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1 사무실
며칠만에 씻고 나와 자리에 앉는다. 그런 지율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긴장한다. 밀린 보고서가 쌓여있다.
"리화씨, 불법 대리모 미장원이요, 그 남동생을, 2층 서 형사님이 진술서를 받았어요? 어쩌다가?"
"그때 저희 다 안산에 갈때라서,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서 형사님이, 그 전에 탐문 겸 머리하러 가셨다가 그분하고 인사하고 그랬었다고, 시간 내 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문 형사가 끼어든다.
"둘이 나이도 비슷하고해서 살살 잘 꼬셨나부지. 쉽게 얘기 잘 했잖아, 문제될거 있냐?"
"있죠. 인원 없다고 자꾸 다른 팀에 손벌리잖아요. 이 사람 저사람 들어가면, 보고서도 복잡해지고.."
"강지율이 언제부터 보고서를 썼어? 맨날 시환이가 써주더니."
"제가 쓴거 아닙니다. 진우 선배가 써준거 저는 읽기만 하는 중입니다. 한자 섞이고 그러면 잘 몰라서.."
"한자가 섞일게 뭐.. 많어?"
"여기 이런거요... '타인의 면허를 도용한 무면허 의료행위를 추적, 적발하고'.. 아니면 여기.. '제한적 대리모 시술 뿐 아니라 그에 수반되어 출산 전후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음성적 불법/탈법 행위에 대한..' 으아아... 읽으면 뜻은 알겠는데, 이렇게 쓰지는 못하겠어요."
"외국에 오래 살아서 그렇지. 리화도 그러냐?"
"보고서에 쓰는 말은 좀 어렵습니다. 그것만 대신 써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거 좋네, 내가 할까? 보고서 대필.. 여기 앉아서 사무실 지키고, 전화 받고, 보고서 써주고.."
"찬호씨 데려오신다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달라 그랬는데, 서장님이 들은체도 안해. 안그래도 아랫층 시끄럽던데."
"홈피 모델 말씀하십니까?"
금시초문인 지율이 리화를 본다.
"아, 선배님 모르시죠.. 며칠 안계신 동안에, 지난번 민원 할아버지가 다시 오셨습니다. 이번에는 이찬호 순경을 우리 경찰서 홈페이지 모델로 쓰자고, 학생들이랑 동네 사람들한테 서명까지 받아서 제출하셨습니다."
시환이 덧붙인다.
"말도 마세요. 그래가지고 서장님 면담하고.. 경찰도 외모지상주의냐, 이쁘고 잘생긴 애들이 아니라, 정말 용산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써라.. 요새 맨날 오세요."
"의도가 나쁘지는 않네요. 찬호씨는 뭐래요?"
종태가 답한다.
"뭘 뭐라 그래, 할아버지 오면 도망 다니지... 걔 쓸만한데, 솔직히? 안그러냐? 리화! 우리 용산서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 누구냐?"
"이찬호입니다."
"지율이는?"
"찬호씨죠."
"제일 몸 좋은 사람?"
"이찬호!"
"이찬호!"
둘이 동시에 답한다.
"아, 뭐야, 결국은 또 외모 지상주의네?"
"야, 야.. 시환이 샘낸다, 칭찬 한번 해 줘라."
"시환씨는, 우리 용산서에서, 웃는게 제일 예쁜 사람."
지율의 말에 리화가 반박한다.
"예뻐요? 저는 선배님 되게 멋있는데? 웃을때는 애기 같은데, 범인 잡을때 보면 완전 달라요."
"오호, 류시환이가 선배님 소리를 듣네? 많이 컸다 ... 근데 쟤 범인 잡는지 얼마 안됐어. 너보다 덜 잡아봤을거야."
"왜 그래요? 체면 좀 살려주지, 막내 앞에서?"
"체면은 무슨.. 찬호 올라오면 넌 찬밥이야. 얼굴은 찬호한테 밀려, 몸은 은석이한테 밀려.. 어쩔래?"
"차 형사님 보고싶다.. 언제 와요? 밀려도 좋으니까 빨리 오지."
