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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숙 Oct 21. 2022

선과 악의 경계

   -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하여

  손을 내밀면 닿을 듯 창밖 이파리들이 더없이 싱그럽다. 투명한 햇살이 초록빛 속살을  그대로 통과하는 오월의 아침, 잎새들이 살랑거린다. 부드러운 하늬바람이라도 불고 있는가,  반짝반짝 작은 미소를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다.

  이따금 남편과 주말에 찾아오는 코티지(오두막) 까페 이층 구석 테이블 앞 유리창을 통해 본, 바깥 풍경이다. 이제 막 성장기를 통과한 듯 커져버린, 잎새들 저 너머로는 바리섬 (놋쇠로 만든 여자의 밥그릇인 바리를 거꾸로 놓은 모양이라는 의미의 섬 이름)을 중심으로 맑디 맑은 옥정호가 주위 산들로 겹겹이 감싸인 채 침묵하고 있다.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풍경이다. 기다란 사각형의 유리창 넓이로 잘려진 풍경으로, 그래서 더욱 멋지다.     

  이제 고전 소설이라도 한 권 펼쳐 읽다가 눈을 들어 창밖 신록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면, 이 세상 부러울 게 하나도 없다. 나에겐 이게 바로 지고지순의 열락의 시간이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는가, 사십 오년 전, 퀘퀘하고 어두침침한 다락방에 누워 책을 읽던 때와는 많이 다르다. 

  대학원에 들어갈 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대로 철학을 전공할 것인가, 아니면 좋아하는 문학 쪽으로 방향을 바꿀까, 기로에 서 있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민주화라는 절박한 과제 앞에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났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토록 바라던 박정희 정권의 몰락이 거짓말처럼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다니, 그저 어리벙벙해 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광주항쟁을 무참히 짓밟고 정권을 장악하고 말았다.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그동안 세월 좋게 나 개인의 실존적 고민이나 하고 있었던 나 자신을 심하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언가 미력하게나마 사회에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나, 하는 자각이 강하게 일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한계도 분명했다. 결국 대학원에 가서 진보주의적 입장의 사회철학을 전공해 이론적으로나마 사회에 기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나 자신의 복지와 이익을 우리 사회 전체의 복지와 이익에 일치시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  


  오늘날 우리는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콘텐츠를 소비하며 살고 있다. 숱한 영화나 드라마에 빠져들어 주인공의 희노애락에 동참한다. 그런데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 빠져드는 것은 그 작품 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갈등이 나의 상황이나 갈등과 동일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곧잘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예를 들어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재벌들의 삶에 몰두하곤 한다. 물론 그런 현상은 부분적으로는 나와 다른  삶에 대한 호기심이 작동한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허구적 삶에 몰두하는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비록 그들의 삶이 나의 삶과 무관하다 할지라도, 즉 외적인 동질성이 없다 할지라도 정서적인 측면에서 작품 속 인물들에게 내적인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살면서 느껴온 일정한 정서를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경험하는 정서에 투영함으로써 그들에게 공감하게 된다. 예컨대 작품 속 재벌들이 경험하는 질투와 경쟁, 비열한 행위나 희생적 행위 등을 볼 때 그동안 내가 살면서 느껴온 질투심과 경쟁심, 연민이나 증오 등의 정서를 다시 불러내면서 작품 속 인물들에 빠져든다.


  작품의 감상, 즉 작품의 수용 과정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면, 예술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은 이와 정반대의 과정으로 설명 가능하다. 작가는 자기 자신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조건 속 인물들을 그려내지만, 그 인물들이 부딪치는 갈등들은 바로 작가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핵심적 내용으로 갖고 전개되는 갈등들이다. 즉 작가의 외적인 삶은 작품 속 인물들의 삶과 전혀 동일하지 않지만, 작가가 첨예하게 느끼고 있는 문제의식은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갈등이 품고 있는 핵심 내용과 내적인 의미에서 동일한 것이다. 

