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하여
가끔 고전 문학작품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방대한 양의 책을 과연 내가, 문학전공도 아닌 사람이, 얼마나 제대로 소화해서 내놓을 수 있을지, 흠씬 겁을 집어먹고 금새 마음을 접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권을 읽던 중 문득 고전 작품에 대해 완전한 소개 글이 아니라, 그냥 책 어느 부분에서 내 가슴이 심하게 일렁이는 순간, 그 빛나는 순간을 담아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도 모르게 내 두 눈이 바투 쫓아가던 길 위에 그대로 멈춰 서, 가만히 책을 덮고 눈을 들게 되는 그런 순간을. 그럴 땐 프루스트가 건네는 비밀스러운 말들이 내 뇌 회로 속 피톨기를 급격하게 추동시키거나, 또 때론 아주 미세하나마, 마치 새로운 회로라도 뚫으려는 듯 요동치게 했다.
사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건,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일 게다. 지극히 왜소한 나의 사유가 감히 맞짱이라도 뜰 것처럼 위대한 작가와 동렬의 수준에까지 날아올라 장렬하게(?) 부딪쳐 푸르른 불꽃을 길게 내뿜는 그런 순간 말이다.
이런 순간을 ‘고전에서 별을 따는 순간’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겨울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나는 까치발을 하고 책장 맨 위 칸에 장병들처럼 늘어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열한 권 중 첫 권을 뽑아 들었다. 한 해가 끝날 때마다 지병처럼 도지는 허탈한 마음에, 조금은 도피의 심정으로 책을 잡았다. 십 년 전쯤 대충 한번 읽었지만, 지금 다시 보면 느낌이 또 다르리라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지방의 작은 대학, 정년을 한 학기 앞둔 시점이었다. 앞을 내다보기 보다는 곧잘 과거를 되돒아보게 되는, 녹록치 않은 나이였다. 계절로 보자면 겨울 초엽, 하루로 보자면 이제 막 어둑해진, 아니 이미 어두워진 시점에 도달한 셈이다. 창가 테이블 앞에 앉았지만, 아직 책을 펼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본다. 이 세상 가장 커다란 캔버스를 황홀하게 가득 채우던, 눈부신 투명 은빛 햇살도, 불타오르는 색색 빛깔의 향연도 이제 다시는 직접 대면할 수 없을, 그런 시점이다.
바라건대 앞으로는 외부의 빛이 아니라 안에서 비추어주는 혜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더불어 이젠 시선을 안으로 돌려 내 바깥의 사람들보다는 내 안의 사람을 좀 더 관찰하며 살아가기를.
그리하여 부디, 어둠 속에서 비로소 날기 시작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같이 휘황한 눈빛을 갖게 되기를. 탁해진 두 눈엔 맑고 밝은 총기가, 회한으로 너덜해진 심장엔 정제된 평정심과 겸허한 자족감이 그득하길 감히 빌어본다.
그리하여 이 세상 떠나는 날, 가슴 위에 반듯하게 두 손을 모운 채 ‘이제 됐다’고 읊조릴 수 있기를. 마치 해야 할 지상의 일을 모두 마치고, 편안하게 두 눈을 감았던 임마누엘 칸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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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대 후반에 이르러 그동안의 부박했던 생활을 정리하고, 드디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구상하기 시작한 마르셀 프루스트. 이 책은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로 시작하는 일인칭 소설로 기존의 소설책 중 가장 자전적인 소설이라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프루스트는 자기가 살아온 시간의 흐름이 곧 ‘자기의 삶’이자 바로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삶과 자기 자신을 밝히기 위해 자기가 살아온 시간을 되살리는 길을 걷게 되는데, 그 무수한 세월을 내려다보는 순간 ‘자기 발 밑 -사실은 자기 안에서 이지만-에 마치 몇 천 길의 골짜기를 굽어보는 듯’ 현기증을 느낀다.
