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12월29일

11화 죽었니 살았니 4

죽어남은 자와 살아남은 자

by 신소운

11.4.1 동자동



서울역 11번 출구 용산구 동자동. 자동차가 후암로를 지난다.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고층 건물을 살핀다. 리화가 얘기한 은신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율이 묻는다.

"이 동네 맞아요?"

"여기 안 와봤구나. 5분만 기다려봐. 다른 세상에서 내릴거야."

종태가 자켓 지퍼를 잠근다. 그립 좋은 가죽 장갑도 꺼낸다.


"날이 춥다. 옷들 잘 챙겨라. 니들은 너무 얇지 않냐? 몇 겹 더 입던지.."

"두꺼우면 둔해서요. 겨울되면 내복을 입으려구요."

"지금이 겨울이야, 입어. 잠복 가면 어쩌려 그래?"

"강형사는 며칠 더 내근하지,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은석이 거울로 눈을 마주친다.


"괜찮습니다. 둘씩 다녀야죠."

"리화야, 너 지율이랑 파트너하면 대한민국 최강이다. 팀장한테 졸라."

종태가 농담하는 사이, 차가 골목으로 접어든다. 순식간에 높은 빌딩들이 사라진다. 갑자기 눈높이로 푹 가라앉는 야트막한 70년대 분위기다. 홀린듯, 창밖을 두리번 거린다.


"내 말 맞지? 다른 세상이라니까... 오랜만이네, 여기까지.. 예전에는 자주 왔었는데.."

"요즘은 왜요? 범죄가 줄었나요? 더 많을 것 같은데?"

"아니야. 겉보기에 험악해 보여도, 팔팔한 젊은 애들이 다 나가니까, 노약자들만 남잖아. 여기가 길건너보다 더 안전할 수도 있어."


"역하고 가까워서 안 나가는 건가요? 교통 때문에?"

"글쎄..? 내 생각에는, 이 동네 사람들은 어차피 동네 밖으로 잘 안 나갈껄? 날 좋으면 역전에 가서 구걸도 하고, 때 되면 생필품 받으러 가고.. 다 이 안에서 해결되니까. 이 사람들은 나가면 고생이야."

허리가 잔뜩 굽은 어르신이 한발한발 언덕을 오른다. 종태의 말이 이해가 된다.


"우리도 걷자. 내 기억에, 차가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지를 못해."

밖으로 나와 사방을 살핀다. 경사가 심하지는 않지만, 눈이라도 오면 다니기가 쉽지 않을거다. 으스러질듯한 문 앞에 내어놓은 낡은 가구는, 쓰려는 건지, 버리려는 건지, 분명치 않다. 그 흔한 가게도 하나 없고, 인적도 없이 조용하다. 서울에 몇개 남지 않았다는 쪽방 촌에, 첫발을 딛는다.


"지율이는 처음이고, 리화는? 이런데 와봤냐?"

"저는 중국에서.. 도심에 빈민가 가면, 이거보다 층수는 높은데, 사는 수준은 비슷합니다."

"아, 영화 같은데 보면, 네모나게 둘러서서 가운데 내려다보고 그러는거? 빨래 막 걸어놓고, 애들 뛰어다니고?"

"못 뜁니다. 무너집니다."


웃는다. 얼마 안 올라왔는데 숨이 차다. 겨울이라 찬 공기가 훅 들어온다.

"용의자가 여기 있는 건 확실한거지?"

"아이들이 조금전에 왔다 갔답니다. 줄게 있다고 불러서 찾아갔는데, 어디를 다쳤는지, 잘 못 움직이더랍니다."

"야, 그럼 아까 우리한테 연락해서 같이 오지, 위험하게 지들끼리 왔대?"


"성매매 알선하는 줄 알고, 알선 장소를 확실히 받은 다음에 연락하려고 했답니다. 현장 잡으라고.."

"그래야 죄가 커지니까... 이야, 요즘 애들 무서워. 다들 경찰이야.. 그래도 조심하라 그래, 몇살들이야?"

"이제는 십대 후반입니다. 이 사람하고 2년 넘게 일했습니다."

"... 그러면, 그래서 연락 안했겠네. 2년 했으면 지들도 여기저기 지은 죄가 있을거니까."

"..."


"아니, 뭐 정보원으로 쓰는 건 좋은데, 너무 믿지는 말라고. 이 바닥이 그렇잖아, 의리와 비리는 한끗 차이야. ... 에이 썅, 왜 이렇게 힘들어? 이거 은근히 가파르네? 이건 또 뭐야, 숨찬데.. 먼저 가, 전화 좀 받고.."

