, 지금... 내가 혼자 좋아한다고 막, 일부러 그러는 거에요? 진우형이랑 나랑 싸우나 안 싸우나 볼라고?"
지율이 고개를 저으며 어깨로 파고든다.
"아니요, 진우형도 그냥, 차형사님처럼 선배에요. 나를 아주 마음 편하게 해주는, 좋은 선배... 시환씨도 아주 좋은 사람..."
꼭 안은 팔에 힘을 준다. 이마에 쪽쪽... 입을 맞춘다. 잠깐 지율의 반응을 본다.. 지율이 시환의 티셔츠를 잡아당겨 쪽... 티셔츠에 뽀뽀를 한다?
"뭐에요, 옷에다가..?"
지율이 장난스레 웃으며 일어나 앉는다. 시환의 셔츠를 입었다. 이불에서 나와 맨다리로 시환을 넘어간다. 옆에 벗어놓은 옷가지를 챙긴다. 시환이 등을 대고 돌아눕는다. 자기 옷으로 갈아입는 지율... 바지 입는 소리..
"안 일어나요? 할 일 많은데...?"
"더 잘거에요. 혼자 가요."
"먼저 한바퀴 둘러볼께, 금방 나와요?"
"몰라요, 삐졌어요.."
시환의 셔츠를 툭툭 털어 잘 접어놓고 나간다. 그제서야 돌아 눕는 시환... 닫힌 방문을 바라본다.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다. 안고 자도, 뽀뽀를 해도... 몇번쯤 솔직하게 키스까지는 했어도, 그때뿐이지 진전이 없다. 정말 아무 매력이 없는 건지, 너무 편하기만 한건지... 두 손바닥으로 뺨을 몇차례 두드리고 힘차게 일어난다. 정신 차리자.. 천천히, 조르지 말자..
혼자 나온 지율이 마당을 걷는다. 아침에 보니 정말 묘하게 생긴 집이다. 백년은 되었을까.. 오랜 한옥을 보수 한 것 같다. 지붕도 올렸고, 군데군데 나무 색이 다르다. 펌프에서 물을 받아 세수를 한다. 냉장고에서 꺼낸 양 차갑다... 거칠고 낮은, 허스키한 여자 목소리..
"수건도 없으면서 세수는 왜 하누?"
물이 뚝뚝 흐르는 채로 돌아본다. 대충 묶어 올린 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요란한 나비 장식을 꽂았다. 저렇게 빨간 한복 저고리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 오 경사의 가족일까.. 어정쩡하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누군지 알고 인사해? 모르는 사람은 조심해야지, 나처럼... 나는 너 조심하잖아."
"아, 예... 저는, 어제 오 경사님하고 같이 일하다가 너무 늦어서 저쪽 방에서.."
"알어, 새벽에 차 뒤지는 거 봤어. 뭐 좀 찾았어? 그딴거 백날 찾음 뭐해, 네 껏도 아닌데."
"예...??"
"수건도 없는 게 세수나 하고, 네 것도 아닌데 죽어라 찾고... 그만 잊어. 소용없어."
"무슨 말씀이신지..?"
"헛짓거리 하지 말라고. 정작 너한테 필요한거는 아무데도 없다고.. 아유, 이제 좀 그만 보내줘라. 잡힌 놈도 힘들고, 늘어지는 너도 점점 눈뜨고 못 볼 꼴인데.."
"어머니!"
오 경사가 다가 온다. 지율에게 수건을 내민다.
"죄송합니다, 방 앞에 미리 챙겨 놓는 다는게.. 저희 어머니세요."
"예, 그러신 것 같았어요.."
"추운데 들어가요, 아침 드세요."
"얼른 들어가 주는 밥 먹어. 먹고가야 때깔이라도 곱지. 속이 썩어 고약한 걸, 밥만 처먹으면 또 뭐해.."
여자가 휑하니 빠른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집 밖으로 나가버린다.
"가시는 거에요? 혹시 저 때문에 같이 안드시고.."
"아니에요, 신경쓰지 마세요. 원래 사람들하고 같이 식사 안 하세요. 따로 드시는 데가 있어요."
"일어나셨습니까?"
