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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숙 Oct 21. 2022

순정과 허영 사이

   -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에 대하여

  인터넷을 켜자 최근 5년간 금융권에서 임직원이 불법으로 빼돌린 돈이 일천 억 원에 이른다는 뉴스가 뜬다. 모두 몇 명인지는 모르나 그들은 거의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건 도박을 벌인 것이다. 성공하면 로또처럼 대박이 나지만, 성공하지 않으면 자기 삶이 끝장난다는 걸 알면서 그 가능성이 바늘구멍만큼 밖에 안 되는 일에 뛰어들다니. 그들 각자에게 과연 어떤 사연들이 있었던 것일까. 그들을 그 행위에 몰아넣은 사연들과 주위 인연들까지 모두 다 끌어모으면 엄청 악취 나는 쓰레기 더미가 될 것이다. 그들에게 몇 백억 원까지 되는 돈이 다급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생계의 문제라기보다는 허영심의 문제였을 테니까.   

  며칠 전, 한 지인에게서 초등학교 시절 아들과 같은 반 친구였던, 한 아이의 가족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 가족은 당시 우리와 같은 아파트에 살았기에 이따금 단지 안에서 만나면 인사하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곳에서 이사한지 오래 돼 소식을 전혀 몰랐었는데, 치과의사였던 아들 친구의 아버지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가족의 사정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그 지인의 말에 따르면 남편이 노쇠한 자기 부모에게 돈을 보내는 걸 늘 못 마땅하게 생각하던 부인이 자기도 모르게 남편이 숨겨 놓은, 일억 원을 발견하자 대판 싸웠고, 그 뒤 얼마 있다가 변고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돈은 아주 힘들게 살고 있는 자기 누이를 도와주려고 그 의사가 모아두었던 돈이었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돈을 잘 버는 치과의사였다. 공부 잘 하는 두 아들도 있고, 그런 변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가고 있을 가족이었다. 그런데 그런 의사가 자기 돈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아내 몰래 돈을 숨겨 두었다는 것도, 또 부부싸움이 자살로까지 이어졌다는 것도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부부관계의 주도권을 이렇게 아내가 일방적으로 쥐고 있었다는 건, 결혼 전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하게 만들어 지인에게 물어봤더니, 학창 시절 아내가 의과대학생이었던 남편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었다고 말한다. 조금은 이해가 됐지만, 두 사람의 내밀한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다만 아들 친구의 엄마가 꽤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는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지인이 덧붙이기를 그 의사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이해받지 못하는 게 제일 외로운 법이니까,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자살을 하기까지의 그의 마음이 얼마나 시렸을까, 남의 일인데도 이미 한참 지난 일인데도 가슴이 너무 아팠다.  


                                                                                           *


  이제 우리는 이런 사연쯤은 너무 비일비재해 별다른 느낌도 갖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실 이런 류의 비극은 역사 이래 인간 사회에 늘 존재해 왔다고 보는 게 맞는 말일 게다. 돈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막강한 위력을 휘둘러 왔다. 다만 부에 대한 민감도가 시대에 따라 약간의 부침이 있었을 뿐. 부에 다가갈 현실적 수단이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경우에는 부에 대한 관심이나 욕망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귀족 사회와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 하층 사람이 부를 탐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일 것이다.  

  발자크가 살았던 19세기 초 프랑스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사회 전체 구성원의 부에 대한 민감도가 높았던 시대였다. 1789년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 왕정복고와 구귀족의 재등극 등 대혼란을 겪은 프랑스 사회는 7월 혁명을 통해 금융과 산업 자본주의 체계로 재편되었다. 7월 왕정(1830~1848)을 이끈, 시민 왕 루이 필립은 일반 시민의 권리보다는 산업과 금융 자본가와 같은 상층 부르조아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체제를 만들어놓았다.

  대혁명으로 신분제 사회가 무너지자 이제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을 하면 전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부를 자기도 거머쥘 수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비록 귀족처럼 부와 명예, 권력을 다 가질 수는 없다 할지라도 부의 획득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사실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부에 대한 민감도를 엄청나게 자극했다.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인 고리오 영감은 바로 곡물업을 통해 부를 거머쥔 부르조아이다. 그는 열심히 일해 모든 돈으로 사랑하는 큰 딸을 명문귀족에게, 둘째 딸을 신흥금융 귀족에게 시집보내는 데 성공한다.