잠깐 멈추고 핸드폰을 꺼낸다. 목소리가 달라진다.

"예, 여보님, 부탁드린거 알아보셨어요?"

리화와 지율이 웃으며 앞서 간다. 종태 옆으로 남는 은석. 골목을 살핀다. 응, 응, 응... 조용히 듣기만 하는 종태.


"... 뭐 있네, 그 사람들... 알았어. 고마워. 원장님 모르게 했지?... 왜 그랬어, 모르게 해야 재밌지, 스파이 같고... 알았어, 알았어, 내가 나중에 밥 한번 산다 그래.... 응.... 고마워.... 진짜 마지막이라니까? 다음에는 영장 받아서 갈께. 아직은 그냥 의심스러운 단계라서.. 그래, 들어가요..."

"미장원 임산부요?"


"응. 좀 이상하네.. 이전에 세차례 임신이 전부 진료 기록만 있고, 출산 기록은 하나도 없대. 막달까지 진료하고, 낳는것만 다른 병원에서 낳은 것 같다는데?그리고, 올해 초에, 임신 8주에 처음 진료를 왔는데, 그때 작성한 질문지에, 세번 다 정상 분만이라고 표시 했대. 동네 사람들은, 애기들이 다 중간에 잘못되었다며?"

"아기들 예방접종이나 소아과 기록도 없구요?"


"출산을 다른데서 했으니까 애가 있어도, 아마 다른 병원으로 갔겠지. 근데 어제 은석이 네가 확인한 주민등록에는, 애들이 하나도 없었잖아. 부부하고, 누님만 있었는데... 출생신고를 안 했을까, 못 했을까.."

은석이 수첩에 기록한다. 리화가 골목을 가르킨다.

"이 쪽입니다. 저 끝에, 왼쪽에 있는 집.."

<호반 여인숙>


아주 오래전에 썼던걸로 보이는, 반쯤 부서진 여인숙 간판이 그대로 붙어있다.

"반갑네, 호반.. 오랜만에 듣는다. 니들은 이런 낭만이 없어요.."

종태가 앞장서며 장갑을 낀다. 지율과 리화도 들어가 준비를 한다.

"내가 갈께요, 두 사람은 여기 있어요."

"아닙니다, 제가 그놈 얼굴을 압니다."


리화가 나선다. 끄덕이며 들여보내는 은석, 대신 지율을 막아선다. 잠깐 멈춰선 지율이 골목을 둘러본다.

"여기가 더 살벌해 보여요. 저도 안에, 따뜻한 실내에서 좀..."

은석을 비켜 안으로 들어선다. 어쩔수 없이 세 사람을 들여보내고, 집 주변을 살피는 은석. 집들이 바짝바짝 붙어 대문 말고는 빠져나갈 곳은 없어 보인다. 문 앞에 버티고 선 은석. 작은 철문이 꽉 막혀, 비집고 나올 틈이 없다...


한사람 지나기도 비좁은 통로에 쓰레기까지 흐트러졌다. 라면 봉지, 종이컵.. 여러번 사용한 듯한 더러운 나무 젓가락.. 양쪽으로 늘어선 객실문에 아직도 번호가 붙어있다. 누가 집어가지도 않을 다 찢어진 신발이 굴러다닌다. 하수구 냄새도 나는 것 같는데, 빈방 하나 없이 꽉 찬 것 같다. 난방도 열악하고, 바람 소리도 난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한 곳이다...


8번방 앞에 멈춘다. 지율과 리화가 문 옆으로 대기한다. 종태가 문을 두드린다.

"안녕하세요? 안에 계십니까?"

답이 없다. 문에 귀를 바짝 대어 보지만, 아무소리 들리지 않는다.

"8번 방 손님, 안에 계세요?"

문고리를 잡고 돌려본다. 잠겨있다. 신발도, 짐도.. 아무것도 나와있지 않아, 있는지 없는지, 알수가 없다.


"이거 뽀개면 얼마나 할까?"

종태가 중얼거리며 문을 살핀다. 리화가 한쪽 발을 높이 들었다가 문 한가운데를 내리 찍는다. 빠직... 길게 세로로, 문짝이 갈라진다.

"네가 내는 거다. 난 부수라고 안 했어.."

직접 들어갈 필요도 없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작은 방이다. 바닥에 널부러진 옷가지 사이로 사람이 보인다. 술 냄새, 담배 냄새.. 이불도 없이 웅크리고 있다. 종태가 다가간다.

"전정수씨, 살아있습니까?"

눈은 떴지만, 별 힘이 없어보인다.


"잠바 밖으로 손 꺼내요. 둘 다 보여주세요."