시환이 나온다. 오 경사가 인사하며 큰 방을 가르킨다.
"저쪽으로 들어가세요, 아침 차려놨습니다... 근데, 방이 좀.. 놀라지 마세요. 조금 정신이 없습니다.."
오 경사를 따라 들어간 큰 방 한 가운데에 상이 차려져 있다. 방석 네개, 수저 네개...
"수저가 하나 더 있어요, 누구 또 계세요?"
"그... 이방에 계신 분이요.. 저쪽에.."
방을 둘러본다. 온통 다 붉은 색이다. 기다란 흰 천이 방바닥 가득 늘어져있다. 상형문자같이 생긴 괴기한 글씨들이 붙어있고, 금띠를 두른 족자가 내려다 본다. 족자에 그려져 있는, 옛스러운 한복을 입은 젊은 남자..
"저 분이요? 누구신데요?"
지율이 자리에 앉는다. 배가 고프다... 당황한 시환은 앉아야할지 서야할지도 모르겠다..
"경위님도 앉으세요, 뭐 특별한거 안 하셔도 되요, 그냥 이 방이... 손님들 오시면 같이 식사하시는 데에요."
오 경사가 함께 앉는다. 지율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미소 짓는다.
"강 경위님은 아무것도 안 물어보시네요? 이 방 안 이상하세요?"
"무속인이신가보죠, 어머님이.. 아까도 저한테 몇 마디하시던데.. 근데 저 족자는, 제가 잘 모르는 분인 것 같아요.."
"선조 대왕 손자에요, 낭선군 이우... 저희 어머니가 모시는 분입니다."
"왕손을 모시는 무당도 있어요? 아니, 무당이 왕손도 모셔요?"
"본인이 무당이라고 생각 안하세요. 그냥 평생을 그분을 위해 사는, 뭔가 특별한 존재세요. 전생에 어떤 연이 있었다고 믿으시니까요. 어제 그 차를 세워둔 거기가, 그분하고 둘이 계시는 신당이에요. 아무나 못 들어가요, 그래서 거기다 놔둔거에요. 여기는, 오가는 손님 접대 하는 곳이고.. 뭐, 좀 복잡합니다."
"모시는 귀신이야 다 다르겠지만, 저분인 이유가 있나요? 아니, 그냥 저분이 먼저 내리셨나? 내려오셨나?"
오 경사가 웃는다. 시환은 눈치만 볼 뿐, 한마디도 못하고 있다.
"여기 가평이, 귀가 굉장히 센 곳입니다. 귀신이요... 신기가 넘쳐나요, 모르셨죠? 낭선군께서는 1600년대 실존하셨던 왕손이자, 예술인이신데, 글씨에 특히 능하셔서 교본집도 있으시고, 저 글씨들은 그분의 필체를 어머니가 따라 쓰신건데, 비교해보면 정말 똑같아요. 드시면서 들으세요, 재미있는 얘기 해드릴께요."
둘이 식사를 시작하자, 오 경사가 남은 한 자리 - 낭선군 자리의 밥그릇에 수저를 올리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여기 가평에, 병자호란 끝나고나서, 숙종이 지정했다는 조종암이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어요. 전쟁 끝났다, 고맙고 고생했다, 치욕을 잊지마라, 뭐 그런건데, 거기에 낭선군이 글씨를 남겼거든요. 믿거나 말거나, 어머니가 아주 어렸을때 부터 자꾸 집을 나가서.. 찾아보면 그 바위 밑에 가있고, 또 없어져서 가보면 또 그 밑에 가있고, 계속 그러셨대요. 그렇게 태어나서부터 평생 저분만 보고 사시는 거래요."
낭선군의 수저를 국으로 옮긴다.
"가평이 그냥 노는데 같죠? 사실 여기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이상한 기운이 센 땅이에요. 왜 모든 사이비들이 다 여기서 시작하겠어요? 풍수상으로도, 하늘과 땅이 모이고, 높지 않은 산맥이 강과 함께 흘러 사람의 기를 열어 올린다.. 무병장수 입신양명하는 곳... 거기가 여기에요. 원래 고구려 땅이었는데 신라에 이걸 넘겨주면서부터 고구려가 쇠약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후에, 신라 법흥왕때 인도에서 처음으로 승려가 들어왔는데, 현등사라고, 한국 최초의 절을 지어서 부처를 모신 곳도 가평이구요."