     

  돈이 인간 삶에 끼치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문학작품이 돈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경우는 꽤 드물었다. 19세기 프랑스 리얼리즘의 거장인 발자크는 바로 이 돈 문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삶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가이자 최고의 작가이다.  

  실제로 발자크 자신이 평생 빚쟁이에게 쫓기는 삶을 살았다. 그는 젊은 시절 사업 실패로 엄청난 빚을 지게 되는데, 그 후 하루 열 시간이 넘는, 초인적인 글쓰기로 평생 그 빚에 대한 형벌을 받았다. 흥미롭게도 사업에 실패할 때마다 그의 과도한 상상력은 그를 점점 더 큰 사업 구상으로 몰아가 그를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게 했다. 처음엔 그저 양서를 시리즈로 출판하는 사업에 투자를 했다가 손해를 보자, 아예 출판사를 인수하고, 또 그 다음엔 인쇄소, 또 그 다음엔 활자제조업에까지 손을 뻗치다가 빚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는데, 놀랍게도 그는 이런 와중에서도 엄청난 양의 글을 써냈다. 하기야 글도 쓰기 전에 늘 선불로 돈을 당겨썼던 그에게 다른 방도가 없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절제 할 줄 모르는 야심만만한 정력가인 발자크는 <인간희극>이라는 전무후무한 대작을 욕심내게 된다. 

  발자크는 <인간희극>을 통해 현실 세계에 대응하는, 거대한 또 하나의 우주를 건설하려고 했다. 즉 한 작품에 나온 등장인물들을 다시 또 다른 작품에 등장시키는 등, 한 작품에 다른 작품들을 서로 연결시켜 단계를 올려가면서 하나의 거대한 전채를 구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계획은 작가의 죽음으로 87편의 작품에 그친 미완의 기획으로 그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번역물은 그 중 십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된다.)

  이렇듯 야심 찬 작업은 작가 나름의 근본적인 세계관과 인간관이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발자크는 초기 사회 경험들을 통해 현재 프랑스에서는 도덕 같은 것은 없고, 성공만이 모든 행동의 원인이라는 것, 현대사회의 법의 정신이란 진정한 신이 아닌 황금송아지일 뿐임을 통찰한다. 그 결과 현 시대는 더 이상 ‘명예의 원칙이 아니라 돈의 원칙’에 의해 움직여지고, 사회란 ‘피 대신 돈이 순환하는 신체’임을 작품 속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기에 발자크의 작품 속에서 처음부터 악인으로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개인적인 상황이나 사회적인 요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심을 버리고 자신의 살길을 모색하는, 체스판 위의 말들과 같은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이렇듯 발자크는 표면적인 사회현상들 배후에 사회를 움직이는 숨은 힘들을 탐색했고, 작품 속 인물들의 구체적 행동 동기를 보여주기 위해 그들이 살아온 배경, 현재 처한 상황, 심지어는 건강 상태와 주거 환경까지 섬세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발자크 문학의 리얼리즘적 특성은 루카치와 같은 사회주의적 문예 비평가들로 하여금 그의 문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만든 주요요인이 된다.  

  이처럼 발자크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움직이는, 숨은 원리를 예리하게 통찰해냈다. 그런데 필자는 그것 못지않게 발자크 문학의 위대성을 그가 보다 본질적인, 인간 삶의 모순들까지 발견하고, 이를 자기 시대의 속성을 통해 극명하게 작품 속에 표출해낸 데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가 단순히 리얼리즘 작가가 아닌, 위대한 리얼리즘 작가인 이유이다.        


                                                                                           *

  

  시골 출신의 스무 살 라스티냐크는 파리에 유학 와 지독한 속물인 보케 부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에 살면서 옆방의 고리오 영감을 알게 된다. 당시 파리는 센 강을 중심으로 귀족 계급이 화려한 살롱을 여는 대저택이 밀집한, 좌측의 생제르맹 구역과 신흥 금융 부르조아 계층이 사는, 우측의 쇼세당탱 구역으로 양분된 상태이다. 그런데 파리 상류층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하는 라스티냐크 앞에는 선택할 수 있는, 두 개의 길이 놓여 있다. 밤낮으로 공부하고 오직 자기가 일한 대가로 돈을 버는, 느린 방법과 귀족 부인의 사랑을 얻어 출세를 하는, 직선 코스가 그것인데, 라스티냐크는 결국 두 번째 길을 선택한다. 

  하지만 사교계에 입문하기 위한 재력과 수완이 부족한 라스티냐크. 수소문 끝에 겨우 알아낸, 자기의 먼 친척 누이인 보세앙 자작 부인을 통해 파리 사교계에 입문하려고 결심한다. 

