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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숙 Oct 21. 2022

동물적 욕망과 자존심의 이중주

   -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하여

  코로나 때문에 이, 삼년 못 만났지만, 여전히 흔들림 없는 우정을 간직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다. 주로 고등학교 일, 이학년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로 직장 생활과 육아로 연락이 뜸하다가 여고 졸업 30주년을 맞아 다시 의기투합해 뭉치기 시작했다. 십 년 전부터는 가끔 부부동반 여행도 해왔다. 그러다 보니 더 관계가 돈독해졌다. 

  귀중한 내 자산 중 일부인 이 친구들은 확실히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많이 다르다. 누가 하나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단점이 드러나도, 서로 시새움할 만한 일이 생겨도 이런 것들이 우리 사이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거의 가족 같은 느낌이다. 아니, 때론 가족보다 관계가 더 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한 인간의 생애에서 고등학교 시절이 갖는 의미가 중차대하다고 생각되는 건,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내가 철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여고 시절 나에게 강한 인상을 준, 두 분의 선생님 덕분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달달 외워야 하던 입시 위주의 수업에서 ‘양적 축적에 의한 질적 비약’과 ‘정-반-합’ 등의 변증법 원리를 설명해주시던 물리 선생님의 수업은 겉으로 드러나는 무수한 현상들 그 너머에서 이것들을 움직이는 원리를 깨닫게 해줌으로써 생전 처음 지적 희열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고, ‘규칙적으로 운행하는, 깜깜한 밤하늘 위 별들’과 ‘내 가슴 속에 들어있는 숭고한 도덕률’을 발견할 때마다 무한한 전율을 느낀다는 칸트를 윤리 선생님이 소개해주셨을 땐 내 마음도 똑같이 출렁거렸다. 

  두 분의 강의는 그 당시 막막하게 꿈을 찾아 헤매던 나의 심장을 철학이라는 신세계로 곧장 뛰어들게 해주었다. 내 주위로는 온통 귀밑까지 바투 자른 검은 머리를 푹 숙인 채 입시 공부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뿐이었던 교실에서 한 순간 거칠 것 없는 머나먼 푸르른 창공으로 나를 훌쩍 들어 올려주었던 강의였지 않나, 싶다.

  시끌벅적한 시장 뒷골목, 우리 집엔 다행히 내 몸 하나 겨우 누일 만한 다락방이 있었다. 비록 별 하나 볼 수 없이 답답하기 그지없는 공간이었지만 동네를 가득 채우던 소란이 침범하지 못하는, 나만의 해방구였다. 책 읽기와 공상하기엔 안성맞춤의 공간이었다. 엉성하고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기우뚱 올라가 침침한 전등 불빛 아래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남몰래(?) 누워 읽던 기억이 새삼 새롭다. 

  한껏 기대를 갖고 철학과에 들어갔지만 막상 철학 수업은 내 흥미를 크게 끌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대학 시절을 생각하면 캠퍼스 하늘 가득 우중충한 회색빛 하늘이 먼저 떠오른다. 추라도 매단 듯 무거운 심신을 이끌고 내려올 때마다 눈에 들어왔던 풍경이었다. 캠퍼스를 빠져나오면 곧장 학교 앞 서점에 들어가 책을 한 권 사서 집으로 향하던 날들이 많았다. 물론 손에는 철학책이 아니라 문학책을 들고 있기 일쑤였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나에게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지혜를 선사해 준 것도, 또 나에게 최고의 지적 열락을 선사해준 것도 철학책이 아니라 문학작품, 특히 고전들이었다.     