시환이 놀란다.
"그래요? 저는, 전혀.. 처음 듣는 얘기에요."
"나중에 궁예가 폭정을 할 때, 자기 부인과 아이들을 귀양보내요. 그게 또 가평이에요. 동자소라고 요 위에, 그 아들들이 놀던 숲이 있어요. 훗날에 세조와 정희황후도 이곳 가평에 와서 묻히죠. 다른것도 아니고, 왕능을 아무데나 짓지 않아요. 숙종의 그 암벽바위에도, 후대에 수많은 왕들이 내려와서 재를 올려요. 왕이 종교적 행위를 하는 그런 성스런 곳이 여기인거에요. 우스개소리지만, 왜, 천민의 왕이었다는 임꺽정도 요 아랫 동네 사람이에요. 그런 기를 타고 난 거죠."
"정말 그래서 여기 사이비 종교가 많나요?"
"말도 못해요. 유명한게 신천지랑 통일교인거지, 엄청 많아요.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백백교라고, 거기도 가평이구요, 새일 여호와, 새일 중앙, 새일 산학연구, 다 여기있는데 전부 이단이고, 얼마전에 살인 사건 난 거룩한 무리, 불로장생 약수 파는 천공교, 승천사... 여기저기 알짜 사업은 다 가지고 있는 에덴 성회... 일일히 이름 대기도 힘들어요."
지율앞으로 찬을 옮겨준다.
"여기 경찰은, 변사체 하나 나오면 어느 종교인지 그거부터 파악해야 할 정도에요. 워낙 자기들끼리 모여사는데다가 폐쇄적이고 배타적이고.. 이 동네에서는 종교 얘기 함부로 못해요. 저희 어머니처럼 무속 신앙도 규모가 엄청 나구요. 여기가 왜 사룡리 인줄 아세요? 강물 굽어진 게, 용이 승천하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동쪽으로 통일교, 서쪽으로 신천지를 끼고, 요 북쪽 산등성이는 귀목봉이라고, 지금까지도 귀신이 나온다는 동네에요."
"귀목봉은 어디서 들은 거 같은데, 그게 여기였어요?"
"예, 바로 요 뒷산이에요.. 거기서 흐르는 물이 이 동네에 와서 용이 되어 올라가요. 신기 들린 사람들은 그래요, 병자호란에 죽은 사람들이 환생해서 6.25 때 다시 죽어요. 어떤 시기가 되면 수백명이 땅속에서 우르르 불러대는 소리가 들려와요. 그러면 이곳 무속인들이 모여 제를 올리죠. 병자호란의 직접적인 피해자였고, 또 그에 대항한 유일한 왕이기도 했던 효종을 달래기 위한 거에요. 안믿으시겠지만, 그러고 나면 한동안은 또 잠잠해지구요.."
식사 후 차를 세워 두었던 오 경사 어머니의 신당으로 올라간다. 제법 쌀쌀해진 이른 아침, 새까만 아우디에 허얗게 성에가 끼었다. 차 표면에 뭐라도 남은 거 없나 살펴보는 시환..
"선배, 이거 혹시...?"
시환이 운전석 문 아래쪽에 끼어있는 머리카락을 하나 집어낸다. 아주 밝은, 노랑에 가까운 여자 머리카락...
"미키씨 머리 색이랑 비슷한데요? 모근 남았어요?"
"예, 바로 뽑은 것 처럼 멀쩡해요. 소화기 분말도 안 묻었구요. 이 문을 몇번이고 열고 닫았을텐데, 어떻게 안 떨어지고 여지껏 남았을까요.. 운전자 신발에 달라 붙었다가 차 안으로 옮겨 들어갔겠죠? 문 열고 닫는 그 틈에 떨어지면서 소화기도 피하고.."
"그러고 여지껏 가만히 있다가 하필 여기서, 무당집에서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지금?"