"멀었어. 한달은 쉬어야돼. 그래도 그 성질에, 다음주 쯤 쓰윽 나타나서 내근한다 그럴지도 몰라."
"누구 하나는 내근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밖에 있다가 뭐 필요한거 있으면 바로바로 보조해주고.."
"좋지, 아는데.. 밖에 일할 놈도 모자라는데, 팔자좋게 누굴 여기를 앉혀 놓냐. 나 같이 노땅들도 다 나가 뛰는데.."
시환이 일어난다.
"퇴근들 안 하세요? 저는 약속이 있어서.."
"가야지.. 아우, 벌써 며칠을 그놈들 때문에.. 강력은 오늘도 못 들어가지? 그 총, 에이그 그 놈.. 시환이 같이 내려가자. 가끔은 일찍일찍 들어가서 좀 쉬어."
"예...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가세요..."
종태와 함께 사무실을 나온다. 문을 닫고 나서야 조용히 묻는 종태.
"지율이는 같이 안 가고?"
"다른 사람하고 약속이 있어요, 선배도 좀 쉬어야 하고.."
"포기야? 아니면 강제 양보? 속상해서 술 먹냐?"
"아니에요, 술 먹을 돈이 어딨어. 둘이 잘 어울리잖아요... 아, 생각 안하고 잘 있었는데 끄집어내고 그래.."
종태가 웃는다.
"지율이가 결정하는대로 하는 거야. 야, 그래도 너네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누나 동생, 아니면 뭐.. 친구, 이런걸로 남을 수 있잖아. 좀 떨어져서 잘 지내면 되지. 속은 좀 쓰리지?"
"쓰려요. 아파서 막 뒤틀려요."
"잘 참네. 울고불고 못난이 짓 안하고.."
"삼촌은 했어요?"
"이 자식이, 뭘로 보고..!! 난 진짜 멋있게 보내줬지."
"뭐가 멋있어, 고백도 한번 못해보고?"
"그런 거 했으면, 나중에 만나서 이상하잖아. 안하길 잘 했어. 엄마 모르시지?"
"안물어 봐서 몰라요. 전화해서 물어볼까? 엄마, 종태 삼촌이 옛날에..."
"시끄러, 너! 빨리 약속 가!! 너 그 얘기 또 꺼내기만 해..?"
낄낄거리는 사이에 1층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기다리는 존 바울, 많이 수척해졌다.
"존!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요? 진짜 힘들었구나!"
"마음이 아파요. 내가 그런 바보 짓을 했다는게.."
"에이, 모르고 그런건데요, 뭐.. 조사는 잘 받구요?"
"거기 경찰들 나빠요, 화내고, 무섭고.. 얘기해도 안 믿고."
"그러니까 왜 그런 심부름을 해요, 모르는 사람한테? 큰일 날 뻔 했지. 들고 가다가 터졌으면 어쩔뻔 했어요?"
"택배 알바라 그래서 했다니까요.. 지하철 한번 타고 잠깐 왔다갔다 하는데 3만원이나 주잖아요. 내가 그게 폭탄인 줄 알았나?"
"안 다쳐서 다행이에요. 다음엔 하지 마요. 보이스 피싱도 많고, 정말 큰 거 덮어써요. 가요. 추운데, 뜨거운거 뭐 먹으러 가요. 순두부?"
"좋지요, 나 두부 먹어야되요. 감방 갈뻔 했으니까.."
크크크... 코트 자락을 여미며 둘이 주차장으로 나간다. 한 겨울, 바람이 차다. 열렸다 닫히는 유리문 옆으로, 새로 붙은 수배지가 펄럭 거린다. 엽총을 들고 편의점에서 콜라를 계산하는 총격범.. 어둠이 내린다.
16.1.2 다시 사무실 - 늦은 시간
리화도 퇴근하고 혼자 남은 지율이 소파에 앉았다. 코트를 돌돌 말아 팔걸이로 쓴다. 은석이 사 준 허리베게를 무릎에 올리고 멍 하니 앉았다. 택배로 온, 아버지의 일기장을 펼친다. 여기저기 페이지를 넘긴다..