                                                                                              *


  서로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은 톨스토이의 삶과는 아주 달랐다. 방대한 영지를 가진 지주이자 명문혈통의 귀족이었던 톨스토이와는 다르게 가난한 소지주인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난 도스토예프스키는 대학 졸업 후 전업 작가를 직업으로 선택함으로써  평생 지식인 프롤레타리아 신분으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분에 대한 열등감과 도박으로도 벗어나지 못한 가난이란 질곡 이외에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외모 콤플렉스와 주기적으로 찾아왔던 간질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더욱이 이십 대 한창 예민한 시절, 사회주의적 경향을 띤 금요일 모임에서 벨린스키의 불온한 편지를 읽었다는 죄목으로 끌려간 그는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형 선고를 받게 되는데,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갑작스러운 황제의 특사로 극적으로 살아나, 그 뒤 사 년을 다시 감옥에서 지내게 된다. (황제는 불온한 젊은이들을 혼내주기 위해 일종의 ‘처형 쇼’를 꾸몄다고 한다.)  

  이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귀족과 평민, 죽음과 삶, 가난과 부, 명예와 치욕, 건강과 질병 등 양 극단 사이에서 위태로운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불운했던 환경과 극적인 체험은 그의 문학 세계를 톨스토이와는 완전히 다른 문학 세계로 이끌었다. 방대한 영지를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관리하면서 러시아의 당면 과제들을 고민하고, 동시에 인간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까지 깊이 파고들어갔던 톨스토이와 다르게 인간으로서 품위 있는 삶을 허락하지 않았던 가난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두운 세계 속 사람들의 내면을 천착해가면서 선과 악의 문제와 치열하게 씨름했다.     

  그 결과, 톨스토이의 인물들이 대체로 자기만족적인 귀족들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주어진 자기 삶의 조건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톨스토이가 급박한 현실적 문제에서 벗어나 좀 더 높은 위치에서 합리적인 시각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그려냈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가혹한 삶의 조건들 속에서 자기 욕망을 위해 진흙탕 싸움을 벌이며 끝없이 좌절하는 인물들을 형상화시켜 냈다. 

  그 과정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톨스토이의 인물들이 경험치 못한, 인간 심리의 수면 아래 숨어 있는, 거대한 비합리적 측면을 드러낸다. 그의 인물들은 대부분 과도하게 탐욕적이거나 절제를 모르고 폭력과 범죄를 범하는 등 극을 향해 치닫는다.  


  그런데 이처럼 지나치게 격정적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동시에 자의식이 매우 강한 기질의 소유자들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이전의 문학작품들에서는 만난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인물 유형을 만나게 되는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스스로 어릿광대임을 자처하는 아버지 표도르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표도르는 임종을 앞둔 조시마 장로를 만나기 위해 여럿이 함께 암자 앞에 도착하자 갑자기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좌중의 신성한 분위기를 망쳐놓는다.

 

  “그러니까 어쨌거나 암자에서 마님들한테로 갈 수 있는 뒷구멍이 있다는 거로군요. 성스러운 신부님, 제가 무슨 속셈이 있어서 이런다고 생각지는 마십시오. 그저 그냥 그렇게 말해 본 것뿐이니까요. 그나저나 아토스 산에서는 말이죠, 신부님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여자의 방문은 물론이고 어떤 생물체건 여자 딱지가 붙은 것은 죄다 금지된다더군요. 암탉이고 암칠면조고 암송아지고 할 것 없이…… ” 


  이어 표도르는 자기를 꾸짖거나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들을 향해 자기가 어릿광대짓을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따금씩 가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해 대는 건 사람들을 웃겨 볼 요량으로, 기분을 풀 요량으로 그러는 것입니다. 기분은 좋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헤헤”


  이처럼 표도르가 일부러 상황에 맞지도 않는 말을 하면서 사람들을 웃기는 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자기에게 집중시키고 싶어 하는 자의식의 산물이다. 물론 표도르는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이 때와 장소에 걸맞지 않고 어리석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는 그럴 때면 더욱 더 일부러 어릿광대의 역할을 맡아하게 되는 이유를 실토하고 있다.   