"그러니까 여기가... 신기, 귀신기.. 센 동네 맞네요.."
8.4.2 사무실
아침 뉴스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간 종태 앞에 어린 아이를 안고 출근한 정아. 안그래도 기분이 좋은 종태가 반겨준다. 아이도 활짝 웃으며 덥썩 안긴다.
"걱정 말고 병원가서 애기 엄마 만나고 와. 내가 왕년에, 우리 형님 애기들 다 업어 키웠어. 짜식들이 지금은 어디가서 뭐 하고 있는지 연락도 없지만.."
"가정폭력 전담팀 연락해 보셨어요? 그쪽이 임시 숙소 더 빨리 해 줄건데.."
"네가 잘 알잖아, 갔다와서 해. 여기저기 할 수 있는 거 다 알아봐. 수술하고 하루 있다가 퇴원해야된다는데, 아무리 그 놈 없어도 그 집에 다시 들어가고 싶겠냐?"
아이에게서 눈도 떼지 않는 종태. 벙글벙글 웃는 눈가에 잔주름이 가득하다. 낯설다..
"애기 너무 좋아하시네요.."
"늙으면 그런거야. 요새는 그냥 지나가는 애도 이뻐... 넌, 니 애라 이쁘냐?"
대답없이 미소만 짓는다. 슬쩍 쳐다보는 종태.
"은석이랑은? 다시 안 만나?"
"정말 그 사람 아니에요. 다시 못 만나요."
"누구 아이가 뭐 어때... 니들이 좋으면 되는 거지."
"아니에요. 그냥 이게 다에요."
"... 너 미워. 알지?"
"... 예.."
"나는, 너 무지 밉다고.. 너 그때, 그렇게 은석이 버리고..."
"... 알아요, 죄송해요."
"나는 너 정말 싫은데, 은석이는 아니라고.. 아직도 너 안 미워하는 것 같다고, 그 멍청한 놈이."
".... 다녀오겠습니다. 이모님이 8시까지 와서 애기 데려가신다고 했어요. 그때까지만.."
"너도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종태가 살짝 언성을 높힌다.
"은석이 정신 차릴때까지만! 너 그때처럼 꼭 못됬게 굴어라. 받아줄거 아니면 확실하게 짜르고 가. 너 못된거 아주 잘하잖아."
말없이 나간다. 종태가 아이를 안고 사무실을 걸어다닌다. 둥가둥가 가벼운 발걸음...
"야아, 누구 애인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이쁘냐. 니가 은석이 아들이었으면 내가 진짜.. 오늘 휴가냈다, 응? 고놈 참..."
8.4.3 이태원 24시 식당
차량까지 인계하고 점심 다 지나서 서울에 도착한 두 사람. 점심 겸 저녁 한 끼 먹으러 24시로 들어온다. 직원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뛰어간다.
"언니, 그 여자 형사님 왔어, 지난번에 노래방에서 그놈 자식들 다 잡아들였다는..."
사장이 빼꼼 내다본다.
"오랜만이네, 어디 출장갔다가 오나, 왜저렇게 반쪽이 됬어?
"원래 반쪽이지, 언제는 한쪽이었냐?"
"미운 얼굴은 아닌대, 젊을때 좀 꾸미지 않고.."
"어이구? 아니 형사가 범인 잘 잡으면 됬지, 무슨 소리야?"
사장이 발끈한다.
"그게 아니라, 꾸미면 이쁘겠다, 칭찬이야. 젊고 잘생긴 형사님들이 얼마나 많어? 잘 해보라 그거지, 뭘 화를 내..?"
사장이 앞치마를 고쳐 매며 안으로 들어간다.
전에 왔을때 처럼, 물냉면과 사이다를 시키는 두 사람...
"위로 쌓지 말고요, 옆으로 펴주세요.. 면도 그냥 납작하게.. 고기 안 넣고, 야채만요.."
"시환씨, 저 괜찮아요, 다 먹을 수 있어요."
"안돼요, 힘든 거 억지로 참지 말아요. 할수 있는거 만큼만 해요. 어제처럼 참다가 토하지 말고.."
"그러게요, 어제는 왜 그랬대요.."