/.. 창률이에게 진 빚이 크다. 돈으로 절대 갚을 수 없는 빚이다. 코 앞에서 자기 엄마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게 했다.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황 순경에게 하는 말을 들었을까.. 다친다, 장비 없이 들어가지 마라, 사람이 있었어도 벌써 죽었지.. 아이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게 어떤 감정으로 평생을 살고 있을까../
창률이 붙여놓은 쪽지를 펼친다. 같은 부분, 다른 이야기..
/아버지는 내 친엄마의 죽음이 자기 잘못이라고, 직무태만이었다고 자책하지만, 사실이 아니야. 난 그날 엄마가 죽는 걸 똑똑히 봤고, 그래서 도망쳤고, 뒤에서 불이 났어. 누구짓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일부러 하지 않았어. 난 아버지가 평생 나를 동정하고, 미안해하고, 불쌍해하면서.. 그래서 날 안타까워 해주길 바랬어. 있을 곳이 필요했고, 아버지가 필요했으니까../
창률은 중간중간, 아버지의 일기장에 나오는 내용에 답글처럼 간략한 편지를 끼워 두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지율에게 남겨주는, 마지막 선물이었을거다. 아버지의 일기를 몇장 또 넘긴다.
/수진이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은 언제봐도 좋다. 일을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난다. 소중한 내 아이들, 제일 소중한 아내.. 창률이가 잘 끼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 아프지만, 언젠가는 정말 가족처럼 함께 어울릴 날이 있을거다. 아내의 진심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죽은 친엄마에 대한 기억인지, 나에 대한 미움인지, 아내에게 잘 마음을 열지 않는 것 같다.../
창률의 답..
/어머니는, 정확히 말하면 너의 어머니는, 내가 꿈꿀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고 영광이었어. 사고 이후에 그룹홈에 들어가서 처음 만난 천사 선생님이, 날 구해준 경찰 아저씨의 부인이다.. 엄청난 우연인것 같지만, 사실 아버지가 날 일부러 어머니가 봉사 나가시는 곳으로 데려간 거야. 내가 원하던대로, 날 불쌍하고 특별하고, 자기 잘못 때문에 엄마를 잃은 불쌍한 아이다, 늘 미안해 하셨으니까.
어머니는 내가 어떤 애인지 몰랐어. 범죄로 갑자기 부모를 잃고 구조된, 어린 아이 정도로만 생각하셨겠지. 그렇게 어머니도 모르는, 아버지와 나만의 비밀이 된거야. 아버지는 차마 자기 입으로, 내 친엄마를 내앞에서 죽게 내버려뒀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끝까지 말하지 못했겠지. 정말 많이 아끼셨으니까.../
아버지
/창율이가 사춘기가 오는지 나하고는 눈도 안 마주친다. 세상을 미워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내 몸 사리느라 구조하지 못한 그 여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다면, 대신 아이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웠다 용서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시율이하고도 같이 있기 싫어해 혼자 지하실에서 지내는 아이가 불쌍하고 미안하고.. 고민이다. 시율이나 유리에 대한 질투인지.. 아니면 자기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걸 다 아는 나이라서, 시율이보다 자꾸 더 불편해 하는지... 