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죽었니 살았니 5
죽어남은 자와 살아남은 자
11.5.1 24시
점점 술이 오르는 사람들, 몇명은 일 때문에 자리를 뜨기도 하지만, 대신 또다른 얼굴들이 늦게라도 나타나 한잔씩 나눈다. 수북히 박스를 채워가는 술병..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정환이 사장을 부른다.
"사장님! 우리 노래방 틀어줘요! 생일인 사람 노래는 하게 해 줘야지?"
"틀어요, 약속 했으니까 틀어줘야지. 이거 우리 특별한 날만 하는 건데, 오늘은 정말 보너스에요."
벽걸이 티비 채널이 바뀌더니, 금새 노래방 배경음악이 깔린다. 꽤 두꺼운 노래책과 마이크가 나온다.
"아, 이거 뭐야? 식당에서 왠 노래?"
"여기 원래, 우리 회식할때 쓰라고 해주셔. 요즘 노래는 별로 없는데, 그래도 쓸만해. 종태 형님 전용 노래방."
"난 그만 갈래. 피곤해."
"왜? 놀다 가야지!"
"죄지은 놈이 무슨 노래야? 됐어."
"야, 너 지율이 불러준다고 노래 연습도 했잖아. 그거는 하고 가!"
일행이 시환을 본다. 지율이 기대 가득한 얼굴로 응원한다.
"진짜에요? 화이팅! 근데 무슨 노래?"
"아, 형, 좀.. 아직 잘 못해요... 안해, 집에 갈거야."
"야, 저 형님들 봐봐, 이중에 네가 제일 잘 해. 걱정하지마."
뒤돌아본다. 개판 오분전이다. 한명 노래하는데 우르르 몰려나가 각자의 장기를 선보인다. 특이한 춤사위, 절대 들어본적 없는 화음, 돌림노래가 되어버리는 떼창.. 재미있지만, 엉망이다. 웃느라 술까지 쏟는 정환, 조금씩 취해간다.
벌써 몇곡이 지났다. 종태 이름을 외친다. 노래가 나온다. 변진섭, 숙녀에게...
"아, 왜 저래, 안어울려.."
"몰라? 문 형사님 첫사랑 노래. 노래 잘 안하시는데, 가끔 한번씩 이거 부르셔. 어쩌다 잠복가면 차에서 틀어주시고.. 변진섭.."
/어쩌면 처음 그땐 시간이 멈춘듯이, 미지의 나라 그곳에서 걸어온것 처럼
가을에 서둘러온 초겨울 새벽녘에, 반가운 눈처럼 그대는 내게로 다가왔죠... /
"언제적 노래야, 도대체? 우리 태어나기 전 아냐?"
"형님 첫사랑인데, 당연히 우리 태어나기 전이겠지. 근데 되게 진지하시잖아, 잘 봐봐!"
"영상찍어. 형수님한테 보내자."
"에이, 안돼, 하지마. 형수님도 다 아신대. 그래서 저 노래 엄청 싫어하시잖아."
/... 나 그대 아주 작은 일까지 알고 싶지만, 어쩐지 그댄 내게 말을 안해요
허면 그대 잠든밤 꿈속으로 찾아가, 살며시 얘기 듣고 올래요../
종태의 노래가 계속되고, 생일을 맞은 정환도 기분이 좋아진다. 술도 얼큰히 오르고, 친정에 간 부인에게 전화를 건다. 한밤중이라 그런지 메세지로 넘어간다. 다시 또 건다. 또 메세지로 넘어가려는 찰라에 받는다.
"여보, 안 잤어?"
"자다가 깼지, 누가 전화해서.. 노래방이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응, 생일이라고 사람들이.."
"뭐라고? 안들려. 내일 전화해."
"아 잠깐 끊지마봐, 내가 나가서 받을께, 잠깐만 그대로 있어.."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화이팅을 외쳐주는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간다. 춥지만, 조용하다.