남자는 시키는대로 천천히 두 손을 내민다. 무기는 없다.

"어디 아퍼요? 다쳤어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한다.

"앉아있기도 힘들구요, 누워도 아프고, 서도 아프고.."


"119 부르지 그랬어요, 아픈데 참지 말고.."

종태가 진심인지 약을 올리는지 애매하게 말을 하며, 성의없이 대충, 몸을 살핀다.

"외상은 없고, 병원가고 싶어요?"

남자가 망설인다. 슬쩍 눈치를 보다가 작은 소리로 답한다.

"...예.."

못 믿는다. 일단 수갑부터 채우고 남자를 일으켜 부축한다. 고통을 호소한다.


"그냥 잡히면 되지 뭐 무섭다고 혼자 앓고 있어요... 병원 먼저 갔다가, 경찰서로 갈께요. 리화야, 이 사람 맞냐?"

"예, 맞습니다. 전정수씨, 저 생각 나십니까?"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리화를 보는 남자. 크게 한숨을 쉬면 고개를 떨군다.

"둘이 알죠? 안산에서부터 쫒아왔는데.. 이렇게 아픈데 왜 도망을 다녀요? 자, 데려가."

리화에게 넘기려하자 남자가 뒷걸음질치며 종태에게 매달린다.


"아, 아... 저 많이 아파요, 병원에 좀.."

가까이 못하고 멀뚱히 서있는 리화 대신에 지율이 나선다. 종태와 양쪽으로 부축한다. 복도가 좁아 세마리 게처럼, 옆으로 걷는다.

"쓸만한거 좀 찾아봐. 우리 먼저 병원으로 간다."

"예, 수고하십시오."

리화가 코를 막으며 이것저것 옷가지들을 뒤적거린다.


문앞에 서있던 은석이 용의자를 본다.

"뭡니까?"

"병원부터 가야겠어. 맹장인가, 상태가 안좋아."

"119 부를까요?"

"좁아서 못들어와. 가까우니까 싣고 가자. 지율이는 리화랑 같이 들어오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보고는 우리가 해야될것 같은데? 지병이 있었나..? 그리고, 박형사 전화해서, 미장원 여자 얘기 해줘. 내일 간다 그랬잖아? 팀장님께 보고하고, 정식으로 수사 시작해야겠다. 네가 맡으면 좋고, 리화랑 둘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은석이 최대한 살살, 어깨위로 남자를 올린다. 여전히 아파한다. 언덕길을 내려가는 세사람을 지켜본다. 엄살은 아닌 것 같다. 잠시후 리화가 나온다.


"이렇게 쉬울 줄 몰랐는데요? 며칠전만해도 파이프 휘두르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벌써 끝났어요? 뭐 없어요?"

"소지품이 옷 밖에 없습니다. 핸드폰 두고가서 들고 왔어요. 가서 뒤져 보려구요. 문 열어두면 안될것 같아서, 파출소 지원 부탁했습니다. 바로 나올 수 있답니다."

"도착하는 대로 우리도 철수해요. 미장원 건 좀 생각해보고.."


골목에 철퍼덕, 다리를 펴고 앉는다. 언덕 위로 아래로, 다 무너져가는 초라한 모습을 본다. 근처를 왔다갔다걸어다니던 리화가 돌아와 옆에 앉는다.

"CCTV가 한대도 안보입니다. 가로등도 별로 잘 될 것 같지 않고.. 범죄 예방팀에 연락 해볼까요?"

"철거 예정인 동네라 안 해줄거에요. 예산 낭비니까."

"그래도 가출한 애들 이런 빈집 같은데 모여 살고, 나쁜짓 하고.."

"알죠. 다 알고 있는데.. 지킬 건 지키고, 버릴 건 버리고.. 여기는 버리는 거겠죠. 인원이 부족하니까."


"그래도 여기있는 이런 집들, 소유주가 있겠죠? 집 주인?"

"있겠죠, 서울인데? 손바닥만해도 땅주인도 있고... 언젠가는 재개발 할거니까, 보수나 투자는 하기 싫고, 버티면 돈 되니까 팔 생각은 없고.. 점점 싸게, 점점 엉망으로.. 그러다 이렇게 됬을거에요. 다같이.."

저 멀리에서 경찰 둘이 올라온다. 툴툴 털고 일어나 손을 흔든다.




11.4.2 시환의 본가




아파트에 들어선다. 어머니가 요리 중이다. 식탁에 이미 여러가지가 올라와있다.

"반찬 가지러 오라면서 밥은 왜 차려?"