  “정말이지 사람들 앞에 나갈 때 그 즉시 다들 나를 아주 사랑스럽고 똑똑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리라 확신이 서기만 한다면, 오! 그렇다면 저는 얼마나 착한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이처럼 표도르가 의도적으로 어릿광대짓을 하는 건 그가 매우 강한, 그러나 비뚤어진 자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차피 자기가 사람들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질 바에야 그걸 무마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을 한층 더 밀고나가고 싶어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갈 때까지 가보고 싶은 욕구를 멈추지 못한다. 결국 표도르의 어릿광대짓은 좌절된 자존심의 비뚤어진 표현으로, 일종의 비합리적인 자학 행위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우리는 표도르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 심리가 비합리적으로 작동하는 한 측면을 알게 되는데, 한번 접하면 잊지 못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단어가 바로 수치심 혹은 치욕이란 단어이다. 수치심이란 감정은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자존심, 일종의 귀족들의 자긍심에 비견할 수 있는 감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감정으로, 예민하고 자의식이 강한 자들이 곧잘 느끼게 되는 정서이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이 대체로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자기 욕망을 충족시켜 나가기 때문에 자기 모멸을 경험하지 않는 반면에, 도스토예스키의 인물들은 비우호적인 환경 속에서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사사건건 타인들의 욕망과 정면으로 부딪치기도 하고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하는데, 이때 격정적이고 자의식이 강한, 그의 인물들은 곧잘 격렬한 자기 혐오, 즉 수치심에 빠져들고 만다. 알료샤를 제외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하나같이 수시로 심각한 열등감과 극단적 자만심 사이를 오간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방대한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큰아들 미챠를 예로 들어 보자. 미챠는 태어나자마자 자식을 내팽개친 아버지 표도르가 오래 전에 돌아가신 자기 엄마가 남긴 땅으로 10만 루블을 챙겼으면서도 이미 정산이 끝났다며 더 이상 한 푼도 주지 않으려 하자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하필이면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호색한인 표도르가 정신 못 차리고 빠져 있는 그루셴카에게 미챠 역시 한순간 반해 버리고 만다. 자기 감정을 잘 억제하지 못하는 미챠는 분에 못 이겨 한순간 아버지를 두들겨 패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루셴카에 대해서는 더없이 순결한 사랑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미챠는 이미 아름답고 부유한 카첸카와 약혼한 상태인 몸이다. 미챠는 카첸카가 다른 이에게 송금해 달라고 부탁한 3천 루블을 아직 보내지 않고, 반은 그루셴카를 위해 이미 유흥비로 써버린 상태이다. 그는 그루셴카와의 새로운 삶을 꿈꾸며 나머지 천오백 루블을 옷 속에 숨기고 다니지만, 그 전에 어떻게 해서든 돈을 구해 3천 루블을 채워 카첸카에게 갚으려고 한다.  

  아버지 표도르가 3천 루블을 봉투에 넣고 그루셴카가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미챠. 그루셴카가 돈을 보고 올까봐 아버지의 집 근처를 지키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머지 돈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비열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한다. 

  ‘먼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카첸카가 애칭인 그의 약혼녀)에게 3천 루블을 갚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좀도둑이고 야비한 놈이다. 야비한 놈이 된 채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지 않다. … 아무리 그래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그녀의 돈을 훔쳐서 그 돈으로 그루셴카와 착한 삶을 시작하기 위해 도망을 쳤다고 말할 권리를 주는 것보다는 낫단 말이다! 그런 건 참을 수 없다!’


  “그루셴카를 생각해 돈을 가슴속에 꿰매 넣고 다니면서 시시각각 ‘너는 도둑놈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바로 이 때문에 요 한 달 내내 흉포하게 굴었고 술집에서 주먹질을 했고, 아버지를 쥐어 팼으니, 이게 다 스스로를 도둑놈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라니까요.”


  결국 미챠는 카첸카에게 3천 루블을 돌려주지 못한다면, 자기의 양심을 이토록 짓누르는 치욕을 걷어 내지 못한다면, 남는 건 파멸과 자살뿐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이처럼 미챠는 때로 자기 감정을 절제 못하고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그건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에서 오는 고통으로 인한 것이라는 게 흥미롭다. 이처럼 그는 누구보다 강한 자존심의 소유자로 현실적인 자기 욕망과 자존심의 이중주가 빚어내는 대표적인 도스토예프스키적 인물이라 하겠다.    