  삶과 죽음, 가난과 부, 명예와 치욕 등 양 극단의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살아온 도스토예프스키가 맞부딪친 문제는 바로 인간의 욕망 충족 행위가 허용될 수 있는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렇듯 선과 악의 경계의 문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집요하게 다룬 주제로, 그의 마지막 작품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주제의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흥미롭게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선, 또는 악이 구현된 정도의 순서에 따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주요 인물들을 화려하게 형상화시켜 놓았다.   

  다소 무리하게나마, 선(善)의 정도 순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을 정렬해 보자면, 최고의 선을 구현하고 있는 막내아들 알료샤, 인간적 고뇌의 전형인 큰아들 미챠, 이론적 고뇌의 전형인 둘째 아들 이반, 동물적 욕망의 화신인 아버지 표도르, 자 의식을 갖고 직접 몸으로 악을 실현하는 이복동생 스메르쟈코프의 순으로 배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여기에서 미챠와 이반의 순서에 대해 고민이 제일 많았다. 미챠는 아버지를 때리는 등 소소한 악행을 하긴 했지만, 살인과 같은 진정한 악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사람은 이반이라는 점에서 미챠를 앞자리에 놓았다.)             


                                                                                          *

  

  부자간의 재산과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다툼, 그리고 존속살해라는 자극적 소재와 누가 진범인지 모르게 엎치락뒤치락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성 때문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훨씬 박진감 있게 읽히는 작품이다. 게다가 작품 속 인물들의 개성이 더없이 강렬하고 인상적인데, 알료샤를 제외한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병적이라 할 만큼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과민한 자존심의 소유자들이다.

  먼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지방 도시의 지주인 표도르 카라마조프에게는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미챠,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반과 알료샤, 이렇게 세 아들이 있는데,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내팽겨진 상태로 외지에서 남의 손에 자라나 성인이 된 상태다. 한편 그들의 이복동생인 스메르쟈코프는 표도르와 마을에 떠도는 백치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표도르의 하인 부부가 길러주었고 현재 하인 신분으로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아버지 표도르 집에서 서로 만나게 된 세 아들, 그중 표도르에게 가장 골칫거리는 큰아들 미챠(드미트리)이다. 미챠는 아버지 표도르가 그루셴카를 꼬시기 위해 삼천 루블을 마련해 놓고 그녀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걸 알고 그녀를 빼앗길까 봐, 아버지 집 근처에서 그녀가 언제 오나 호시탐탐 망을 보고 있지만, 막상 그루셴카는 오년 전에 자기를 버렸던 연인의 급작스런 부름을 받고 모크로예 마을로 떠나버린다.

  이 사실을 모르고 아버지 집에 그녀가 있다고 착각한 미챠는 흥분한 상태에서 놋쇠 공을 집어 들고 아버지 집 담장을 넘어 아버지 방 창문 앞에 이른다. 

  하지만 아버지 집에 그녀가 없다고 확인한 미챠. 하필 이때 마침 잠에서 깨어난 하인 그리고리가 그를 발견해 그에게 다가가자 미챠는 하인의 머리를 놋쇠 공으로 내리치고 달아난다. 결국 그루셴카가 간 곳을 알아낸 미챠는 그곳을 찾아가지만, 이후 표도르가 피살된 사실을 알게 된 경찰은 그곳까지 찾아와 미챠를 체포한다. (다행히 하인 그리고리는 무사하다.) 

  소설 속 여러 가지 정황들이 큰 아들 미챠가 진범일 거라는 가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결국에 가서는 하인 신분으로 자라난 스메르쟈코프가 진범임이 밝혀지지만, 재판은 미챠의 유죄 선고로 종결된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주인을 살해한 것과 유사하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내면에서 겪는 선과 악의 갈등의 문제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알료샤와 이반의 논쟁을 통해 확대 재생산된다. 달리 말하자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전형적인 러시아인으로 보았던 미챠를 중심으로 선행의 화신인 알료샤와 악행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이반이 양쪽에서 자기의 입장을 놓고 갑론을박한다. 