"손 씻고 앉어. 정없게 어떻게 반찬만 싸주냐, 먹여서 보내야지. 이렇게라도 쉬는 날 생겼으니까 오랜만에 같이 먹자."

"싫어, 그냥 줘. 아버지 오기전에 갈거야."


시환의 아버지가 방에서 나오다 그 말을 듣는다. 식탁 앞에 멈춰선다. 눈이 마주친 시환이 고개를 돌린다.

"그러지말고, 앉어. 수저만 놔, 다 됐어."

미적미적 싱크로 가 손을 씻는 시환. 수저를 챙겨 의자에 앉는다. 아버지가 한마디 한다.

"머리 잘랐냐? 깨끗하니 보기 좋다."

"...."


아내에게서 쟁반을 건네 받아 밥과 국을 내려놓는다. 아주 살짝 인사하는 듯, 고개를 까닥한다. 못마땅한 얼굴이지만, 그래도 마주 앉는다. 분위기를 살피며 아버지 옆에 앉는 어머니. 아들 표정을 살핀다.

"너 온다고 술 안 먹고 일찍 오신거야. 기분 풀어, 엄마 소원이야. 국 먹어봐, 이거는 엄마가 했어."

싫지만 억지로 한수저 뜬다. 삼킬만하다. 젓가락이 반찬으로 옮겨간다.

"야아! 맛없어도.. 사온거만 먹지말고, 국 말아서 다 먹어. 너 요새 살 더 빠진 거 같애."


아버지가 힐끔 쳐다본다. 얼굴에 멍이 남았다.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다. 밥을 한수저 뜬다.

"다친데는 괜찮냐?"

"다친적 없습니다."

한박자 참고 다시 묻는다.


"... 맞은데는, 괜찮냐?"

"... 언제 꺼요? 어디 맞은 거?"

어머니가 한숨을 쉰다. 아버지가 수저를 놓고 일어선다.

"어디가? 애하고 얘기좀 하라니까!"

방으로 들어간다.


"아휴, 어른이 되가지고 정말.."

시환도 일어난다.

"왜? 밥 먹고 가. 진우 아직 안 들어왔잖아. 혼자 가서 뭐하게?"

"호텔로 갈거에요. 신세지기 싫어서.. 혹시 전화오면, 저 일찍 잠들었다고 하세요. 형한테, 여기 있을거라 그랬으니까... 그 말씀 드리러 왔어요."


"왜? 진우 안볼것 처럼 얘기하니? 싸웠어?"

"아니에요, 쉬고 싶어서요. 갈께요."

반찬도 안 가지고 돌아서 나온다. 짜증이다. 집에 가는게 아니었다... 그렇게 답하는 게 아니고, 그렇게 말대꾸하는게 아니었다.. 어쩌면, 그렇게 아버지를 또 만나는게 아니었다...


운전석에 앉는다. 그제서야 생각나는 한가지.. 집에 두고 왔다..

"아이씨.. 가져와야 되는데.."

잠깐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린다. 아파트로 올라간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간다. 어머니가 아까 그대로 식탁에 앉아 있고, 다시 부엌에 나온 아버지가 잔뜩 쌓인 설거지를 하다 뒤돌아본다. 늘 그랬다. 아버지는, 애처가다..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해 방으로 들어간다. 서랍 깊은 곳에서 옛날 사진첩을 꺼낸다. 두어개 골라 방을 나선다. 그새 챙겨놓은 반찬통을 한보따리 꺼내놨다.

"가져가."

"호텔로 간다구요. 못 가져가요."

인사도 없이, 집을 나선다.


11.4.3 경찰서


주차장 불빛 아래에서 사진첩을 들여다 보는 시환. 어릴 적 지율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추려낸다. 두 집안 어른들.. 어머니, 아버지... 아저씨 아줌마와 시율의 사진도 있다. 망설인다. 보여줘도 될까.. 갸우뚱하며, 다시 사진첩에 넣는다. 아직은 때가 아닌것 같다. 지율과 시환의 사진만 골라낸다. 몇장 되지 않지만, 전해주고 와야겠다. 차에서 내린다. 다다다다 계단을 뛰어내려오던 박형사가 반긴다.


"어? 시환이도 왔구나? 야, 자식 의리 있는데? 가자!"

"어디를요?"

"정환이 생일이라고 온거 아냐? 걔 마누라한테 팽 당하고 혼자 있어서, 다같이 잠깐 놀아줄라고."

"아, 저는.. 선배한테 뭐 갖다줄 게 있어서.."

"지율이도 거기 있지. 위에 아무도 없는거 보고 왔는데? 가! 가서 밥먹어, 배고프다.."




