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1 조사실
종태가 뛰어들어온다.
"찾았다고?"
"저 사람 맞죠? 36살 이한주, 음반 사업 한답니다. 자기가 직접 보컬 트레이닝도 하고, 개인 연습실을 운영하는데 녹음실도 가지고 있습니다."
"연예인 사업이야? 아이돌 같은거?"
"예. 지금 트레이닝 중인 애들이 몇명 있습니다. 피해자가 예뻐서 정식으로 데뷔시킬려고 접근했답니다..."
단정한 머리에 유독 번쩍거리는 반지와 목걸이를 한 남자... 은석이 묻는다.
"그럼, 이분하고 만나면서 돈을 주거나 고가의 선물을 한적은 없다, 이거에요?"
"이반나가 어리고 학생이니까, 밥값 정도는 제가 냈습니다. 선물도 그냥 악세사리 같은거.. 아는 분 소개로 만났고, 제가 무슨 일 하는지 아니까, 금방 호감도 생겼구요. 돈 거래는 없었습니다"
"주로 어디에서 만났어요?"
"제가 혼자 살아서, 몇번 데려간 적 있었고, 주로 시내에서 쇼핑하거나, 이반나네 집에도 가구요. 제 연습실하고 가까워요. 바로 강건너에요."
CCTV 영상을 보여준다. 골목에 차를 세워놓고 둘이 내린다. 가벼운 차림에 쇼핑백 몇개를 들고 지나간다.
"본인 맞으시죠?"
"예, 지난 달 같은데요? 계절 바뀌느라 쌀쌀한것 같아서 가디건 하나랑 앵클 부츠 사줬어요. 비싼거 아니에요, 그냥 백화점에 다 있는 거.. 그렇게 사치한 애 아니거든요."
귀 기울여 듣던 종태, 가벼운 한숨을 쉰다.. 이놈은 아니다.. 은석이 사진 몇장을 꺼낸다. 염상원의 카메라와 골목 CCTV에서 따왔다.
"이 사진들은요? 낮이고 밤이고, 자주 오셨네요?"
"제가 하는 일이, 출퇴근이 정해진 게 아니라서요. 이반나도 수업 없고 알바 안갈때는 저랑 있는 거 좋아했구요."
"무슨 알바요?"
"모델이에요. 아직 초보라서, 유명한 건 없는데, 나레이터 모델 있잖아요, 그런거 부터 잡다하게 다 했어요. 비싼 건 외제차 전시장 같은거, 싼거는 뭐 화장품 가게.."
"클럽 일은요?"
"거기도 가야죠. 돈 벌어야하니까.. 유학생이잖아요. 지방에 공연 간다고 며칠 있다 오기도 하고 그랬어요."
"어떤 공연인지 아세요?"
"모델들 몇명 같이 가서 춤추고 노래하고, 그런 거요. 예뻐서 꽤 자주 있었어요."
"술집 도우미?"
"아뇨, 그런거는.. 뭐, 그런 거 일수도 있는데, 자세히 안 물어봤어요. 사생활이니까.."
한주가 묻는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이반나가 무슨 문제라도..? 아니면 제가, 문제인가요..?"
은석이 물끄러미 본다. 정말 모르는 걸까... 발가벗은 사진 하나를 툭.. 던진다.
"이런 일 하는 거 알았어요?"
남자의 얼굴이 굳는다. 은석 앞에 쌓인 다른 여러장의 사진들을 본다. 편안히 보도록 밀어준다. 한장한장... 사진을 넘긴다. 끝까지 못 보고 내려놓는다..
"뭘로 걸린 겁니까? 매춘? ... 마약은 설마 아니겠죠...? 제가 그런거 하지 말라 그랬거든요, 돈 떨어지면 제 아파트로 들어오라고.. 근데 학교 앞이라서 편하다고 거기가 좋다 그러라구요... 그럼 지금 구속 중 입니까? 어쩐지 며칠 전화도 안되고.. 외국인이니까 추방이겠죠? 감방 안가는거죠?"
사진 하나를 내민다. 둘이 다정하게 찍은 커플 사진.. 이반나가 죽던 날, 방에 놓여있던 액자를 다시 사진으로 찍었다. 유일하게 피 한방울 튀지 않았던 그 액자다.
"이 사진 기억나요? 언제에요?"
"얼마 안됬어요. 한 2주? 저도 있는데..."