가슴 아프다. 사과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잊었을지 모르는 옛날 일을 끄집어내 관계를 더 악화시킬까봐 겁이 난다. 비겁하다. 창률아, 네가 조금만 더 크면, 아버지가 정말 진심으로, 네게 용서를 빌께. 삐뚤어도 좋고, 화를 내도 좋다. 네 일 잘 하고, 평생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게, 당당하고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빠가 너를, 정말 열심히 응원한다../
창률
/아버지가 모르셨던게 있어. 나는, 한 순간도, 내 친엄마라는 사람을 좋아한 적이 없었어. 술집 여자.. 미아리 사창가의 처녀자리... 매일 취해서 나를 때리고 굶기고 내쫒던 마녀같은 여자. 내 기억은 그게 다야. 그 여자가 죽어갈때, 난 도와주지 않았어. 조용히 집을 빠져나와서 골목에 숨었어. 누가 그 여자를 죽였는지도 신고하지 않았어. 살인자 편을 든거야, 그 여자가 너무 싫어서... 네 아버지가 경찰 옷을 입고 내 앞에 섰을때, 나를 번쩍 안아들고 위로할때, 난 세상에서 처음으로 안도감이라는 걸 느꼈어. 이 아저씨하고 있으면, 이제 나는 안전하다, 아무도 날 아프고 배고프고 힘들게 하지 않을거다... 가족이 되고 싶었어. 다시는 혼자 남겨지지 않도록... 많이 노력했어. 방해되지 않게, 걸리적 거리지 않게.. 어렵게 얻은 새 가족을, 평생 오래오래 지키고 싶었어. 내가 끼면 어색할까봐, 불 꺼진 지하실 계단에 혼자 앉아서, 벽을 타고 들려오는 너희들 웃는 소리, 노래 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웃고 있었어. 나는 정말로, 그것만으로도 많이 행복했었어/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우가 들어온다. 일기장을 내린다.
"왜 혼자 있어? 집에 안가?"
"집이 있었나, 내가?"
"그래, 맞다.. 너 짐 같은 건 다 어디있어? 원주에 놔두는 거야?"
"거기도 좀 있고, 요 위에.. 학교 앞에 고시원 방 하나 있어. 방이 작아서, 필요한거만 놔두고 가끔 왔다갔다 해. 잠은 여기서 자거나.. 전에는 시환씨네서도 잤는데, 이젠 오라고 안 하네. 갈데가 없다."
"왜 없어? 우리 집 가면 되지. 가자."
"야근 안해?"
"여지껏 돌아다니다가 인제 들어왔어. 더 하면 죽을 거같애. 옷 입어, 나가게. 아, 이거.. 요 앞에도 팔더라. 사무실에 놔두고 먹어."
젤리를 내민다. 40개들이 대용량이다. 지율이 웃는다.
"진짜 많아! 좋다!"
"이거 다 먹으면 나랑 사귀는 거다?"
"뭐야, 그 유치한 맨트는?"
"알어? 이거 옛날에 영화에 나왔는데, 정우성이 소주 한잔 딱 주면서..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크.."
"정우성도 한잔 인데, 강진우는 40개나 줘? 자신있어?"
"아, 맞다.. 야, 이리 줘봐, 몇개 빼자. 너는 기억을 잘 못하니까, 이거왜 먹고 있는지 바로 잊어버릴거야. 내놔봐."
진우가 젤리를 뺏으려 한다. 피하는 지율.
"싫어, 내꺼야."
"한 열개만 해. 40개를 언제 기다려?"
"안돼, 나 요새 많이 돌아다녀서 자꾸 배고파."
"줘봐, 너무 많다니까.."
순식간에 진우의 팔 안에 갇힌다. 도망가려 하지만 꽉 안고 안 놓는 진우.
"안 줄거야. 나 싸움 잘 해."
"너 나 못 때려. 나 발 다쳤잖아."
"그런다고 못 때려? 더 잘됬지? 살짝만 밀어도 쓰러질걸?"
"이렇게?"
지율을 안고 소파로 넘어진다. 키득키득 웃으며 그대로 드러누운 두 사람. 진우 위에 편안히 누워 젤리 봉투를 연다.
"지금 먹어? 저녁 안 먹고?"
"보니까 배고파졌어. 무슨 색?"
"초록색. 저녁는 뭐 먹을까.. 먹고 싶은거 있어?"
초록색 젤리를 꺼내서 진우에게 내민다. 지율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입만 벌린다.
"까줘."