11.4.4 24시




테이블을 주루룩 붙여놓고 앉은 사람들. 리화가 민규가 케익을 사들고 합류한다. 종태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선다.

"야, 고생했다. 빨리 앉아! 오늘 축하할 거 많네? 정환이 생일, 리화 환영회! 잔 들어라!"

"살살해, 나 어제도 마셨어."

정환이 슬쩍 뺀다.

"어제는 독거노인처럼 혼자 마셨고, 오늘은 이렇게 좋은 사람들하고 함께 하잖아!! 당직은 콜라 들고, 나머지는 알아서들 들고! 건배!"


한잔씩 쭈욱 마시는데 들어서는 박형사와 시환.

"어? 시환이 왔어? 야, 전화기 꺼놓고 있더니 어떻게 만났냐?"

"만나기는? 주차장에서 어슬렁거리는 거 잡아왔습니다. 나도 줘, 내 자리 어디야?"

박형사가 상석에 끼어 앉는다. 앉을까 말까 망설이는 시환을 보며 종태가 소리 친다.


"사장님, 여기 두부 한 모 주세요! 이 자식 먹어야 되요!"

우하하하... 사람들이 웃는다. 영문을 모르는 사장님이 주방에서 얼굴을 내민다.

"두부 김치 드려요?"

"좋죠, 생두부로, 안 짤라도 되고! 얼른 주세요. 갑자기 확 땡기네."

종태를 째려보며 반대쪽으로 돌아선다. 진우, 민규, 지율, 리화.. 서열 상 막내들이 모인 테이블로 낀다.


"야, 전화 좀 받지? 걱정하잖아."

"그냥.. 아, 배고파. 뭐 시켰어?"

한 상 잘 차려진 음식을 본다. 해물 파전과 불고기다.

"저쪽은 제육 드시고, 우리는 건전하게 불고기 전골."

"왠 불고기? 선배는 뭐 먹어?"


습관처럼 지율을 챙긴다. 진우 옆에 앉은 지율의 앞접시를 본다. 고기는 빼고, 양파와 버섯만 골라 국물과 함께 잘 담아놨다. 지율과 눈이 마주친다. 어색하게, 고개만 까닥 하고 시선을 피한다. 진우가 국자를 든다.

"짜식, 우리가 어련히 안 챙길까봐.. 자, 뜨거울 때 얼른 먹어."

그릇 가득, 수북히 담아준다. 강진우 답다.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지율 옆에서 이것저것 반찬을 챙긴다. 태연한 척 지켜보는데, 안심이 되면서도... 섭섭하다.




11.4.5 루체



같은 시간, 석호가 혼자 술을 마신다. 이미 많이 취했다. 중얼중얼.. 아무도 없는 옆자리를 자꾸 돌아보며 이야기한다.

"아버지, 이대로 다 얘기하면, 용서 받을 수 있나요..? 아, 근데 그러고 나면, 우리 유리 얼굴을 어떻게 봐요? 차라리 날 막 패면, 맞아죽어도 괜찮은데.. 미안해서, 내가 미안해서 말을 못하겠어요.. 아버지께도, 정말 이대로 가시기 전에, 내가 다 말씀 드려야 되는데.. 아까 다 말 할려고 작정하고 간건데.."


점점 테이블 위로 엎드리는 그에게 바텐더가 묻는다.

"택시 불러드릴까요?"

"아니요.. 잠깐만 자고 일어날려구요, 저는, 술 금방 깨요.."

"친구분이라도 전화해 드릴까요?"

"친구는 무슨.. 괜찮아요. 5분만, 딱 5분만 자고 일어날께요.."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가까이 온다.

"손님, 혹시 여기 용산 경찰서, 거기 경찰이시죠? 전에 서장님하고 몇번 오셨잖아요, 맞죠?"

"흐흐.. 경찰이요... 맞아요, 제가 경찰인데, 똑바로 말도 못하고, 일도 못하고.."

나무 늘보처럼, 팔다리가, 온 몸이 점점 늘어진다. 다시 테이블에 뺨을 대고 잠을 청한다. 두 사람이 시계를 보며 고민하다가, 결국 경찰서로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죄송합니다, 여기 경찰서 건너편, 맑음 약국 건물 지하에, <루체> 인데요, 경찰 한분이 혼자 오셨는데, 많이 취하셨어요... 아니요, 그런건 아닌데, 자꾸 주무실려고 해서, 누가 좀 모셔갔으면 해서요... 성함은 모르겠구요, 서장님이랑 가끔 오시는 분이세요.. 누구 좀 여기로 오실 수 있을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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