"여보야, 나 오늘 생일이잖아.. 바빴어?"
"케잌 쿠폰 보냈잖아, 안 썼어?"
"케익을 뭐, 나 혼자 먹냐? 나 오늘 짜장면 먹었어. 생일이라서."
"맨날 먹으면서 뭐.. 그러니까 주말에 오라니까 안 오구서는 왜 인제 그래?"
"바빴어, 뭐 안풀리는게 하나 있어서.. 이번주에 갈까?"
"아무때고 한번 와야지. 장모한테 다 맡겨놓고 다시 총각처럼 사냐?"
"여보야 힘들어서 갔잖아, 장모님 눈치 보여서 못가겠다.."
"아우, 추운데 얼른 들어가 자. 애기 깬다, 끊어."
"알았어, 내일 전화 할께, 잘 자요~"
"어, 늦었는데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숙직실 가서 자던지해, 알았지?"
"내가 요새 거기를 ... 됐고... 알았어, 잘 잘께요, 보고싶어."
"어, 나도. 자.."
끊어진 핸드폰을 보며 씨익 웃는다. 그래, 몸이 멀어졌다고 마음도 멀어지지는 않는다... 일어나 들어가려는데, 저 앞에 경찰이 두명 온다. 누구지? 등에 누군가를 업고 있다. 세미 정장에 코트다... 이석호??
"야, 수고하는데, 뭐냐, 이거? 이팀장 왜이래?"
"저희도 죽겠습니다. 여기서 식사하십니까? 안으로 모셔도 되죠?"
"여기로? 왜?"
"강지율 경위님 찾으시는데, 누가 이 근처에서 회식하신다 그랬나봅니다. 당장 가야된다고 난리를 치셔서 일단 모시고 왔습니다."
"모시고 온게 아니라, 귀찮아서 던져 버릴려고 온 것 같다."
"무겁습니다.. 안으로 좀 .."
"어, 그래, 들어가. 춥다. 밥 먹고 갈래?"
"근무 중입니다."
힘겹게 식당안으로 들어선다. 거의 끝부분까지 부른 종태가 석호를 보고 멈춘다.
"뭐야? 이 팀장이야? 어디서 이렇게 마셨어?"
서둘러 의자들을 붙여 누울 자리를 만든다. 내려놓자마자 인사하고 바로 도망가는 순경들.
"야, 콜라라도 하나씩 마시고 가지..?"
"이석호! 자냐? 야!"
정환이 깨워본다.
"깨우지마, 꼬장부리면 더 시끄러워. 그냥 놔둬. 야, 다음 누구야? 나와!"
다음 노래가 시작되고, 잠시 석호를 잊은채 또 한바탕 논다. 몇곡이 지나고, 영어 자막이 뜬다.
/Born To Be My Baby 본 투비 마이 베이비../
"어쭈, 누가 팝송하는데? 누구야? 진우냐?"
"아닙니다! 류시환입니다!"
진우가 씩씩하게 대답한다. 우와~~ 사람들이 환호한다. 지율의 얼굴에 미소가 비친다. 사람들과 함께 환호한다. 당황한 시환이 어쩔줄 모른다.
"아, 형, 저거 언제 했어? 나 안한다니까??"
"같이 해, 같이! 도와줄께. 지율이 기다리잖아, 나와!"
진우에게 끌려 나간 시환이 화면을 보며 긴장한다. 신나는 전주에 비해 소심하게 노래를 시작한다.
Rainy night and we worked all day
We both got jobs 'cause there's bills to pay
We got something they can't take away
Our love, our lives
진우가 조금씩 함께 해 준다. 슬쩍 사람들을 본다. 지율과 리화가 바라보며 웃는다. 시환도 조금씩 긴장이 출리는 것 같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는다.