  알료샤는 존재하는 모든 것, 그리고 현존하는 모습 그대로의 인간을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는 자이다. 심지어 타인으로 인해 고통을 받을 때에도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용인하는 자이다. 실제로 알료샤는 모든 사람들이 다 경멸하는 아버지 표도르에게도 언제나 상냥하고 자연스럽고 솔직담백한 애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표도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아들이기도 하다. 이처럼 모든 이들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며 적절한 충고와 위로를 아끼지 않는 알료샤를 누구나 예외 없이, 심지어 무신론자인 이반까지 진심으로 사랑한다. 

  알료샤는 원래 수도사가 되려 했지만 사랑하고 존경하는 조시마 장로가 임종을 앞두고 권고한 말에 따라 속세로 나오는데, 그가 풀려고 하는 가족 간의 갈등의 매듭은 단단하기만 하다.

   

  한편, 어린 자식들을 모두 내팽개쳐버리고 돈을 혼자 거머쥔 채 자기의 육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는 아버지 표도르의 무한정한 탐욕과 미챠의 자기욕망을 향한 거친 질주는 둘째 아들인 이반 같은 지적 냉소주의자에게 인간과 세상에 대한 회의를 품기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회의는 곧바로 이러한 인간과 세계를 창조한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는데, 특히 아이들처럼 힘없고 죄 없는 이들에 대한 어른의 학대 행위는 그의 무신론적 입장을 더 강화시킨다.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창조한 세계를, 신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야.”

  “만약 아이들마저도 이 지상에서 끔찍할 정도로 고통 받고 있다면, 그건 물론, 그들의 아버지들, 선악과를 먹어 치운 그 아버지들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 셈인데 … 죄 없는 자가, 그것도 아이들처럼 그렇게 죄 없는 자가 다른 사람 때문에 고통 받아서야 되겠어!”

 

  이러한 입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반은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이나 악마의 존재를 창조한 것으로 파악하면서 인간처럼 야만스럽고 사악한 동물의 머릿속에 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떠오를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인간의 위엄을 살려준다고 말한다.

 

   “내 생각으로, 악마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악마를 창조해 냈다면,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형상과 모습에 따라 창조했을 거야.”


  이러한 입장에서 이반은 인간이 느끼는 양심이란 바로 ‘인류가 7천 년 동안 지속시켜온 전 세계적인 습관’일 뿐이고, 이 습관을 버리면 우리가 신이 되는 거라고 말한다. 또한 이반은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하는 알료샤에게 인간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고 저급하게 창조되었기에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은 이반의 논리에 맞서 알료샤는 논리보다 삶 자체에 대한 사랑이 먼저임을 강조하면서, 그래야 비로소 삶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거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

  “삶을 그것의 의미보다도 더 많이 사랑해야 된다?”

  “반드시 그래, 형 말대로 논리에 앞서, 반드시 논리에 앞서 삶을 사랑해야 하고, 그때야 비로소 삶의 의미도 이해하게 될 거야.”


  또한 알료샤는 이러한 이반의 무신론적 입장이 ‘결국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냐, 고 묻고 있는데 이반은 이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반의 이러한 무신론적 견해는 이복동생인 스메르쟈코프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한한 존재인 신이 없다면, 선행 같은 것도 전혀 없고, 아니 그 경우엔 그런 건 아예 필요도 없다고…”       

  이리하여 스메르자코프는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함으로써 자기의 견해를 몸소 실천해 보인다. 그런데 그의 부친 살해는 그의 삶에 대한 혐오감에서 나온 것이고, 이 혐오감은 그의 모욕 받은 자존심에서 나온 것인데, 이 상처 난 자존심은 또 궁극적으로 그 자신의 처지, 즉 사생아로 태어나 간질병을 앓으며, 하인 신분으로 사는 비참한 처지에 기인한 것이다.                          