한주가 지갑을 열어 똑같은 사진을 보여준다. 슬그머니 미소가 흐른다.
"액자에 넣었네요? 책상에 갖다 놨어요? 사실은, 저 나이 많다고, 띠동갑 넘거든요.. 친구들한테 소개도 안 시키고 그런다고 좀 섭섭해했더니, 이 날 학교로 오라 그러더라구요. 도서관 앞에 잔디밭이에요. 이날부터 매일 이 사진 가지고 다닐거라고, 저한테도 한장 해줘서 넣고 다녔어요. 잘 나왔죠?"
다른 사진을 내민다. 그날 시환이 찍은, 핏방울 뿌려진 탁자 위에 올려진 개끗한 새 액자.. 현장 사진이다. 이반나 독사진만 있는 4개의 다른 액자들에서 주르륵... 피가 흐른다.. 배경에 보이는 벽지에도 역시나, 무지개처럼 사선으로, 약간의 곡선으로 피가 튀었다..
"여기에 놔뒀더라구요, 이 액자를. 이반나씨 침대 옆에 있는 작은 탁자요..아시죠?"
".... 이거, 피.. 에요...? 다쳤어요? .. 혹시 .. 죽었..??"
너무 놀라 사진에 손도 못대고 바라만 보는 한주. 은석이 종태 쪽을 본다... 이 놈은 아닌것 같다.. 이미 포기한 얼굴의 종태가 A4 지 3장에 가득한 리스트를 훑는다... 이한주... 볼펜으로 찌이익... 그어버린다... 이놈은 아닌 놈...
"살해당했습니다. 수요일 새벽에."
놀란 한주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인다. 수요일, 수요일... 수요일만 몇번 반복한다.
"저랑 만났었었요, 화요일 저녁에.. 같이 밥 먹고, 자몽 주스하나 사주고 ... 알바 있다고 일찍 갔어요, 한 9시쯤 내려준 것 같은데.. 저도 그날 밤에 수업이 있어서 시간은 확실해요.."
은석이 메모한다. 화요일 밤 노래 연습... 마지막으로 알리바이 정도는 확인해봐야겠다. 그걸 제외하면 다른 건 일치한다. 이미 확보해 놓은 이반카의 흔적... 화요일 저녁 대로변 CCTV에서 그의 승용차에서 내린 시간은 9시 7분이었다. 8분 후에 집으로 들어갔고,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한주가 커플 사진을 본다. 은석이 시계를 본다.. 잠깐만 시간을 좀 줘도 될 것 같다.
"결혼 사진은 고궁 가서 찍자고 그랬었는데.. 한복 입으면 거기가 사진 제일 잘 나온다고.."
"그 아가씨가 한복 좋아해요?"
"입은 건 한번도 못 봤어요, 근데 그 사진 찍어주신 분이 그러시더라구요. 이반카 한복 사진 많다고.."
경직되는 종태와 은석.. 재빨리 묻는다.
"사진 찍어주신 분이 누구에요?"
"아래층 사는데, 사진을 좋아한대요. 프로필 사진도 공짜로 찍어주셨다고..."
"이 사진, 그 사람이 찍은 거에요?"
커플 사진을 가르킨다.
"예. 제가 갔을때, 먼저 찍고 계셨어요. 모델 에이전시에도 보내고, 오디션에도 넣고 그런다구요. 그분이 옆에 앉으라 그래서 .. 그날 여러장 .."
종태가 튀어 나간다. 은석도 한주를 놔둔채 총알같이 밖으로 뛴다. 전화를 건다..
"용산구 신창동 다세대 주택, 러시아 여대생 살인 사건, 용의자 가택으로 긴급 체포 갑니다. 범인은 아래층 거주, 38세 남자 염상원..."
"출동합니다. 오바."
부아아앙... 급하게 출발한다. 사이렌을 켠다. 종태가 뒤를 돌아본다. 경찰차 하나가 바로 따라 나섰다.
"개자식... 모르는 사람이라고 잡아 떼더니.."
"알리바이는 어떻게 된걸까요? 출근 카드랑 영상이랑 다 확인 했는데.."
"다시 뒤져봐야지, 누구 데려다가 대타라도 썼던지..."
"대타... 한명 더 있죠, 그 집에."
은석이 입을 꼭 다문다... 속력을 올린다. 종태가 다시 핸드폰을 꺼낸다.