Close the door, leave the cold outside
I don't need nothing when I'm by your side
We got something that'll never die
Our dreams, our pride
호흡이 제법 맞아가는 것 같다. 진우와 마주보고 살짝 웃기까지 하면서 노래를 이어간다. 도입부보다 조금 소리가 커진다.. 음이 올라가고 빨라진다. 후렴구로 들어간다. 지율과 리화를 비롯해 몇명이 따라부른다..
You were born to be my baby
And baby, I was made to be your man
We got something to believe in
Even if we don't know where we stand
Only God would know the reasons
But I bet he must have had a plan
'Cause you were born to be my baby
And baby, I was made to be your man...
1절이 끝난다. 박수소리.. 환호소리.. 시환도 많이 부끄럽지만, 이내 웃는다. 시끄러웠을까.. 자고 있던 석호가 벌떡 일어나 휘청휘청 앞으로 걸어 나온다. 한발이 찌익, 미끄러진다.
"어,어.. 야 조심해라, 괜찮아?"
잡아주려는 민규를 뿌리치고 혼자 일어선다. 진우가 활짝 웃는다. 팔짱을 끼며 부축해준다.
"형 노래 할라고? 잠깐만... "
마이크를 지지대에 꽂아 고정시킨다. 석호가 한손으로 진우를, 한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2절을 노래한다.
Light a candle, blow the world away
Table for two on a TV tray
It ain't fancy, baby that's OK
Our time, our way
평소에 조용하고 차가운 모습만 보이던 그가, 거칠고 파워풀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놀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른다. 가사도 보지않고 두눈을 꼭 감은채, 마이크를 힘껏 움켜쥐었다. 깊은 상처를 토해내듯, 그렇게 허스키한 소리를 지른다. 약간의 영국 억양까지 비슷하게 따라하며, 완벽하게 소화한다.
So hold me close better hang on tight
Buckle up, baby, it's a bumpy ride
We're two kids hitching down the road of life
Our world, our fight
"야, 이석호 노래 잘하는데? 그래, 저정도 목소리가 나와야지. 잘한다!"
"의외네, 저런걸 언제 배웠대?"
반응이 좋다. 지율 역시 뚫어져라, 석호를 본다... 기억속의 그 노래, 그 목소리다. 본조비가 아닌, 지율의 머리속에 박혀있는 그 목소리... 시율이라 생각했던 그 발음과 발성을, 이석호가 똑같이 하고 있다.
'Cause you were born to be my baby
And baby, I was made to be your man
술에 취한 이석호가 움직인다. 마이크 지지대를 잡은 손을 놓고, 다른 한손을 의지한 진우마저 놓고 춤을 춘다. 노래와 전혀 어울리지않는, 막춤이다. 사람들이 박수를치며 좋아한다. 종태마저 박장대소한다. 지율 혼자 굳은 표정으로 석호를 응시한다.
Only God would know the reasons
But I bet he must have had a plan
'Cause you were born to be my baby
And baby, I was made to be your man
아버지의 춤... 엄마를 웃게 만들던 그 엉터리 춤을 동작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하고 있다. 마지막 후렴구가 끝난다. 숨이 찬 석호가 활짝 웃으며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한손은 가슴에 대고, 한손은 옆으로 쭉 뻗는, 콧수염 달린 만화 속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하는, 아니면 13세기 유럽 백작들이 하는 그런 인사... 아버지가 늘 우스꽝스럽게 피날레를 장식하던 그 인사까지 완벽하게, 이석호가 재현한다.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의 박수와 앵콜 요청이 시작되지만, 잔뜩 취한 석호는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간다. 진우가 부축한다. 누워있던 자리로 돌아가 몸을 기댄다. 지율이 뛰어나와 같은 번호를 누른다. 이석호에게 소리친다.
"나와! 다시 해!"
석호가 웃는다. 반쯤 누운 자세로 지율을 보며 웃는다. 숨이 차고 술에 차서, 힘들다... 다시 한번 소리친다.
"다시 하라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당황한 진우가 지율을 말리고, 시환이 시작된 전주를 꺼버린다.
