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1 24시
진우의 주선으로 석호와 밥 한끼 하기로 한 지율, 회식 건으로 조금 어색하지만 풀어보기로 한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의 팔짱을 끼고 식당으로 들어간 진우가 주문부터 한다.
"사장님, 저희 백반 3인분이랑 사이다 하나 주세요. 빨리요."
"초고속으로 해드려요. 앉으세요."
"메뉴 하나 늘려요. 경찰 백반 스페셜!! 1분안에 나옵니다!"
석호와 마주앉는다. 컵에 물을 따르며 살짝 분위기를 살피던 진우가 입을 연다.
"형은, 뜬금없이.. 그 노래는 뭐냐, 안 어울리게? 예전에도 술 잔뜩 취해가지고 한번 불렀었던거 같긴한데, 언젠가 동문회 할 때.. 맞지?"
"몰라, 취해서 그랬으면 당연히 기억 안나지. 보기 안좋았냐?"
"아니, 전혀! 분위기 진짜 좋았어. 지율이랑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지. 어렸을때, 그때 알던 노래야?"
석호가 지율 쪽을 힐끔 보지만, 지율은 일부러 눈을 피한다.
"지율이네 어머니가 좋아하셨어. 내 기억에, 되게 아담하고 예쁘셨는데, 성격은 터프하셨어. 아버지는 덩치가 크고, 호남형이라 그러나..? 남자다운, 그런거 있잖아.. 사이가 엄청 좋으셔서, 맨날 애들하고 같이 춤추고 노래하고.. 나도 거의 그 집에서 살다시피하느라, 저절로 배운거야. 나중에 써먹기도 하고.."
"그걸 어디다 써먹어? 그 막춤을?"
"춤은 아니고 노래.. 내가, 할아버지가 목사님이셨잖아. 매년 청년부에서, 교회 연합으로 찬송 가요제를 했는데, 그 해에 본선 날짜가 다른 거랑 겹친거야. 시율이.. 지율이 오빠.. 랑.. 스키장을 가기로 했었는데, 매년 하던거고, 할아버지 체면도 있으니까 나가기는 해야 되고, 근데 본선 가기는 싫고.. 다른 찬송가 한다고 신청해놓고, 시율이네 집에서 본 조비 노래를 연습했어. 그 노래가 가사가 그렇잖아, 너는 날 위해 태어났고, 나는 널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은 아무것도 몰라도, 모든 건 신의 뜻이다..."
"신 나오면 찬송가지."
진우가 거든다. 쟁반 가득, 식사가 나온다.... 서둘러 수저를 든다.
"잘 먹겠습니다..."
"그렇지, 신 나오면 다 찬송가야. 매일 얘네 집에서 몰래 연습하고, 예선 날 대회에 나갔어. 지율이도 오빠랑 왔었는데 기억 안 나? 우리 교회에서, 너네랑, 학교 친구들까지 우르르 데리고 와가지고.. 플랭카드 들고 막 소리 지르면서 일부러 시끄럽게 하고.."
그거였다. 이제야 똑바로 생각난다. 이석호, 이석호..를 외치던 시율과 옆에 선 지율, 유난히 커보이던 무대..
"노래 반도 못하고, 할아버지가 화가 나셔서 앰프를 껐어. 예선 탈락했지, 목사님 손자가.."
"크크크, 형도 막 나갔구나. 그래서 친구들이랑 스키장 갔어?"
잠시 지율의 눈치를 본다. 밥풀 몇개를 집어 한 젓가락 입에 넣는다.. 사장님이 특별히 해 주신, 계란 후라이를 앞으로 밀어준다.
"... 아니. 사고 났잖아... 나는 부산 가고.."
진우가 멈칫한다. 안 듣는 척, 태연하게 식사를 계속 하는 지율.. 석호가 덧붙인다.
"초등학교때부터, 매년 갔었어. 맴버가 있었거든. 가족들끼리도 서로 다 알고.. 겨울이면 스키장에서 사는 애가 하나 있었는데, 걔네 부모님이 가끔씩 우리를 다 데리고 가셨어. 한번 가면 2-3일씩..? 창률이 형도 알아. 왔었으니까."
"송 박사가 스키를 같이 갔다고? 의외네? 사이 안 좋았다며?"