"신창동 다세대 살인 용의자 추가합니다, 남자 38세 염상원, 그리고 함께 거주하는 어머니, 현재 위치 어디인지 확인 바랍니다. 두 사람 다, 보이는 즉시 신병 확보합니다."
사거리를 지난다. 우측에서 경찰차 한대가 더 합류한다. 민규에게 전화한다.
"진우는? 같이 있냐?"
"잠깐 외근 중입니다, 그쪽으로 바로 가실겁니다."
"민규야, 너는 여기 말고, 그 놈 일하는데로 가서 어머니가 가끔 대타 나오는지 확인해. 어머니 출입증이 따로 있는지 알아보고, 거기서 일하는거 본 적 있나 목격자 확보해. 특히 그 날, 둘 중에 누구였는지 알아내. 새벽 시장 배달도, CCTV 남았을거야. 다시 돌려봐."
"알겠습니다. 차 돌리겠습니다."
"그래, 별일 없으면 진우 돌려 보낼께. 일단은 너 먼저 가라."
8.5.2 경찰서
사진을 보고있는 기자들. 사진 속 여자는 침대 위에 누워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고, 옆에 올라앉은 어린 아이가 강아지 인형 두개를 안고 활짝 웃는다. 제복을 입고 선 이석호...
기자단 앞에 선 직원이 설명한다.
"피해자와 아이, 두 사람은 아직 보호 차원에서, 저희가 모자이크 처리를 했습니다. 병원 이름도 나오지 않게 살짝 신경 썼구요. 조금 전에 말씀 드린대로, 두 차례에 걸친 유전자 감식에서, 정 씨가 아버지인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더이상 질문 없으시면, 이만 마치겠습니다."
"경감님은 아직 안 오셨습니까? 그리고, 이번 일에 큰 역할을 하신 강 모 경위는 언제쯤 인터뷰가 가능합니까?"
"경감님은 다른 회의 중이시구요, 강 경위는, 현재 진행 중인 사건도 많고, 앞으로도 계속 현장에서 뛰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본인이, 얼굴이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정씨가 정식 재판을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언제쯤으로 보십니까?"
"지금 나눠드린대로, 이게 오늘 아침 사진입니다. 피해자 분이 지금 수술 중 이니까, 경과 보고, 저희도 마무리 조사를 좀 더 보강 한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자, 죄송하지만, 더 궁금하신거 있으면 전화나 이매일로 문의해 주십시오.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전히 웅성거리는 기자들에게 인사하며 방을 나선다. 복도 저편에 모여 구경하는 사람들.
"서장님 언론 잘 써먹네. 이석호 포상이라도 주나?"
"포상은 강진우가 받아야지, 왜 이석호야? 일은 진우가 다 했잖아."
"뭐 하나는 던져 주겠지. 그래도 실속은 이 팀장이 챙길거고.. 그럴려고 쇼하는 거지 뭐."
"잘들 논다. 저거보다 큰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거는 뭐 사생활이네, 인권이네 떠들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서장이 나온다. 인사하며 비켜서는 사람들. 석호가 뒤따라 내린다. 사람들에게 아주 작게 까딱... 목례하며 지나간다...
"인사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그냥 눈만 내리깐거지, 지금?"
"놔둬라. 저렇게 옆에 끼고 다니는데. 우리가 보이겠냐?"
"들어가, 일해. 빽도 없고, 줄도 없고... 몸으로 때워야지."
궁시렁거리며 앨리베이터에 오른다.
8.5.3 한식당 룸
문이 열리고 서장과 방으로 들어서는 석호. 먼저 와 앉아있는 두 사람을 보고 멈춘다. 밝게 웃으며 일어나 서장과 인사하는 석호 어머니.
"오셨어요? 자리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앉으세요, 서장님."
"아닙니다, 형수님. 저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합니다. 오늘은 가족끼리 말씀들 나누시고, 나중에 골프나 한번 같이 가요."
"그래야지. 애만 맡겨 놓고, 제대로 인사 한번을 못했어."
"인사는요, 무슨. 석호가 워낙 잘나서, 오히려 제가 그 덕을 좀 봅니다."
"애 듣는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조만간 연락하지."
"예, 가보겠습니다. 그럼..."
다른 곳을 보고 선 석호를 툭툭 치며 나가는 서장이 서둘러 문을 닫는다. 어색하게 남은 세 사람.
"앉아, 미리 말하면 네가 안 올까봐 서장님한테 부탁했어. 놀랐니?"
"제 상사십니다. 후배라고 이런 심부름이나 시킬.."