  그러나 사교계에 등장하기엔 자기의 모습이 너무 보잘 것 없다는 걸 아는 라스티냐크. 시골집에 있는 엄마와 누이에게 각각 편지를 써 그들의 피 같은 돈을 얻어내 드디어 멋진 모습으로 사교계에 입성하게 된다. 한편 보세앙 부인은 그동안 오래 사귀어온 포루투칼 귀족 다주다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는데, 사교계 그 누구에게서도 이해나 위안을 구할 수 없던 참에 라스티냐크에게서 더할 나위 없는 헌신과 자상함을 발견하고 그를 사심없이 도와주려 한다. 

  보세앙 부인 덕택으로 고리오 영감의 둘째 딸인 델핀을 알게 된 라스티냐크. 그는 아름다운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데.


  한편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는 일개 평범한 직공이었던 고리오는 혁명의 와중에 희생된 주인의 자산을 사들여 파리의 곡물 값이 엄청나게 오르자 큰돈을 벌게 된다. 아내가 죽고 더욱 더 두 딸에게 애정을 쏟는 고리오. 기어이 큰 딸 아나스타지는 명문가 레스토 백작에게, 둘째 딸 델핀은 대은행가 뉘싱겐에게 시집을 보내는 쾌거를 올린다. 하지만 딸들과 사위들은 그가 계속 일 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아 그만 두게 되는데, 사위들이 그를 집에 모시는 걸 싫어해 하숙집에 투숙해 있는 상태다. 처음엔 제일 비싼 하숙집 이층에 거주했지만, 현재는 하숙비가 제일 싼 사층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연봉이 5만 프랑이나 되는 남편을 둔, 큰 딸의 빚진 약속 어음을 갚아 주기 위해, 그리고 아내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는 남편 때문에 고통 받는 둘째 딸의 몸치장을 위해 자기가 갖고 있던 돈을 거의 다 탕진한 상태다. 현재 그는 딸들의 하녀들에게서 딸들의 외출 시간을 알아내어 먼저 샹제리제 거리로 나가 기다리거나 무도회에 갈 시간에 잠깐 딸들을 보는 거로 만족을 하고 있다.

  둘째 딸 델핀은 처음엔 외도하는 남편을 자극하기 위해 라스티냐크의 연정을 받아들이다가 차츰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데, 델핀의 가장 큰 관심은 언니 아나스타지가 속해 있는 최상류층 살롱모임에 초대받는 것이다. 하지만 사교계 생활에 빠져들면서 점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라스티냐크. 그의 상황을 알게 된 고리오 영감은 괘씸한 사위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갖고 있는 남은 돈으로 라스티냐크를 도와준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딸 델핀, 즉 뉘싱겐 부인이 아버지를 찾아와 남편의 사업이 파산할 지경이라며 남편이 자기의 지참금을 내놓으라고 한다고 말한다. 지참금을 자기에게 넘기면 라스티냐크와의 관계를 허용해 주겠다는 말과 함께. 절대 그 말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고리오 영감은 극도의 분노를 느끼는데,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큰 딸 레스토 부인이 찾아온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도박으로 진 빚이 10만 프랑이라며 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까지 하려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남편 집안의 다이아몬드와 자기 것을 모두 팔아 겨우 고비를 넘겼는데, 이제 와서 남편이 자기 다이아몬드를 찾아보더니, 그게 없어졌으니 이제 당신의 재산을 매각하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했다고 말한다. 돈이 다 떨어진 고리오 영감은 자기가 이제 딸들을 도울 수 없는, 쓸모없는 인간에 불과하다며 비탄에 빠진다.

   