"스키를 같이 간건 아니었고, 놀고 있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시율이만 데려갔어. 사고 나기 전 겨울이니까, 같은 해, 연 초... 였겠다. 시즌 끝나기 전에, 그래, 중 3 올라가던 겨울 방학이었으니까, 아마 2월이었을거야. 개학 전에 한번 더 논다고 갔거든."
지율이 잠시 식사를 멈춘다. 계산해본다..
"의대 합격했을 그때야. 갑자기 사채 받아서, 강원도 카지노에서 날렸다고 주장했던 그거.."
"어, 그 스키장 바로 옆이 강원랜드야. 그럼 그날 거기에 오셨었나?"
"도박한다고 사채를 받아간 사람이, 동생을 데리고 집에 갔다고? 이상하지 않아?"
부자연스럽다. 지율 역시 갸우뚱한다.
"작은 오빠가 거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큰 오빠는 우리랑 대화도 별로 없었는데.. 일단 알았으니까, 데리러 갔을거잖아. 그리고.. 들고 간 1500만원은, 누가 쓴거야?"
"제 3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네, 안그래, 형?"
석호가 말을 아낀다. 복잡하다. 진우가 답답해하며 재촉한다.
"봐봐.. 평소에 엄청 무섭고, 다 쥐고 흔들고 통제만 하던 큰 형이, 갑자기 사채를 받아서 카지노에 갔어. 그 전에는 게임이고 뭐고, 사고 한번 친 적 없이 공부만 하던 사람이.. 그리고나서, 돈은 거기에서 사라졌고, 옆에 스키장에서 잘 놀고 있던 자기 동생만 쏙 빼서 집으로 돌아갔다.. 안 이상해?"
진우에 이어 지율이 보탠다.
"송창률 본인도 학생이고, 차도 없었어. 친하지도 않았던 작은 오빠를, 귀찮게 거기까지 데리러 갔다는거 자체가 이상해."
석호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정황만 봐서는..."
끝내 섣부른 발언은 하지 않는다... 진우와 지율이 동시에 답한다.
"몸값?!"
12.4.2 경찰서
나갈때보다 훨씬 어두워진 얼굴로 들어오는 세 사람. 빠른 걸음으로 반쯤 날아가던 정환과 박형사팀을 휘리릭 스쳐지난다. 정환이 소리친다. 주차장으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
"강진우! 환전소 진전 없어? 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그래가지고 잡겠냐?"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이씨, 소문 내고 그래.."
사라지는 뒤통수에 대고 사과한다. 슬쩍 석호한테도 눈치가 보인다. 상관은 상관이다.. 궁색한 변명을 한다.
"뭐가 나와야 파는 척이라도 하지.."
불편한 건 지율도 마찬가지다. 눈치 챈 석호가 엘리베이터로 간다.
"먼저들 가. 난 위층에 들렀다 갈께. 부르신다."
지율도 계단으로 올라선다. 복도에서 찬호가 부른다.
"강 형사님, 저쪽에 앉아 계신 여자 분이요, 강 형사님 찾아오셨대요."
함께 뒤돌아본 진우가 깜짝 놀라며 뛰어간다. 진우를 보고 일어나는 중년 여자.
"어? 어머니..! 어떻게 오셨어요? 시환이 알아요, 오신거?"
"아냐, 나 오는 거 싫어해. 그냥 잠깐만 들렀다 갈라고.. 점심 먹었어?"
멀뚱멀뚱 서있는 지율을 부른다.
"예, 지금 막... 지율아, 인사해. 시환이 어머니."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
여자가 숨이라도 멎은 듯,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을, 똟어져라 쳐다본다. 당황스럽다.
"지율이가 아니라... 너, 유리지? 송유리.."
순식간에 눈물이 투두둑 떨어진다. 어쩔줄 모르는 두 사람. 진우가 여자를 감싼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잠깐 앉으실래요?"
고개를 저으며 애써 울음을 참아보지만, 눈물이 쏟아진다. 지율에게 다가가 얼굴과 팔을 쓰다듬는다.
"닮았어, 언니랑 많이 닮았어.. 너네 엄마랑.."
무표정으로 가만히 서있는 지율, 기억을 떠올려보려 하지만, 머리 속이 백지다.
"어머니, 시환이한테 듣고 오셨어요? 유리 왔다고?"
우느라 말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끄덕 한다. 아까 앉아있던 의자로 다시 모신다.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간다. 지율을 옆에 앉히고, 대신 진우가 설명한다.