나머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손에 든 젤리를 깐다. 퐁..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촉촉한 물기가 빼꼼.. 손에 묻는다. 호록.. 살짝 입술을 댄다. 가만히 지켜보던 진우가 조금씩 긴장한다. 안고 있는 두 팔에 힘을 빼고, 천천히 지율을 놓는다. 혼자 일어나 앉아 손끝에 힘을 주고 조심조심.. 비닐 포장을 연다. 팔을 쭉 뻗어 누워있는 진우에게 내민다. 받지 않는다.
"... 됐어. 너 먹어."
"왜? 까 달라며?"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술을 모아 쪼로록 빨아 먹는다. 빨대처럼, 젤리가 빨려 들어간다.
"그거 줘. 너한테 묻은 거."
물끄러미 진우를 바라본다. 쪼로록... 호로록... 조그만 플라스틱 컵의 바닥을 누른다. 진우의 시선이 젤리 컵에 고정된다. 남은 젤리가 볼록 올라온다. 한번 더 호로록... 입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남은 설탕물 한 방울까지 입술에 떨군다. 그대로 몸을 낮춰 진우에게 입맞춤 한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마치 오랜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키스 한다. 일어서려는 지율을 당겨 다시 입을 맞춘다.
자신을 꼭 안고 누운 진우의 뺨을 쓰다듬는다. 쿵쾅쿵쾅... 단단한 가슴 아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쉬운 한숨으로 간신히 눈을 뜨는 그에게 묻는다.
"인제 무슨 색?"
진우가 푸흡 웃는다. 귀끝이 상기된다. 흘러내리는 지율의 머리를 뒤로 넘겨준다.
"효과 좋다.. 백개 안 채웠는데 벌써 여자가 됐어... 내 여자."
"거봐, 마늘 먹는 곰탱이보다 낫지? 신화가 좀 이래야지.. 그래서 무슨 색? 배고파, 빨리 말해."
두 팔에 힘을 꽉 주고 힘주어 안는다.
"나야 있는 색깔 다 하고 싶지. 근데.. 강 형사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돼요. 꼬시지 마세요.. 아하, 미치겠다.. 이대로 꼼짝하기 싫어.."
지율도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보챈다.
"그치? 나도 일어나기 싫어.."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진우. 지율을 억지로 일으킨다.
"야, 너 일어나. 너는 머리만 대면 자잖아. 빨리 일어나서 움직여. 집에 갈때까지 자면 안돼."
소파 끝으로 밀려 앉은 지율이 부시시한 머리를 정리한다.
"그럼 집에 가자마자 자?"
"아니, 그것도 안돼. 저녁 먹고, 집에 가서... 젤리 먹고.. 색깔별로 하나씩.. 다 먹어보고... 그러고 잘거야. 알았지? 일어나, 가자."
***
연말이라 불을 환하게 켠 한강을 지난다. 즐거운 대신, 길이 막힌다. 조수석에서 잠이 든 지율을 본다. 젤리 봉지를 무릎에 올리고 잔다. 손을 쭉 뻗어 지율의 손을 잡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자는 모습에 혼자 웃고 만다.
16.1.3 원주 창률의 집
스피커 폰 속의 종태가 흥분한다.
"너네끼리 뭘 하고 있다고? 야, 야! 괜히 남은거 훼손하지 말고, 정식으로 영장 받고 같이 해!"
"아무것도 안해요. 다 끝난 사건인데 뭘 해요. 한번 파보고, 진짜 있는지만 볼려구요."
"그러니까, 이 자식아! 그거 엄연히 미제 사건이야. 그냥 막 팠다가 덮는 그런게 아니라고!"
"내 땅 내가 좀 파보겠다는데 뭐가요? 삼촌만 신고 안하시면 되요. 마당 리모델링이다 생각하세요. 끊습니다."
각종 중장비가 동원된다. 인부들이 제각기 맡은 영역을 판다. 뒷마당 으슥한 곳부터, 안쓰는 창고 아래, 옛 비닐 하우스 폐기물 잔뜩 쌓아둔 곳 등... 벌써 반나절이 지나지만, 성과가 없다.
"이래가지고는... 마당이 너무 넓어. 이걸 언제 다 파고 있어?"