"그러니까요, 분명히 내가 팔베게를 해줬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왜 그랬대요.."
지율이 웃는다.
"뭘 그렇게 신경을 써요? 내가 해 줄수도 있는거지?"
"어제 처음이었잖아요, 선배 맨날 나한테 등 돌리고 자는데, 어제는 처음으로 내 팔 베고, 내 쪽 보면서 잠들었단 말이에요.."
"그래요? 내가 맨날 등 돌리고 잤나..?"
"예, 여지껏 다요.. 진우형하고는 꼭 안고 자면서.."
"응? 제가요? 언제? 바다 갔을때?"
"아, 맞다... 둘이 호텔도 갔었지.. 거기서도 그랬어요? 강진우, 이 인간 진짜... 나는 병원에서 잔거 얘기한건데, 하나 더있었네.."
"우와... 누가, 우리 얘기하는 거 들으면... 나 되게 이상한 여자 되는거죠?"
"작전이에요, 혼사길 막을라고... 시집 못가게 할라구."
"고의로 악성 루머 퍼뜨리면 최소한 벌금형이나 1년 이하의 징역이에요."
"합의 볼께요. 평생 모시고 살테니까 용서해주세요."
"오호, 조건 좋은데요?"
"그죠? 아.. 아니다, 내가 또 너무 저자세로 갔어. 내가 자꾸 이러니까 남자답게 안 보이는 거죠?"
"왜요, 시환씨 남자다워요. 난 그런게 좋은데... 왜 자꾸 어깨 힘줄려 그래요? 진짜로 차형사님처럼 되고 싶어요?"
"그만큼 멋있으면 좋잖아요. 난 맨날 착하다, 귀엽다 이런 말만 들어서요.."
"자랑 같애요."
"쪼끔."
"거기다 남자다움까지?"
"반칙이죠?"
"응... 그냥 류시환다움.. 그거면 되요. 여자를 얼마나 꼬시고 다닐려고, 자꾸 더 멋있고 싶어요?"
"딴 여자 말고... 선배가 안 넘어오잖아요. 아까도 나는 더 안고 있고 싶은데 홀랑 가버리고.."
"일 해야죠, 출근!!"
"뽀뽀도 하고 싶었는데.."
"어? 너네도 늦었네?"
식당 문이 열리며 진우와 민규가 들어온다. 자연스레 와서 앉는 두 사람. 시환이 입을 닫는다.
"왜? 비밀 얘기했어? 자리 비켜줄까?"
시환에게 어깨 동무하며 놀린다. 귀찮은 시환, 팔을 치우며 수저를 꺼내준다.
"비밀이 어딨어, 맨날 똑같은 얘기지."
"사랑 고백했구나? 지율이 너는 시환이 또 차고?"
"아, 뭐래? 형 절루 가!"
민규가 멋쩍게 웃는다.
"배고파! 밥 먹고 갈거야... 너네 뭐 시켰냐? 우리 더 시켜야돼?"
"당연하지, 우리 냉면 두개 시켰는..??"
아주머니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온다. 사장님이 그릇을 챙겨서 뒤따라 온다.
테이블만한 쟁반에 온갖 야채가 다 나왔다. 가지런히 채를 썰어 바닥에 얇게 쫘르르 돌려 깔았다. 가운데 볼록한 그릇에는 소면, 냉면, 모밀국수, 묵, 계란 지단이 각각 담겨있고, 세가지 양념이 종류별로 따로따로 들어있다. 어림잡아도 대여섯명이 먹을 양이다.
"이거 쟁반 국수, 냉면.. 이에요? 저희 그냥 물냉면 두개 시켰어요."
"그렇게 먹고 무슨 일을 해요? 취향대로 골라서 먹고, 공기밥 더 줄께 나중에 싹싹 비벼요. 계란 후라이는 어떻게, 지금 해 줄까요?"
"아닙니다, 없어도 됩니다. 잘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넉살좋은 진우가 먼저 덤빈다. 커다란 냉면 그릇에 면을 담고 야채를 올린다.
"우리 예쁜 형사님은, 이렇게 하면 좀 먹을 수 있어요? 아니 자꾸, 저 분이.. 다 보이게 쫙 펴달라 그래서.."