  딸들의 비참한 결혼 생활에 충격을 받은 고리오 영감은 기어이 장액성 뇌일혈로 쓰러지고. 라스티냐크는 다른 의학생과 둘이서 영감을 돌보다가 둘째 딸 델핀과의 약속 때문에 그녀를 만나 아버지의 위급한 상황을 전하지만 그녀는 파리 사교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보세앙 부인 집에서 열리는 만찬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편 포르투갈 귀족인 다주다는 그동안 사귀었던 보세앙 부인을 따돌리고 돈 많은 로슈피드 양과 그날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파리 시내에서 유일하게 보세앙 부인 본인 한 사람뿐인 상황이고, 파리 사교계 사람들은 과연 오늘 보세앙 부인이 만찬에서 자기의 고통을 잘 감출 수 있을지, 아니면 비극적 결단을 내릴지 직접 구경하러 모여들 예정이다. 하는 수 없이 라스티냐크는 델핀과 만찬에 참석하는데, 놀라울 정도로 침착함을 보이던 보세앙 부인은 그날 만찬이 다 끝난 뒤, 자기는 시골 오지로 떠나 거기에 파묻혀 지낼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고리오 영감에게 돌아온 라스티냐크. 죽음을 목전에 둔 고리오 영감이 딸들을 애타게 보고 싶어 하다가 곧이어 발작적으로 그녀들을 격하게 비난하는 모습을 직면하게 되자  큰 딸, 레스토 부인 집에 찾아간다. 하지만 레스토 백작에게서 자기는 고리오 씨에게 애정이 별로 없고, 그가 자기 부인의 성질을 망쳐 놓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큰딸 역시 자기가 너무 어려운 상황이라 도저히 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제 뉘싱겐 부인 집으로 달려간 라스티냐크. 그녀는 몸이 너무 아파 갈 수가 없다, 만약 자기가 지금 나가서 병이 악화된다면 아버지는 슬퍼서 돌아가실 거라고 말한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전당포에 자기 시계를 맡기고 장례 절차를 밟는 라스티냐크. 거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 의식을 잃은 고리오 영감 앞에 델핀의 하녀가 와 부인이 아버지를 위해 돈을 요구했다가 부부가 대판 싸워 의사가 왔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어 큰딸 레스토 부인이 찾아와 남편이 자기에게 어마어마한 빚을 남겨 놓고 떠났다고 말하지만, 고리오 영감은 이미 사망을 한 상태. 이를 본 레스토 부인은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만다. 

  모든 장례 절차를 마무리한 라스티냐크. 다시 두 딸 집에 찾아가지만 아무도 만나주지 않아 허탕을 친다. 묘지 앞에 선 라스티냐크. 무덤 주위에는 딸들이 보낸 사람들이 서 있다가  짤막한 기도가 끝나자 모두 사라진다.   


                                                                                            *  


  손수 불쌍한 고리오 영감의 임종을 거두며 그가 그토록 사랑을 베풀었던 두 딸의 배은망덕한 행동을 직접 목격한 라스티냐크가 과연 마지막에 어떻게 행동하면서 이야기가 끝날까, 무척 궁금해 하면서 책을 끝까지 읽었다. 

  혼자 남은 라스티냐크는 묘지의 높은 언덕 쪽으로 몇 걸음 걸어 올라가, 등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센 강의 양쪽 기슭을 따라 구불구불 누워 있는 파리를 보았다. (중략) 그가 뚫고 들어가고 싶어 했던 그 멋진 사교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중략)

  ‘자, 이제 파리와 나, 우리 둘의 대결이다!’

  그리고 그 사회에 대한 첫 도전의 행동으로 라스티냐크는 뉘싱겐 부인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아니 뭔가 뒤통수를 맞은 듯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최고 상류층 삶을 살고 있는 두 딸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다 내어주며 빈궁한 삶을 살고 있는 아버지를 등한시한 것은 그들이 원래 나쁜 딸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결혼과 함께 그들의 삶의 내용이 바뀌어 새로운 욕구의 지배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리오 영감은 시집가기 전, 두 딸의 사랑을 받았던 시절을 몹시 그리워하며 모든 잘못을 사위들에게 돌리고 있지만, 사실은 상류층에 들어가자 차츰 허영심이 그녀들의 마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순수한 마음, 즉 순정을 갖고 있었던 그녀들이 결혼 이후  입문하게 된 사교계라는 세계는 끊임없이 누가 더 비싼 보석으로 예쁘게 치장했는가, 누가 더 멋진 애인을 가졌는가를 비교하는 곳이다. 이리하여 허영심이 그녀들 마음속, 순정의 영역을 차츰 밀어내게 된다. 

  흥미롭게도 시골에 있는 엄마와 두 누이에게서 없는 돈을 받아내 사교계 인사로 치장을 한 라스티냐크는 처음엔 그녀들에게 죄책감을 크게 느끼지만, 사교계에 점점 깊숙이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녀들의 존재를 별로 의식하지 않게 된다. 물론 라스티냐크가 고리오 영감의 임종을 자기 희생적으로 돌본 건 아직 그에게 순정한 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출세로 가는 지름길인 사교계의 총아가 되겠다는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 역시 두 딸들처럼 차츰 허영심의 지배를 받게 되리라고 가정하는 게 맞을 것이다. 