"생각을 좀 해보자. 집 안에다가 시신을 넣지는 않았을거야. 그랬다면 이렇게 크게 콘크리트를 깔지 않았겠지. 분명히 여기 어디다 묻었다는 건데.. 너무 넓어서 어딜 먼저 깨야할지도 모르겠어."
의자를 젖히고 앉는다. 종일 공사하는 소리에 시달려 귀속에서 고막이 굴러다니는 것 같다.
"저거 있잖아, 저 위에 별자리.. 처녀 자리라 그랬나?"
"맞아. 왜?"
"들어본거 같애. 송창률 친어머니가 하던 술집 이름이 처녀자리였어. 뭔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저렇게 한가운데에 묻었을까? 너무 복판인데? 보통 구석으로 숨기지.."
"여기가 원래 버섯 농장이었어. 비닐 하우스들이 여러개 있었으니까, 처음에 묻을 때는 그 중 하나 어디쯤에 구석이었을지도 몰라. 나중에 다 허물고, 콘크리트를 깔면서 저렇게 되었을지도.."
"그래, 까자.. 온김에 다 해봐야지."
진우가 가운데로 걸어가 별자리 장식등 아래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린다. 다시 인부들을 부른다.
드드드드드드...
다시 드릴이 돈다. 머리가 빠개지도록 흔들린다. 먼지, 소음... 힘들다. 집안으로 들어가 잠시 눕는다. 지난 밤 동안 읽은 창률의 편지를 회상한다.
창률
/아버지는 이제 더이상 일기를 쓰지 않으셔. 나는 계속 이어가야겠지. 네가 제일 궁금해 하는 거, 아버지가 차마 말씀 못하시니까... 그 놈을 찾았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놈이 있는걸 아버지가 아시게 되었어.
너 미국에 있는 동안, 나는 의사가 되었고, 대학 병원에 근무하는 걸 무척 자랑스러워 하셨어. 조그만 아파트에서 출퇴근을 시작했고.. 어느날 그 사람이 집앞에 와있었어. 내 친 엄마를 죽인 사람.. 내가 너무 어릴때라 기억을 못할거라고 믿었는지, 생활비를 달라고 하더라. 신고하겠다고 했지. 나도 성인이고, 싸울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싸워서, 이겨서, 영영 날 못 찾아 오게 하고 싶었으니까.../
******
십여년 전 창률의 아파트
"내가 왜 당신한테 돈을 줘? 난 다 봤어, 당신이 내 엄마 죽이는거. 그 몸에 기름 붓고 불 붙이는 거 까지.. 지금 당신 얼굴에 난 그 흉터, 그 가발... 그때 그런 거잖아. 난 다 기억해."
"기억해야지, 이렇게 똑똑한데. 의사 선생님이잖아. 내가 한가지 더 가르쳐 줄께, 똑똑하고 부자까지 될 수 있는 법..! 네 여동생 미국으로 입양갔고, 남은 자식 이제 너 하나야. 네 애비만 죽으면, 그 재산, 연금, 집.. 다 네꺼라고. 나? 많이 안 바래. 반씩 딱 나누고, 좋게 헤어지자. 절대 안 찾아올께."
"안 속아. 벌써 몇번째 같은 말이야, 다시는 안 찾아올께, 다시는 돈 달라고 안 할께!! 다시는 협박 안 할께!!!"
"나보고 어쩌라고? 그 경찰 새끼가 내 어머니를 살살 꼬득여서 나를 장기 가출로 신고하게 했어. 주민등록 말소 시켜서 지구상에서 없는 사람 만들어 놨다고! 그렇게라도 해서 내가 제발로 관공서 찾아가게 하려는 수작이었지. 나 잡아 넣을려고! 나도 안 속아. 애당초 경찰 같은 건 상종하는게 아니야."
"내 아버지 건들지 마. 절대 네 손에 돌아가시게 하지 않아."
"흐흐...늦었어, 지금쯤 다 왔을거야. 내가 너한테 가보라고 했거든. 전화도 안받고, 네가 좀 아픈것 같다고.."