"근데 지율이가.. 아니 유리가, 기억을 좀 잃었어요. 아마 어머니도 기억 안 날지도 몰라요."
그제서야 눈물을 닦고 진정해본다. 지율의 손을 잡는다. 닦아도 닦아도,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그래, 들었어. 그럴만도 하지, 어린 애가.. 어른들도, 우리가 전부 다.. 얼마나 힘들었는데.."
지율을 쓰다듬다가 손에 난 상처들을 본다. 손을 움추린다. 시환 어머니가 미소짓는다.
"괜찮아. 너 싸움 잘 한다면서? 그거 다 내가 가르친거야. 너네 째끄맸을때 부터, 내가 운동 시켰어, 시환이랑 너랑... 우리 도장에서.. 시율이도..."
다시 눈물이 흐른다. 옆에 선 진우도 기분이 착잡해진다. 손수건을 꺼내 어머니 손에 쥐어드린다.
"아휴, 진우야.. 네가 옆에서 유리 좀 잘 챙겨? 난 아직도 못 믿겠다, 얘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니.. 얼굴 보니까 더 정신이 하나도 없어.. 시환이 자식은 성질만 내고, 집 나가서 전화도 안하고.. 너 어렸을때 생각 안 나지? 너네 쪼끄매가지고 맨날 붙어다니고, 진짜 귀여웠는데.. 짜식이 요새는 컸다고 아주 별로야..."
지율이 웃는다. 어머니도 웃는다. 이내 다시 눈물이 찬다..
"웃는것도 닮았다, 너네 엄마 참 예뻤는데.. 아우, 그 많은 얘기들은 언제 일일히 다 해, 바쁜데.. 내가, 너 좋아하던거, 도시락이라도 싸서 가져올까 그랬는데, 시환이 아빠가 하지 말래, 내가 하면 맛 없다고.. 다음에 어디 가서 사줄께, 응? 너희 안 바쁠때, 시환이랑, 진우랑, 다같이 한번 보자?"
"그럼요, 그래야죠. 지율이 어머니 얘기 해주실 분이 별로 없었어요. 어머니가 해주세요. 친하셨죠?"
진우가 대신 답한다.
"그럼, 두 집이 일부러 코앞에 붙어 살었어. 걸어서 5분? 나 일한다고 언니가 시환이 다 키워주고.. 아, 이거 가져왔어. 너네 엄마가 만든거야.. 내가 이걸 여태 못 버리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며 작은 종이 가방을 건넨다.
"묵주야. 너네 엄마가 다 하나씩 손으로 만든거. 봉사 나가서, 임종하시는 분들 드리고, 기도 해 주고, 서울역 앞에 급식하면서 노숙자들한테도 주고.. 보육원 애기들도 하나씩 주고.. 엄마가 봉사를 많이 했거든. 애들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잠시 지율을 살핀다.
"오빠들 둘 다 입양인거 알지? 걔들도 보육원 봉사 다니다가, 너네 아빠가 절대 안된다는 거, 니 엄마가 우겨서 겨우 데려왔어. 그때는 애를 못 낳는 줄 알았었거든. 그래도 그렇게 좋은 일 많이 하니까, 결국에 너 같이 이쁜 딸도 낳고.. 같이 오래 안 살아서 모르지? 너네 부모님랑 오빠들이랑.. 너 정말 많이 예뻐했어."
지율이 조금씩 관심을 보인다.
"어느 보육원인지 기억하세요?"
"야, 너는 지금 그게 궁금하냐..."
진우가 말린다.. 아랑곳 않는 지율.
"첫째.. 오빠요, 송창률... 어느 보육원에서 왔는지 아세요? 아직 있어요?"
"그럼, 있지.. 거기가, 예전에 경찰 은퇴하신 분 가족들이 하는데라서, 경찰 와이프들이 많이 가, 봉사하러.. 둘 다 거기서 왔어. 강서구 화곡동에..."
재빨리 수첩을 꺼내 받아적는다. 시환 어머니가 웃는다.
"너 경찰 맞구나. 어려서도 그렇게 야무지더니.. 우리 남편이, 시환이가 너 반만 되면 좋겠다고 맨날 부러워했는데.. 그러고 있으니까, 네 아버지랑 똑같다.."