  라스티냐크는 애인에게 배신을 당하고서 시골에 은둔하러 떠나는 보세앙 부인과 죽어가는 고리오 영감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탄식하고 있다. 


  “보세앙 부인은 가버리고 이 노인은 죽어 가고, 아름다운 영혼들은 이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없구나. 하긴, 위대한 감정들이 치사하고 편협하고 피상적인 사회와 어떻게 한통속이 될 수 있겠어?”


  하지만 이렇듯 아름다운, 순정한 영혼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스티냐크는 ‘치사하고 편협하고 피상적인’ 사교계에 다시 돌아가고 만다. 물론 자신은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이 작품을 보고나서 제일 크게 다가온, 아이러니이다.

 

                                                                                            *


   그렇다면 라스티냐크는 나쁜 사람일까? 물론 아니다. 어쩌면 극히 평범한 보통 인간의 행동이라 보아야 한다. 하루하루 열심히 법 공부를 해 사법 관리로서 출세하는 길과 사교계의 상류층 여인을 통해 한달음에 출세하는 길, 그 두 선택지 앞에서 전자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항상 더 쉽고 더 빠른 길을 택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전자를 선택하는 자는 사교계에서의 성공이 희박하다고 느끼는 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사교계의 세계는, 즉 최상류층 사람들의 세계는 ‘전장에서처럼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남을 죽여야 하고, 자기가 속지 않으려면 남을 속여야 하는’ 세계다. 이 세계는 여리고 미숙한 순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전에 갖고 있었던 순정의 자리엔 어느새 약삭빠른 계산과 이기적인 허영심이 밀고 들어와 버린다.  

  아마도 발자크는 라스티냐크를 자기의 순정, 그 아름다운 영혼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는 예외적인 인간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감수하고자 했던 궁핍한 삶보다 우아하게 이어지는 이런 삶을 선호하지 않기란 참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면서 점점 사교계에 빠져드는 라스티냐크를 끝까지 믿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듯 발자크는 아름다운 영혼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인지하고 사랑하지만, 사람은 늘 사회 속에서 출세를 꿈꿀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많은 경우 아름다운 영혼의 사망을 의미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라스티냐크 같은 사람은 예외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우리 보통 인간들의 삶이 가진 깊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순정이나 허영심은 모두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전제로 한 감정이다. 허영심이란 감정은 기본적으로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위에 있거나, 더 낫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허영심의 지배를 많이 받는 자는 타인을 내 감정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따라서 애초부터 타인의 감정은 내 관심에서 배제되고, 나의 관심은 오로지 나 자신의 이기적 욕망의 충족뿐이다. 

  이에 반해 순정은 관심이 나의 만족에 있다기보다는 타인의 행복에 있다. 순정은 타인이 슬프면 나도 슬프고 타인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순정에는 타인과의 감정적 분리가 없기 때문에 애초부터 나 개인의 이기적 욕망은 배제된다. 본래 유약한 존재인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공동체적 삶을 이어왔기 때문인지 모르나 자기 자신이 타자와 연결되어 있을 때 보다 커다란 원초적인 기쁨을 느낀다. 

  세상엔 완전히 순정적인 인간도, 완전한 허영덩어리의 인간도 드물다. 우리가 사회 속에 사는 한 순정만 갖고 살 수 없듯이, 순정이 주는 원초적 기쁨을 완전 배제하는 허영심만 갖고 살 수도 없다. 우리는 대개 타협을 하고 사는데, 예컨대 순정은 애인이나 가족, 또는 친구 등 소중한 이들을 향해 간직하고, 허영심은 그 밖의 다른 이들에게 적용하며 살아가곤  한다.   


                                                                                              *


  나는 오랫동안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돈을 밝힌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모두 라스티냐크처럼 곤궁한 삶보다는 화려한 삶을 꿈꾸지 않겠는가. 그것도 지금처럼 화려한 연예인의 삶이 인터넷을 통해 모두 시시각각 드러나는 시대에 말이다. 씁쓸하지만, 이런 시대에 순정한 마음을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 더 희귀한 일이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순정한 마음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마음이다. 위기에 처한 순수한 마음을 어떻게 유지하고 가꾸어 나갈 것인가의 문제는 이제 너무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인간이 인간인 한, 가장 놓치기 싫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라스키냐크의 경험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형태만 달리하고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고전을 다시 읽는, 의미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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