"뭐? 무슨 생각이야? 당신 정말 미쳤어?"
"너 원래 네 아버지 전화 안 받잖아. 크흐흐흐... 그걸 좀 이용했어. 말했지? 내가 너 부자 되게 해줄께, 오늘 당장."
벨 소리가 난다. 문을 두드린다.
"창률아, 안에 있니? 아빠다, 문 열어봐!"
놈이 살금살금 문쪽으로 다가간다. 창률이 못가게 몸싸움을 한다. 안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안에 있으면 문 열어? 옆집 아저씨가 전화했어. 너 어디 아픈거 같은데 문도 안 연다고... 무슨 일 있는거야? 어디 다쳤어?"
점점 격해지는 몸 싸움에 창률이 바닥으로 데굴데굴 구른다. 투닥거리는 소리에 더 불안해진 기환이 경비실에 전화를 하려고 하는데 문이 열린다. 현관으로 들어선다. 다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창률.
"창률아!"
달려가는 기환을 뒤에서 내리찍는다. 놈의 칼을 피한다. 맨손으로 격투를 벌인다. 강력계 수년차 베테랑이지만, 상대는 흉기를 가졌다. 있는대로 휘두르며 위협한다. 칼날이 스친 곳에서 피가 흐른다.
"우리 송 형사님, 녹슬지 않았네? 아직 잘 버티십니다? 아, 이제는 교수님이신가?"
"뭐하는 놈이야? 뭔데 우리 창률이를 공격해?"
"우리 창률이? 당신이 뭔데? 진짜 애비라도 되는 줄 알어? 내가 창률이 애비야, 진짜 애비! 네가 주민등록까지 말소 시키고 유령 만든 이영만이!"
"이영만?"
"그동안 우리 아들이 생활비도 좀 보태주고 해서 그럭저럭 살았는데, 이제 나이도 먹고 해서 안되겠어. 당신이 모아둔 거 좀 내놔, 내 새끼 훔쳐가서 그동안 잘 산 값 받아야겠다고!"
"돈 때문에 이렇게 까지..?"
"교수님이 죽어줘야 우리 애가 유산을 받지! 우리 둘이 다 짠거야, 당신 이리로 불러들일려고.."
"아버지, 아니에요! 믿지 마세요!"
"넌 시끄럽고, 오늘 여기서 당신 죽자. 안 힘들게 한번에 보내줄께, 마누라 있는데로 가라."
이영만이 덤빈다. 옆으로 피해보지만, 어깨를 심하게 찔리고 쓰러진다. 야수처럼 덤벼드는 이영만, 엎치락 뒷치락 사방으로 피가 튄다. 한번, 두번... 주먹이 날아오고, 정신을 잃어가는 기환의 피날레를 꿈꾸며 칼을 높히 치켜든다. 뒤에서 창률이 덤빈다. 놈의 팔을 잡고 비틀어 칼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곧 놈에게 맞고 나가 떨어진다.
"이 새끼가 지금 누구 편을 들어? 너도 오늘 날 잡아야 정신 차릴래?"
쓰러진 기환 대신, 창률을 덮친다. 사정없이 내리친다. 안경이 날아가고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다.
"내가, 이 자식아, 너 부자시켜 준다고, 네 엄마랑, 네 동생 놈이랑, 다 죽이고.. 그때도,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그 놈은 내가 올라타서, 이렇게, 주먹말고, 칼로, 팍! 팍! 팍!..."
이영만이 푹 꼬구라진다. 창률이 손에 쥔 칼을 비틀어 놈의 옆구리를 찢는다. 배에 올라앉아 늘어져가는 놈의 몸통에서 해부학 차트를 그린다. 여기는 소장, 여기는 대장... 갈비뼈 아래로 살짝 돌려 깎으며 아래로 5센치에 위치를 잡는다. 세심한 각도로 기울여 위로 반듯하게 올려 꽂는다. 칼 길이 대략 15센치, 반만큼 들어갔으니 7센치... 이정도면 담낭도, 쓸개도.. 간도.. 끝이다. 잘 가라, 정말로.. 다시는 돌아와서는 안 된다... 마지막 힘을 다해, 놈을 밀어낸다. 불쾌한 피를 닦는다...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기환, 눈앞의 광경에 할말을 잃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벽에 기대어 앉은 창률, 그리고 그 앞에 배를 활짝 열고 누운 이영만... 숨을 확인한다. 맥이 없다.