고개를 들어 여자를 본다. 그제서야 천천히 얼굴을 살핀다. 시환이 쏙 빼닮은 입가, 하얀 피부.. 얼굴형...
"형수님! 여기까지 왠일이십니까? 유리 보러 왔어요?"
복귀하던 종태가 인사한다.
"어머, 이게 누구야? 종태 삼촌을 다 보네.. 얼마만이에요?"
"형님이 집안에 꽁꽁 싸두고 안 내놓으니까 못봤지. 아직도 그렇게 금슬이 좋아요?"
"아유, 주책이야, 여전해."
가까운 사이인지 농담을 주고 받는다.
"애들 다 봤으면, 어디가서 차나 한잔 해요?"
"아니에요, 일어나려던 참이에요. 애들 바쁜데.. 유리야, 아줌마 갈께, 다음에 우리집에 놀러와? 어머, 나 좀 봐.. 다 큰 아가씨한테 놀러오래, 애기처럼.."
"다 크기는 뭘, 옛날 송유리 그대로에요. 말 안듣고, 똥고집이고.. 성질 못되처먹고.. 가세요, 모셔다 드릴께요."
"아니에요, 지하철 타요."
"역까지 같이 가요, 그럼. 몇년만에 봐놓고 그냥 갈라 그래요?"
"좋아요, 그러시던가... 진우야, 갈께? 유리도 잘 있어. 또 보자?"
꾸뻑 인사를 한다. 종태와 나가는 시환 어머니... 지율이 종이 가방을 들여다 본다. 묵주.. 작은 십자가가 달려있다. 스무개도 더 되어 보인다. 진우가 옆에서 들여다 본다.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와, 이런게 있었네... 축하해! 엄마 꺼, 하나 생겼다, 그치?"
지이잉... 진우가 전화를 받는다. 조 팀장이다.
"예... 아뇨, 들어왔습니다. 1층 로비에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신변보호요? 저희가요...? .... 안돼요, 팀장님, 인원도 없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따라다녀요...."
두 다리가 먼저 알고 저절로 계단을 오른다.
12.4.3 놀이방
리화가 놀이방 원장과 상담하는 사이, 시환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본다. 보육교사에게 묻는다.
"여기, 길건너 소피아 헤어 살롱에 계신 분 아들도 다니죠? 저희, 그 분이 추천해 주신거에요. 머리하러 갔다가, 애 맡길 데가 없다고 하소연 했더니, 바로 여기를 알려주셨대요."
"어머, 그러세요? 쟤 에요, 노란 티 입은 애.. 엄마가 미용사라서, 애기 머리 너무 예쁘죠?"
"미모가 확 튀네.. 근데 그분은, 남편은 없는거죠? 직접 물어보기가 좀 그래서.."
"잘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는데, 계속 오시는 남자 분이 계세요, 나이 차이가 좀 되고... 확실치 않으니까 먼저 말씀하시면 안될거에요."
여자가 소근소근 작은 소리로 일러준다. 똑같이 목소리를 낮춘다.
"아, 재혼이나.. 세컨드..?"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조심 말을 꺼낸다..
"애기 엄마가 좀 예쁘잖아요, 복잡하게 살았나봐요. 며칠 전에, 요 앞에서 둘이 싸우는 것도 봤어요. 애 유치원 보내야 되니까, 혼인신고 해달라고 그러더라구요. 저라면 별로.. 애들 친구 시키고 그럴 집안은 아니에요."
여자가 입가에 손가락을 올려 쉿.. 하고 다른데로 가버린다.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간다. 막 끝낸 점심 식사 정리를 돕는다. 아이가 턱에 둘렀던 턱받이로 입을 닦아준다. 침이 잘 묻도록, 장난치는 척 입술 안에까지 넣었다 뺀다. 슬그머니, 아이의 수저통을 주머니에 숨기고, 손을 씻기러 화장실로 데려간다.
"애기 손에 뭐가 묻었는데.. 제가 씻겨줘도 되죠? 여기 써요?"
다른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쁜 보육교사가 오히려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아이를 데리고 야트막한 아이들용 세면대로 간다. 크리넥스로 코를 닦는다. 이정도면 되었다.. 손을 씻겨 자리로 보내고, 원장실 쪽을 본다. 눈이 마주친 리화에게 신호를 보낸다. 상담을 마무리하고 나와 차에 오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