그는 이 느낌을 마치 ‘쉴 새 없이 계속 커 가는 살아 있는 장대 다리 위에서 너무 위태로워 걷지도 못하고 겨우 걸터앉아 있는’ 듯한 형세에 비유하고 있다. 계속 커 가는 장대처럼 시간은 잠시도 멈추지 못하고 흐르는데, 프루스트는 이 시간의 흐름을, 그 무수한 길목에서 굽이굽이 굽이쳐 흐르는 물굽이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려 시도한다.
프루스트는 19세기 말, 당시 프랑스 파리의 바이러스 감염 퇴치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의학박사인 아버지와 유태계인 엄마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록 태생부터 몸과 마음이 유약했지만 유복한 환경에서 교양이 넘치는 할머니와 엄마의 따사로운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유난히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프루스트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별다른 직업 없이 주로 예술 감상과 연애에 몰두하며 살다가, 생을 마감하기 불과 몇 년 전부터 창작에 몰두하기 시작해 단 하나의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남겨 놓고 생을 마감했다. 파리 유명 사교계의 총아였던 그가 일체의 사회생활과 대인 관계를 끊고, 두꺼운 커튼과 코르크로 햇빛과 소음을 차단한 채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감행함으로써 이루어낸 성과였다. 이때 이미 그는 중병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그가 자기 생명을 예술 작품과 맞바꿔버렸다는 평을 받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주인공 마르셀이 어느 날 우연히 차를 마시며 먹은, 마들렌 과자의 맛과 향에서 생생하게 기억이 되살아난, 어린 콩브레 시절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리하게나마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그는 어린 시절엔 부모의 친지인 스완의 딸 질베르트를, 좀 더 커서는 재치와 미모의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흠모하게 되는데. 이후, 할머니와 함께 휴가를 간 바닷가에서 알베르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알베르트의 동성애적 기질을 의심하는 마르셀은 급기야 그녀를 파리의 자기 집에 데려와 남들 눈에 뜨이지 않게 기거하게 만들고. 그래도 여전히 알베르트에 대한 번민으로 고통을 받던 그는 결국 이별을 결심하는데. 바로 다음날 알베르트가 아무 말 없이 떠나버린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정신없이 그녀를 수소문 하던 중, 기어이 그녀의 낙마로 인한 사망 소식을 전해 듣는다.
일차 세계대전 전후, 요양원에서 나와 오랜만에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살롱을 가게 된 마르셀. 옛 지인들 모습에서 시간의 위력과 그 실체를 간파하고 커다란 감회에 젖는다. 이어 옛 친구 생 루가 전사했다는 사실과 성인이 되어버린, 그의 딸의 눈부시게 아리따운 모습을 보고, 거역할 수 없는 삶의 순환이라는 법칙 앞에서 전율한다. 이제 자기 앞에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낀 마르셀. 지금부터 새로운 창작에만 몰두하리라 결심한다.
성공한 부르조아의 아들인 프루스트는 당시 프랑스 사회에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떨치고 있는 상류사회 사람들의 삶, 특히 아름다운 귀족 부인들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사교계를 열심히 드나들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적 소양을 키우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교계의 어두운 면을 날카롭게 직시하기도 한다. 길지 않은 인생에서 끊이지 않고 아름다운 여성들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에 탐닉했던 그였기에 일부 평자들은 그를 속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인간이 동물인 한, 다시 말해 죽을 때까지 욕망을 쫓아 살아가는 존재인 한, 인간이 속물적 속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프루스트를 단순히 평범한 속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대부분의 우리들처럼 속물이었지만, 너무나 심미적이고,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면밀하고 냉철한 분석가였다. 그러니까 굳이 규정을 하자면, 나는 프루스트를 지적인 심미적 쾌락주의자로 부르고 싶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듯 지적인 심미적 쾌락주의자였던 그가 말년에 자기의 생명을 갉아먹을 정도로 고된, 그러니까 육체적 쾌락과는 거리가 먼, 예술 작업에만 몰두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심리적 비약을 이루게 된 배경엔 분명히 건실한 생활윤리를 가지고 살았던 엄마와 할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심리가, 그러니까 뭔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일을 해야 한다는 책무감이 작용한 게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잃어버린 시간들을 다시 찾고자 하는, 그의 문학에 대한 열망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까 그는 육체적 욕망을 과감히 버리고, 지적이고 심미적인 쾌락, 그러니까 정신적 욕망을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몇 천 길의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듯 지나온 세월들을 되돌아보았을 때 프루스트가 느낀 건, 바로 자기가 살아온 시간의 흐름이 곧 ‘자기의 삶’이자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기가 실제로 살아온 삶을 다시 발견하고 밝혀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한다. 자기가 살아온 삶이란 물론 이미 지나가버린, 잃어버린 시간이다. 이리하여 프루스트는 이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복원해 내려는, 목숨을 건 작업에 과감하게 뛰어든다. 흘려버린 시간은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이기에 사실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냥 흘려버리고만,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명확히 지각해내고 형상화해내는 작업은 이렇듯 자기 자신을 비로소 되찾는 길이며, 이러한 예술 작업만이 비로소 그가 평생 추구했던, 그의 진정한 삶의 의미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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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을 한 학기 앞둔 시점에서 되돌아보니, 현재의 나를 만든, 초라하기 그지없는 몇 가닥 길들이 얼핏 설핏 보인다.