"창률아! 다쳤니?"
"아니요, 괜찮아요. 다 됐어요. 이제 아무도 없어요."
기환이 바닥에 떨어진 칼을 잡는다. 손잡이를 바지에 닦고 자기 손으로 꼭꼭 눌러 잡는다. 지문을 묻힌다.
"내가 한거야, 넌 아무것도 안했어. 알았지?"
"아버지...?"
"저놈이 널 따라다녀서, 나랑 싸우다가 내가 죽였다고. 넌 아무것도 안했어, 다쳐서 가만히 앉아있었어.. 아니다, 너 퇴근하고 오니까 나랑 이놈이랑 이러고 있었어, 그게 낫겠다, 알았지? 전화해. 신고하라고!"
"안돼요, 제가 한거에요, 이리 주세요."
"아니야, 너는 안돼. 나는 다 했어, 다 살았고, 다 잃었고.. 너는 아직 행복해야돼. 내가 한거니까, 우리 그렇게 가자."
신고를 하려고 전화기를 찾는 기환, 번호를 누르려는데 창률이 울부짖는다.
"안돼요!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이에요! 이 놈이에요... 어머니 죽이고, 시율이 죽인 놈!"
손을 멈추고 창률을 본다.
"이놈이라구요! 중학교때 절 찾아왔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몇번이고 시율이 죽인다고, 유리 유괴한다고.. 저 대학 갔을때도, 시율이 죽인다 그래서.. 돈 빌려서 카지노 갖다 주고 시율이 데려왔어요.."
"그러고도 다음 겨울에, 또 우리집까지 가서 그 사람을, 죽였다고...?"
창률의 뺨으로 눈물이 흐른다. 피가 섞인 시뻘건 눈물이 흘러 내린다.
"원래는 아버지 겁 주려고 집앞에 숨어있었대요... 근데 중간에 문이 열려서... 어머니가 소리 지르니까 시율이가 뛰어나오고.. 그래서.."
창률이 오열한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제가 이 인간 아들이라서..."
"아니야! 누가 너보고 이런 놈 아들이래? 넌 내 아들이야. 이런 놈 몰라... 자수하자.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대신, 아까 말한대로 내가 죽인거야. 정상 참작 될 수도 있어."
창률이 눈물을 닦는다.
"아니요, 전 아버지 아들이에요. 그렇게 안해요.. 발 좀 들어주세요."
"뭐?"
"욕실로 옮기고, 정리해요. 치울 수 있는 거 다 싹 치우고.. 이 놈은, 어디 모르는데에 다가.. 할머니 댁 비어있죠? 일단 거기로 옮겨요. 지금요."
"창률아?"
"어차피 서류에도 없는 놈이에요. 전과 때문에 평생 숨어다녔어요. 가족도 저 밖에 없고.. 없어져도 아무도 안 찾아요. 숨겨요..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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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릴 소리가 멈췄다. 지율이 밖을 내다본다. 진우가 인부들을 돌려보낸다. 잠바를 걸치고 마당으로 나간다.
"왜? 없어? 오늘은 그만 할까?"
인부들이 멀어지는걸 확인하고, 진우가 장갑을 낀다. 보호 안경을 쓴다. 드르르르르.... 다시 시작되는 드릴 소리... 걸음을 옮겨 그가 파고 있는 곳을 들여다 본다. 중간중간 뚫어 놓은 주먹만한 구멍 안으로 흙바닥이 드러난다. 서서히 네모난 귀퉁이가 모습을 보인다. 여행 가방.. 찾았다. 처녀자리 아래 콘크리트 마당을 깨 부수고, 20년만에, 그 놈과 재회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