"심부름이라니? 내가 너네 서장한테 심부름 시키는 걸로 보이냐? 버릇없는 놈."
재빨리 석호의 어머니가 끼어든다.
"앉아, 점심은 먹으면서 얘기해. 오랜만이잖아."
내키지않는 얼굴로 자리에 앉는다. 그래도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연다.
"서장님께서 문자 하셨더라. 아침 뉴스 꼭 보라고. 잘 했어, 이 경감. 멋있었어."
"위에서 시키신 일입니다."
"알지, 우리 아들이 그런 거 나서서 할 성격은 아니니까. 여기저기 전화 오고, 모처럼 다시 엄마로 인정 받으니까 좋더라. 아들 잘 키웠네, 어쨌네..."
"연끊고 지발로 나간거 세상이 다 아는데, 무슨 소리야?"
"그건 그거고, 이번 일은 이번 일이고. 당신은 여기까지 와서 애 불러놓고.. 싸우러 왔어?"
"부모 자식이 싸움이 돼? 싸움도 동등한 관계여야 되는거야. 어른이 야단치고, 혼내고 하면, 잘못했습니다 하는 거지, 싸움이 어딨어, 싸움이? 위아래 없이 대드는 거 밖에 더 돼? 자식 잘못 키웠어!"
"그 말씀 하시려고 부르셨습니까?"
"뭐? 저거봐, 저거!"
"저 잘못 키우신거,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말씀 없으신 것 같으니, 가보겠습니다."
"석호야. 얼마만에 얼굴 보는지 알아? 할머니 돌아가셨을때, 장례식 딱 3일 봤어. 언제까지 이럴래?"
"말씀 드렸습니다. 아직 할일이 많다고요."
"무슨 할 일? 부모 팽기치고 나가돌아다니면서 뭐 그렇게 잘난 할일이 많어?"
"아버지가 싫어하시는 일이요. 경찰 일, 남의 일, 죄진거 갚는 일.."
"둘 다 그만해, 좀!"
어머니가 말려본다.
"저 바쁩니다. 이제 시작이에요. 여러번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싫으시면, 다 할때까지 찾지 마시라구요."
"그만하면 됬잖아. 너 아직도 송 교수 이름으로 장학금 내더라? 그깟 공무원 월급 얼마라고, 꼬박꼬박 범죄 피해 아동한테 다 갖다 바치고.. 그것도 여태 그 사람 이름으로? 너한테 돌아오는게 뭐야 ,도데체?"
"빚 갚는 중입니다."
"집어 치워!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와?"
"...산 사람은 돌아왔습니다."
"뭐?"
"동생이요. 시율이가 부탁했던 여동생... 두 분이 끝까지 못 만나게 방해하던 그 꼬맹이를 찾았습니다."
"돌아.. 와? 한국에 왔다고? 언제?"
"아실 필요 없습니다. 제 일이니까요.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가보겠습니다."
"그건!"
나가려던 석호가 멈칫한다.
"네 잘못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었어. 우리 잘못도 아니고,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어."
흔들리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여전히 똑똑하고, 차갑고, 정말 멋진 여자... 엄마라는 이름으로만, 한없이 약해지는 여자.
"... 알고 있습니다. 저를 위한, 최선이셨어요. 이제는, 제가 최선을 다 할 차례입니다. 이유는 잘 아시잖아요. 만약에 아직도, 정말 제 잘못이 아니라고 믿으신다면, 그럼 좀 그만 숨기고, 그만 덮고... 잘한다, 그래야 하는거다.. 단 한번이라도, 그렇게 생각이라도 좀 해 보세요."
"넌 그때 어린애 였어, 너무 큰 일이라 감당 할 수 없을까봐 그랬어."
"어머니..."
나즈막히 부른다. 아들을, 아들만 바라보는 여자를 위로하기위해 일부러 살짝 웃어보이지만, 눈물이 고이고 만다.
"그때 있잖아요.. 더 어렸어요, 걔가...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아마 그만큼 더 무서웠을거에요. 근데 그런거 잘 모르시죠? 그냥 그때 두분은, 우리 식구, 우리 아들... 그것만 중요했어요. 나 서울 법대 못 갈까봐... 아마 그게 제일 무서우셨나봐요.."
기어코 눈물 한방울이 떨어진다. 손으로 싹 닦아낸다 순식간에 다시 차가워지는 얼굴... 표정관리 능력은 집안 내력이다..