 

                                                                                          *


  어찌 보면 문학의 역사는 새로운 인간유형의 발굴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간의 어두운 본성은 19세기 말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본격적으로 탐구해 들어가기 이전까지 거대한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의 문학은 상위 1%에도 미치지 못할, 위대한 인물들을 주로 주인공으로 삼아왔다. 물론 그들도 실패하고 좌절하지만, 그들의 욕망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것이며, 그들의 의도는 대체로 숭고하고 훌륭하다. 20세기 초 프로이드 심리학이 밝혀내기 이전에 이미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커다란 욕망의 덩어리인지, 인간 사회가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욕망들이 충돌하는 장(場)으로서 얼마나 큰 혼란과 갈등을 품고 있는지를 탐구자의 시선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


  큰 아들 미챠가 사랑했던 두 여인, 약혼녀 카첸카와 그루셴카의 캐릭터를 비교해 보면 도스토예프스키가 파악한, 인간성의 독특한 측면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카첸카는 미챠가 방탕하게 살던 젊은 시절, 그 지역 제일가는 인물 중 하나였던 중령의 딸로 수도의 한 귀족 학교를 졸업하고 온,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가 상부의 미움을 사 부정 혐의를 받게 되어, 공금 4천 5백 루블을 내놓지 않으면 재판에 회부될 상태에 처하게 되자, 큰 용기를 내 미챠를 찾아온다. 그 당시 마침 아버지 표도르에게서 6천 루블을 받게 된 미챠는 갑자기 그녀가 보여준, 자기 아버지를 위한 고결한 희생에 대비된 자기 자신의 초라함을 느끼고 순간적으로 그녀를 증오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똑같은 이유로 그녀에 대한 사랑에 빠져 아무런 대가 없이 5천 루블짜리 무기명 수표를 꺼내준다.  

  하지만 이후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 중령인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자, 카첸카는 가까운 친척에게서 거금을 상속받게 된다. 그녀는 미챠에게 바로 돈을 갚고, 미챠에 대한 격정적인 사랑을 편지로 고백하고 두 사람은 약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약혼을 한 뒤, 미챠는 자기가 카첸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게 바로 카첸카거든,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관대한 이념에서 무서운 모욕의 위험을 무릎 쓰고서 겁도 없이 졸렬하고 거친 나를 찾아왔던 여학생이라고. … 하지만 그건 그 여자의 오만함, 모험에 대한 욕구, 운명에 대한 도전 때문이기도 하지. ‘난 모든 걸 정복할 수 있다. 모든 건 내 발밑에 복종하게 마련이니까.’ 이런 식인데 그녀는 ‘자기 자신의 몽상’에, 자신의 미망에 반한 거야.”


  이러한 카첸카에 대한 미챠의 견해는 막내 동생 알료샤의 생각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알료샤 역시 카첸카와 같은 성격의 사람은 원래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해야만 되는 사람이라고 보고 있다. (이전에 큰 형 미챠의 심부름으로 카첸카를 만나게 된 이반은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반하고 마는데, 알료샤는 그녀가 군림할 수 있는 상대란 오직 미챠와 같은 사람이지 절대로 둘째 형 이반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이처럼 고압적이고 오만함이 넘치는 카첸카와는 달리 그루셴카는 안에 커다란 상처를 갖고 있는 여인이다. 어린 나이에 한 폴란드 장교를 만나 함께 살다가 오 년 전에 그로부터 버림을 받은 그루셴카는 무엇보다 자기가 받은 모욕으로 인해 지옥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는 말이야, 알료샤, 지난 오 년간의 내 눈물을 무서울 정도로 사랑해 버린 거야. … 어쩌면 내가 사랑한 건 오직 나의 모욕일 뿐, 그 사람은 전혀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이처럼 자존심의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그루셴카는 아버지 표도르와 큰 아들 미챠를 유혹하는 등 다른 사람들까지 괴롭히는데, 만약 다시 그 폴란드 장교를 만나게 되면 그에게 복수를 하리라는 마음을 먹고 그에게서 연락이 오기만을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다.  


  “정말이지 난 홧김에 당신들 모두를 죽도록 괴롭혔던 거야.”