사장이 지율에게 묻는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간신히 끄덕거린다.
"그럼 많이들 먹어요, 그렇게 온종일 고생인데 밥이라도 잘 먹어야지.."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다가 서둘러 주방으로 가버리는 사장님.. 서빙하는 아주머니가 사이다 두개를 내려놓으며 웃는다.
"아이그, 그렇게 매일 오나 안오나 기다리더니, 이렇게 한 상 차려 줄라고 그런 거였어? 왜, 전에 형사님들이 이집 아들 도와줬잖아요, 노래방에서.. 그 날, 그 다음 날까지, 언니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 그거요... 제가 좀 더 일찍 봤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시환이 사과한다.
"아이구, 무슨 말씀을...! 큰일 생기기전에 딱 맞춰서 잘 잡았어요. 그게 지들끼리는 장난이었다가 점저 심해져서 그렇게 됬다는데, 아유, 나도 자식 키우는데 아주 그냥 손이 덜덜 떨리더라니까요. 고맙습니다, 맛있게들 드세요. 이거 다 드시고, 디저트 더 먹고 가요. 디저트는 내가 쏜다."
"아닙니다, 진짜 이거면 충분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시환이 지율의 사이다를 따주는 사이, 시환의 사이다를 가져다 따는 진우... 뺏으려는 시환, 투닥거리는 두 사람.. 시환에게 전화가 온다..
"빨리 전화나 받어."
"다 먹지마, 남겨!... 예, 여보세요? 예, 수고하십니다..."
가평 경찰서다. 중간 보고차 전화 한 것 같다.
"국과수 보내셨어요? 감사합니다. 이삼일이면 나오겠죠? ... 용의자는 출석 했습니까..? 내일이요.. 영장 신청 안 하십니까? 가택 가야 구두도 찾을 것 같은데.. 압구정 갤러리 매장에 전화 온 적 있대요, 구두에 오물 묻었다고, 세탁 서비스되냐고.."
더이상 안 듣고 조용히 일어나 나가는 지율. 못마땅한 얼굴로 수저를 내려놓는 진우. 기분이 안좋다.
".. 예... 그리고 카드사에서 연락 온거요, 10시 55분에 술집 16만원 이니까 음주 정황 맞구요, CCTV확인해서 어느정도 취했는지... 예, 아이스 캐슬이래요, 상호가.. 그리고, 11시 22분에 헤븐 모텔 9만원 결제했는데, 동행한 여자분이 기억이 없다고요?.... 뭐 3일이나 지났으니 약물 반응 안 나오죠.. 여자를 두고 나온 건 확실한거죠... 예... 조금 가다가서 불법 유턴해서 돌아오잖아요, 미키씨를 쫒으러... 살해나 최소한 상해의 의도가 있었다고 봐야죠.. 예... 감사합니다, 뭐 더 나오면 알려주세요, 수고하세요.."
"뭐래?"
시환에게 묻는다.
"어, 그 자리.. 소량인데 사람 혈흔하고 몇 가지 좀 찾았다고.. 대조해 본대.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로 늑막을 찔렀는데, 계속 못일어나고 엎드려 있었나봐. 호흡 곤란이겠지."
"살아있었다는 말이네?"
"그랬을거야, 오늘내일 부검해봐야돼... 선배는 어디갔어?"
"니 선배님은, 지 일 딱 끝나면 관심없더라 ? 전에도 바닷가 갔을때, 째끄만 애기 시신 지가 건져서 범인 잡아놓고는, 그쪽에서 결과 보고한다고 전화하니까 그냥 똥밟은 거래. 자기는 그런거 일일히 기억 안한다고.. 아유, 어떨 때 보면 정말 왕싸가지야.."
진우가 국수 한 젓가락을 집는다. 시환이 짜증을 낸다.