"걱정 마세요. 빚 진거 다 갚고, 사죄하고, 용서 받으면, 그때 갈께요. 머리로 말고, 마음으로.. 두 분을 이해 할 때, 밥은 그때 먹어요."
상관에게 하듯, 자켓을 추스리고 정자세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뒤돌아 나온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든, 듣고 싶지 않다....
8.5.4 차 안
회상 - 석호
*****
12월 29일 아침.
느즈막히 일어나 메세지부터 확인하는 어린 석호.
/유리 좀 부탁해 너 밖에 없다/
"뭐야, 아침부터.. 아 좀 기다리라니까? 더 키워서 데려와야지? ㅋㅋ.."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나온다. 겨울방학... 역시 겨울은 눈이 와야 제맛이다.. 커텐을 연다. 눈이 하나도 없다..
"에이, 뭐야 재미없게.. 생일 선물로 눈사람 만들어서 놀래킬려 그랬는데.. 안되겠네.. 뭘 해주지..?"
책상을 뒤져본다. 서랍을 열고, 박스를 열고... 놀래켜 줄만한게 하나도 없다..
"가서 뭘 사올까.. 할아버지! 저 상가 좀 데려다 주세요.."
거실로 나간다. 누군가와 진지하게 통화중인 할아버지... 분위기가 안좋다. 할머니가 석호를 발견하고 할아버지에게 전한다. 급히 전화를 끊는다..
"어.. 석호야.. 저기, 간단하게 짐을 좀 싸서 엄마한테 가야겠다."
"왜요? 오늘 나 저녁에 유리네 식구들이랑 약속 있는데? 말했잖아, 걔 생일이에요."
"그게... 엄마가 좀 아파서 입원했대. 얼른 가봐야겠다. 뭐해? 차 타!"
"진짜요? 많이 아프대요?"
급하게 차에 오른 석호. 시율에게 전화를 하지만 받지 않는다. 메세지를 남긴다.
/엄마가 아프대. 며칠 갔다 올거야. 유리한테 잘 말해줘, 선물 사 온다고. 미안해/
답이 없다...
며칠 후, 여전히 부산..
"아 왜? 싫어, 할아버지네 갈거야. 시율이랑 같은 학교 간다고! 왜 갑자기 전학을 가? 나 외고 싫어!"
"자리 어렵게 만들었어. 엄마랑도 좀 같이 살아보고 그래야지. 너 대학가면 어차피 서울 갈거잖아. 그때까지만 같이 있어."
"싫어, 안가. 나 서울 갈거야. 그리고 내 전화기 줘, 어디다 숨겼어?"
"학원 갈 시간이야. 얼른 나가."
"아, 전화기 달라고! 유리 생일날 통화도 못했어!"
"갔다와서 줄께."
"또 거짓말. 벌써 며칠 째야? 전화기 좀 줘!"
"차 타, 늦었어!"
억지로 학원으로 끌려가는 석호. 길에 내려 터덜터덜 걸어간다.
"안녕하세요..."
몇시에 들어왔는지, 무슨 무슨 수업을 듣는지... 출석부에 기록한다... 뉴스 소리가 들린다. 학원증을 확인하는 서무 아저씨가 사무실 안에서 뉴스를 보고있다.
/.. 성인 남성의 지문 6점을 확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경찰은 이 지문이, 이 사건의 공범으로 추정되는 50대 남성의 지문이라 확신하며, 현재 대조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로써 미궁에 빠졌던 상도동 경찰 가족 살해 사건에 한줄기 희망이 비춰졌습니다.. /
상도동... ? 출석부 기재를 마친 석호가 머리를 밀어넣고 들여다 본다.. 낯익은 주택가.. 저 골목...
/... 어머니와 아들이 참혹하게 살해된 현장에서, 열개의 손끝이 모두 잘려나간채 발견된 이 남성은, 이미 유가족에 의해, 가족과 일면식도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밝혀져 또한번의 충격을 주었는데요, 오늘 찾은 이 지문으로 한 사람만이라도 신원이 밝혀진다면, 수사에도 속도가 붙을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노란 줄로 막힌 철문, 취재진을 막아선 경찰들, 눈물을 닦으며 돌아서는 동네 아주머니... 아는 얼굴이다... 아는 집이다... 시율이, 유리...!
"아저씨, 전화기 있어요? 서울에 전화 한통화만 할께요.. 빨리요, 급해서 그래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