           

                                                                                        *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머리 아플 정도로 고민했던 적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도 젊었을 적 동네 교회에 열심히 나간 적이 있고,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놓고 토론을 많이 했던 적이 있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수많은 논리들, 그리고 이 논리들에 대한 무수한 반론들, 또 이에 대해 이어지는 논박들, 그리고 또 그에 대한 반론들 … 지겨울 정도로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이런 관념적 논의들보다 나를 교회로 이끌었던 건 항상 현실적인 어떤 필요들이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친한 친구가 같이 가자고 하니까 별 생각 없이, 또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또는 또래의 남학생들을 볼 수 있어서, 또는 뭔가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등등.

  어쨌든 현재의 나는 무신론자이다. 

  어떤 이는 이 세계의 놀라울 정도로 조화로운 운영을 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게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글쎄, 자연 세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인간 세계가 지금껏 멸망하지 않고 나름 균형을 유지하는 건 신의 도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수많은 인간들의 작은 선행들과 소수 인간들의 놀라운 자기 희생이나 용감한 헌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사회는 매순간 위기의 연속이고, 사회에 악을 행하고 혼란을 야기하는 행위는 늘 일어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크고 작은 선한 행위들이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사회를 순화시킨다. 또한 자연 세계의 조화와 균형은 자연 세계가 일정한 보편적 법칙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인데, 자연 세계 역시 아주 긴 시간을 놓고 보면 충돌과 파괴를 겪어온 것이며,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또 내가 기독교적 신의 존재를 긍정하기 힘든 건 기독교가 내포하고 있는 시대적 한계에서 오는 특수성 때문이다. 예컨대 희랍 시대의 신은 결코 유일신으로서의 기독교적 인격신이 아니라 허다한 인간적 단점을 갖고 있는 신들이다. 또 동양 사회에서의 신이나 아랍의 신은 기독교적 신과 분명히 그 내용이 다르다.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신앙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시대나 모든 사회를 통틀어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기에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역사상 수많은 악행들이 십자군 전쟁처럼 기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졌다.

    

  근대 철학자들은 자연 세계가 인과적인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만물의 인과적 시발점, 또는 원인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상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과학적 의미에서의 신 개념은 결코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창조주 하나님과는 다른 개념이다.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존재는 무엇보다 인격신이다. 즉 인간의 여러 인격적 특성들이, 그중에서도 특히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진, 선, 미, 또는 의지 등과 같은 특성들이 신이라고 하는 하나의 완벽한 인격체 안에 모아진 존재이다. 

  여태까지 존재해 왔던 인간들, 또는 우리 주위의 인간들을 살펴보면 드물게나마 하나님에 가깝게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또 악마처럼 느껴지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바로 자기가 경험한, 자기 주위의 인간들의 모습에서 하나님, 또는 악마의 존재를 생각해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포이에르바하가 말했듯이 기독교적 인격신은 인간이 자기의 여러 특성들을 하나의 존재 속에 반영시켜 낸 결과가 아닐까? 즉 신이란 ‘인간의 관념의 집합체’이고, ‘신학의 비밀은 바로 인간학’이 아니겠는가.  

  우리 현대인은 어쩔 수 없이 이미 실증과학과 보편주의의 세례를 받은 세대이다. 따라서 현대인은 실증과학의 검증과 보편주의 원리를 벗어나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무신론적 입장을 가장 잘 압축적으로 표현한 문장은 아마도 프랑스 실존주의자 장 폴 싸르트르의 다음과 같은 명제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믿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고, 따라서 우리가 굳이 선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스메르쟈코프의 주장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신이 없다면 선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신이 존재해야 선행을 할 필요가 있다는 걸 의미하는데, 그건 곧 악을 행했을 때 죄를 벌하는 신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행은 어떤 보상을 바래서나 처벌을 회피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선행은 그저 그것이 옳기 때문에, 또는 그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또는 마음에서 기꺼이 우러나와서 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이 선행을 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행을 할 필요가 없는 것도 아니다.

  매우 흥미롭게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알료샤는 이반의 논거에 논리로 맞서지 않는다. 이반의 무신론적 논거와 알료샤의 사랑의 원리 사이에는 가교가 없다. 그 사이에는 깊고 깊은 심연만 가로놓여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려는 건 사랑만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기쁨을 선사해 주고, 그저 그것이 높은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숭고한 권리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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