"형은 그걸... 정말 이해 못하냐? 선배는 속상하니까 그러는 거지. 피해자를 다 담아두면, 맨정신으로 어떻게 살아? 거기다가 그런 쪼꼬만 애기는... 여자들은 우리하고 또 다르잖아. 앞에서 아무리 강한척 해도, 옛날일도 있고 가끔 진짜 힘든 것도 있을거 아냐. 안그래도 어제 그러더라. 잊어버리는 게, 자기는 생존하는 방법이라고.. 그래야 살 수 있다고... 아유, 강진우 쫌팽이.. 맨날 나한테 뭐라 그러면서, 그걸 못 알아듣냐?"
지율을 찾으러 나간다. 젓가락을 내려놓는 진우... 같이 성질이다.
"그래, 잘났다, 천생 연분이다! 둘이 잘 해봐!"
그릇에 담아놓은 국수를 본다. 빨간 양념을 쳐다도 못 보던 지율이.. 12살 송유리. 사건 기록이 떠오른다. 하루 아침에 번복된 증언, 몽땅 다 사라진 기억... 무엇 때문에?
'살기위해 잊는다... 그래서 어릴 적 일도 다 잊었나? 살려고? 송유리.. 니 기억 속 송창률은 어떤 사람이냐.. 그리고 이석호는...? 네 어린 시절, 도데체 언제, 어디에, 어떻게 등장하는 인물이야...?'
8.4.5 사무실
외근 나갔다 들어오는 정아. 종태는 없고 은석이 아이와 놀아주고 있다.
"뭐하는 거야?"
"형님 잠깐 숙직실 가셨어. 어제 밤 꼬박 새우셔서 잠깐 주무신다고.."
"이모님 안 오셨어? 그럴리 없는데.."
전화를 걸려하자 은석이 말린다.
"하지마, 택시비 드리고 오늘 쉬시라 그랬어. 내가 놀아줄려고."
"미쳤어? 일 안해?"
"비번이야. 있다가 저녁에 출동 있어서 지금 쉬어."'
"그럼 쉬어, 애 이리 주고."
"왜 그래 잘 노는데? 봐, 좀 있으면 피곤해서 잘거야. 야, 너는 혼자 이거 맨날 어떻게 하냐. 애도 꽤 무겁겠네.. 몇살이지?"
"이리 줘, 내가 반차쓰고 집에 갈거야."
"내가 비번이라고. 너 퇴근할때까지 내가 안고 있을거니까 일 마치고, 데리고 퇴근해."
"허리 아프다며? 그냥 숙직실 가서 자!"
"내비둬, 잔다고 낫냐?"
"그러길래, 그때 치료 제대로 받으라니까.. 다 망가뜨렸지?"
"치료 받을 시간이 있었나? 범인 쫒아야지, 여자 잡아야지, 부모랑 싸워야지.."
"약 챙겨먹어. 골골거리는 거 보기 싫어."
"너나 잘 먹고 댕겨. 애 엄마가 다이어트 한다고 굶지말고."
"누가 다이어트 한다고.. 게을러서 대충 먹는 거지.."
"친구하자."
"...?"
"나랑 친구하자고. 나도 누구 삼촌되고 싶어."
"미쳤어."
"애 엄마가 되가지고, 말 좀 이쁘게 해라. 애가 다 듣고 배우는 거야."
"세상에 말 이쁘게 하는 경찰이 어딨냐?"
"하나 있었어. 너 처음 들어왔을때... 네가 제일 예쁘게 말 했었어. 와, 진짜 옛날이네."
"문 형사님이 그러시더라. 오빠 다시 만날거 아니면 못됬게 굴라고."
"한번 속았으면 됬지, 또 속을까봐?"
"어떻게 하고 살길래 아직도 그런 소리를 들어?"
"너한테 딴마음 없어. 심심해서 그래. 다시 친구 하자, 옛날처럼... 친구들은 결혼해도 계속 친구잖아."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였어?"
"그럼, 애인 할래?"
"... 차은석, 정신 나갔어."
"아냐, 나갔던 정신이 이제 돌아온 거 같애."
"아까는 딴 마음 없다며?"
"그래, 없어. 딴 마음은 없고, 그전하고 똑같은, 그 마음만 있어. 네가 자꾸 눈 앞에서 알짱거리니까 생각났어. 정말 많이 좋아했던거... 화가 나서 잊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얼굴 보니까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나랑 살자. 다시 들어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