"야, 왜그래? 형 많이 취했어, 못해."
석호가 배시시 웃으며 스르륵... 옆으로 쓰러진다. 지율이 뛰어가 멱살을 잡고, 억지로 세워 앉힌다.
"너 누구야? 누군데 우리 오빠랑 똑같이 노래를 해?"
술에 취한 석호가 웃는다. 지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키득키득 웃는다.
"바보.. 정말 깨끗하게 비었다... 강장동물이라고 뇌까지 비웠어? 나잖아, 너네 오빠 아니고.. 시율이 어디가서 절대 노래 안했어, 걔 음치야..."
"시율이...? 우리 오빠를 알아? 너 누군데.. 아까 그 춤.. 그거 우리 아빠가 엄마한테 하던 거야. 근데 네가 어떻게 알아?"
"송유리 많이 컸네, 오빠한테 야자도 하고.. 성질머리는 똑같애.. 크크크.."
"송유리...??"
누우려한다. 지율이 석호의 뺨을 철썩철썩 때린다.
"야! 일어나! 이석호! 너 누구야? 잠 깨! 야!"
놀란 진우가 달려들어 떼어놓는다. 지율이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린다. 머리 뒤로 주먹을 날려 진우를 친다.
"아악.. 야!"
얼굴을 맞아 잠시 놓친 사이, 다시 석호에 달려든다. 아예 누운 석호의 멱살을 쥐고 흔든다.
"이석호! 일어나라고! 야! 이석호..? 이 석 .. 호 ...!!"
/ 짧은 회상, 웃음 소리가 들린다. 으하하하... 아이스크림들 들고, 등에 업혀 도망간다. 멀리서 시율이 쫒아온다. 교회로 숨어든다.
"야, 이석호! 거기 안서? 너 잡히면 죽어!"
"숨어! 다 먹어, 빨리! 시율이 온다!"
아이스크림을 까준다. 웃느라 먹기가 힘들다. 큭큭큭...
"쉿! 조용히해, 들켜! 크흐흐..."
단정하게 자른 머리, 땀에 젖은 교복 셔츠, 그리고 노란 명찰... 이석호...
다락방에서 공책을 찢어 궁서체로 예쁘게 글씨를 써준다. 강장동물...
"다음에는 틀리지마. 너 닮은 거야, 머리까지 깨끗하게 싹 비어있는 거.."
공책을 덮는다. 표지에 써 있는 이름 - 이석호...
"야, 이 자식아, 너 누구 동생을 보고 강장 동물이래??"
시율과 합세헤 덤빈다. 셋이 바닥에 데굴데굴 구른다. 유리가 다칠까봐 안고 방어하는 석호, 그 어깨 아래에 갇혀 까르르 웃는다. /
"지율아... 손 놔, 이제.. 그만해."
진우가 지율의 손에 잡힌 셔츠를 뺀다. 멱살을 놓는다. 석호가 무기력하게 풀썩... 팔을 툭 떨어뜨리고 눕는다. 빨갛게 손톱자국이 올라오며 방울방울 피가 올라온다. 목을 할퀸것 같다. 손을 뻗어 피를 닦아낸다. 석호가 지율의 손가락을 잡는다. 간신히 눈을 뜨고 손가락에 묻은 피를 본다. 자신의 셔츠에 손을 닦아주고는, 그대로 꼭 쥐고 가슴에 얹는다.
"유리야, 이제 그만 기억해야지. 다 생각나야, 나도 사죄를 하지.."
누운 채로 눈물이 흐른다. 혼란스러운 지율이, 잡혀있는 손가락을 뺀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돌아선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 앉아있던 자리로 간다. 가방을 챙긴다. 석호가 흐느껴 울며 소리친다.
"야! 왜 기억을 못해? 나잖아! 내가 시율이 죽였잖아! 너네 엄마랑 오빠, 다 내가 죽였잖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