  “그가 나를 버렸을 때 나는 열일곱 살의 바싹 여위고 병약한 울보에 불과했어. 그래, (만약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그의 곁에 바싹 붙어 앉아서 그를 유혹하고 완전히 애를 태워 버릴 거야. ‘지금 내가 어떤 모습인지 잘 봤겠지만, 뭐 그래도 그냥 그러고 있어. 친애하는 나리, 콧수염을 적실 뿐, 입 안에 집어넣진 못할 테니까.’ 라고 말할 거야. 자, 바로 그러기 위해 내가 이렇게 차려입은 건지도 몰라.”


  이제 성인이 다 된 그루셴카를 처음 만난 알료샤의 내면의 소리를 통해 그루셴카의 모습을 살펴보자. 풍만한 몸에 나긋한 몸놀림, 감미로운 목소리, 풍성한 머리카락, 짙은 눈썹에 푸른 회색빛 눈 이외에도 가장 인상적인 그녀의 모습은 바로 어린애처럼 티 없이 맑은 표정이다. 또한 그녀는 기쁨에 찬 얼굴로 지금 꼭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 쉽게 믿어 버리곤 어린애처럼 참을성 없는 호기심과 기대를 그대로 내보이고 있는데, 알료샤에 따르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마디로 말해 찰나적인 아름다움, 바로 러시아의 여성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잠시 스쳐가는 아름다움의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토록 기다렸던 폴란드 장교와의 만남은 그녀에게 커다란 실망만 안겨주었다. 그루셴카는 자기가 겨우 저런 사람을 그토록 사랑했다는 사실 앞에 경악하는 한편, 자기를 위해 야밤에 마차를 대절해 모크로예 마을까지 찾아와 준 미챠의 순정을 통해 그의 인간성을 알아보게 되고, 결국 그의 순결한 사랑을 받아들인다.        

  “나는 바보였어. 이런 사람 때문에 그토록 스스로를 괴롭혔다니.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분해서 스스로를 괴롭혔던 거야 . … 내가 그렇게 괴롭혔어도 용서해 주는 거지? 정말이지 난 홧김에 당신 모두를 (미챠와 그의 아버지 표도르) 죽도록 괴롭혔던 거야.” 

  “난 당신(미챠)이 짐승 같은 구석이 있지만, 그래도 고결한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어. … 우리 둘 다 떳떳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는 거야. 짐승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 되자.”


  미챠라는 인물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소설 뒷부분에 나오는, 예심판사와 검사 앞에서 한,  본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비열한 짓들을 저질렀지만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고결하기 그지없는 존재였으며 … 다름 아니라 고결함을 갈망했기 때문에 평생 고통스러워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루셴카 역시 미챠와 마찬가지로 원래 경멸을 참지 못하는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로 누군가가 자기를 경멸한다는 의식이 조금이라도 들라치면, 그 즉시 분노에 사로잡혀 반격을 가하려는 욕망으로 발끈 달아오르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예민하고 남달리 강한 자존심의 상처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기에 때론 주위 사람들에게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내면 세계만큼은 순결함을 간직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에 달리 카첸카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타인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진 자로 그루셴카와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은 이반의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즉 카첸카에 대한 이반의 사랑은 돈과 미모, 또는 귀족 혈통이라는 현실적인 계산이 배제되지 않은, 다시 말해 이미 순결하지 않은 사랑이다.

  미챠와 그루셴카의 많은 악행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순정한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문학은 인간의 내면 세계를 깊이 파헤쳐 우리에게 열어 보여준다. 그런데 서로 다른 개개인의 내면 세계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살이에서 주로 외적인 것들, 예컨대 외모나 부, 권력이나 지위 등에 의해 엄청난 지배를 받기 때문에, 다양한 인간들의 내면 세계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는 아마도 돈 많은 귀족 혈통의 카첸카가 한 남자에게서 버림받은 여성인 그루셴카보다 훨씬 더 각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내면에 있어서 카첸카보다 그루셴카가 훨씬 더 가치 있는 여성임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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