그 중, 비록 희미하긴 하지만 내가 걸어온 학자로서의 길 위에도 아찔한 순간들이 참 많았다.
여고 시절,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를 맞아 입시 공부에 정신이 없는 아이들 사이에서 홀로 경쟁 위주의 입시 제도를 거부(?)하며 망연자실하다 기어이 신경정신과의 문을 두드리던 날.
힘겹게 철학과를 들어갔지만 학과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가위눌리듯 지낸, 회색빛 나날들.
박사학위 받는 과정에서 짓밟혀진 자존심 때문에 관악에서 전주까지 내내 차오르는 눈물을 닦으며 겨우 운전하고 내려오던 날.
장장 십구 년 만에 드디어 시간강사 생활을 청산하고, 교수들 앞에서 첫 인사말을 하는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던 눈물 등등.
생각건대 실날 같이 가느다란, 나의 학자로서의 길을 지금까지 그런대로 잇게 만든 건, 바로 인문학이 갖는 근본 힘, 즉 인간과 인간의 삶을 규명하고픈 열망이었지 않나 싶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나갈 때, 그러니까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수많은 행동을 이어갈 때 우리는 내가 한 행동들이나, 내가 살아낸 하루, 또 내가 그 속에 살고 있는 환경은 물론, 한 걸음 더 들어가 인간이란 존재나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쁘고, 자기 욕망을 추구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말했듯 ‘우리의 이기심이 자기에게 소중한 앞쪽의 목표를 항상 주시하고 있지만, 그 목표를 끊임없이 지켜보는 나 자신은 결코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하루하루가 이렇게 그대로 지나 삶을 마감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인간 존재와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간다고 할 수 있을까?
마치 염소가 자기가 먹은 음식을 다시 입안으로 끄집어내 곱씹듯이,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우리가 살아온 행적을, 내 몸 속에 저장된 그 무수한 행위들을 다시 의식 위로 끄집어 올려 다시 곱씹어 보려는 시도이다.
우리가 학교나 직장에 가려고 발걸음을 바삐 움직일 때 우리는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는 풍경에 눈 돌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어둠 속 영화관 좌석에 앉아 주인공이 열심히 행동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화면 속 주인공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인공의 욕망과 그가 처한 환경을 두루 관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나를 닮은, 주인공의 삶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 그리고 인간성에 대해 두루 생각해 보게 된다.
이처럼 평소에 우리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막상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과 인간이란 존재,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깊은 인식에 도달하려면, 문학 같은 인문학적 작업을 통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과 나 자신에 대한, 진정한 정신적 소유를 조금씩 이루어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프루스트가 말했듯이 예술을 통해 귀중한 덤까지 얻을 수 있다.
‘예술 덕분에, 오직 하나의 세계, 곧 우리 자신의 세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늘어나가는 세계를 보고, …… 무한 속에 회전하는 숱한 세계 이상으로 서로 다른 세계를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