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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숙 Oct 21. 2022

억눌린 자의 사랑

   -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에 대하여

  드디어 고대하던 봄비가 왔다. 

  이따금 멀리서 산불 소식만 들려오고 벌써 5월도 다 갔는데, 올봄엔 이상하게 비가 안 왔다. 일주일 전부터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고, 금방이라도 비를 몰고 올듯 바람결엔 분명히 비 내음이 실려 있었다. 매일 올듯 말듯 변죽만 울리더니 드디어 오늘 비가 온 것이다. 우리 동네 혁신도시 산책로엔 적지 않은 나무가 심어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한 달 전부터 열섬 현상을 막기 위해 대대적으로 나무 심기 운동이 벌어졌다. 고향을 떠난 크고 작은 나무들이 빈터를 속속 메우고, 길섶을 따라 쭉 새로 일군 땅에는 키 작은 라일락, 흰말채나무, 패랭이, 송엽국 등 다년생 식물들이 자기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랬는데, 하루하루 나무들은 비쩍 말라가고 야생화들은 힘을 잃고 모조리 땅바닥에 드러누운 상태였다.      

  워낙 비를 좋아하는 나는 얼른 우산을 꺼내들고 집을 나섰다. 

  더없이 청량한 기운이 피부에 전해졌다. 미세먼지를 말끔히 씻어낸 나무들이 저마다 색이 짙어진 나무줄기로 자기의 존재감을 뿜어내고, 오늘따라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의 리듬이 상큼했다. 나는 오리떼와 외가리가 노니는 기지제 호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만치 솔나무 가지는 수천 개의 작은 구슬방울을 매달고, 벚나무 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펴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땅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길가 야생식물들도 일제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일어나 살아있음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숨죽여 그들의 환희 속으로 동참해 들어갔다. 

  뉴스를 보니 올해 5월 달의 강수량이 다른 해의 2.6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아직도 해갈이 되려면 멀었다는 말이다. 봄엔 봄비를, 여름엔 장마를 제일 좋아하는 나다. 아마 다른 때보다 내 감정이 더 고양됐던 건, 오랫동안의 기다림이, 누적된 결핍감이 있었기 때문일 테고, 식물들의 애타는 목마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젊었을 적엔 잘 몰랐는데, 살다보니 우리 인생엔 참 굽이굽이 지뢰가 많이 묻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나 나나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 아는 게 부족할 수밖에 없는데, 매순간 우리는 눈 뜬 장님으로 미래를 선택해야 한다. 그 중에서 가장 리스크가 큰 선택이 바로 결혼이다. 그래서 결혼을 최고의 블라인드 베팅(blind vetting), 즉 가장 결과를 알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한다. 결혼이 누구에게나 가장 중차대한 결정임에 틀림없을 텐데, 제일 멋모르고 내리는 결정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런 점에서 수많은 서구 젊은이들이 미리 살아보고, 그러니까 동거를 해보고 결혼을 결정하는 현재의 관행은 나름 일리 있는 것 같다. 

  요즘은 이혼이 많이 흔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혼은 사별 다음으로 당사자들에게 끼치는 스트레스 1위 항목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혼은 종교적으로나 사회 윤리적으로 엄격하게 금기시 됐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또 자식들 때문에 참 많은 이들이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감내해왔다.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 여주인공인 모르소프 부인 역시 예외가 아니다. 르농쿠르 공작 부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위로 세 아들을 먼저 보낸 가족에서 딸로 태어나 냉랭하고 엄격한 엄마의 훈육 아래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다행히 나중에 숙모가 그녀의 양육을 떠맡게 돼 사랑과 행복을 살짝 경험하긴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운명은 이제 모르소프 백작과 결혼함으로써 다시 더 커다란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녀의 남편인 모르소프 백작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왕정이 폐지됐을 때 망명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은 후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귀국하여 유서 깊은 가문의 딸인 우리의 여주인공과 결혼한다. 지독한 왕정주의자인 그는 망명 생활 중에 나빠진 건강과 경험 부족으로 인해 다시 왕위에 오른 루이 18세가 그에게 관직을 하사했을 때 이를 고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무능한 ‘망명 귀족’인 모르소프 백작은 또한 그 시대의 가장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남편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사소한 것에 대해 푸념하고, 겉으로는 전혀 증상이 보이지 않는 아픔을 끄떡하면 하소연하는 그는 아내와 하인, 그리고 자기 영지의 농부들에게 극도로 인색하고 가혹하다. 또 가끔은 갑자기 음울하게 침묵하거나 병적인 무기력을 호소하여 아내로 하여금 자기에게 정성을 쏟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곤 하는데, 항상 끝에 가서는 아내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 (즉 아이들의 병약한 건강상태를 지적하고 그 책임을 묻는 등) 상처를 입히고, 그처럼 한심스러운 권력을 휘두르는 데 특별한 쾌감을 느낀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자기 인생에 대한 선천적인 불만족을 가지고 항상 누군가를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는, 해마다 새로운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인사인데, 심지어 아내의 현명한 의견에 따라 농업 경영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겐 마치 원래 자신의 생각인양 생색을 내기도 한다.     

  결혼 후 얼마 있다가 백작의 히스테리 기질을 알게 된, 모르소프 부인은 자기가 겪는 끔찍한 불행과 남편의 무능력이 밖으로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 또 툭하면 자기를 의심하는 남편을 배려해 사교계를 피해 남편의 영지가 있는, 투르 지방에 와 고독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남다른 지혜로 남편에게 선행을 유도하고, 그 결과 백작 스스로 자기가 훌륭한 사람임을 믿게끔 하여 다른 곳에서는 결코 누리지 못했을 우월 의식을 자기 집에서는 누릴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남편이라는 커다란 질곡이외에 아빠를 닮아 선천적으로 병약한 두 아이라는 짐이 떠안겨져 있었다. 당연히 그녀는 의사로부터 그리 오래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선고를 받은 아들 자크와 그 위로 연약한 딸 마들렌의 양육에 혼신을 쏟으며 살고 있다.  

  한편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 펠릭스 역시 오로지 형과 누이들에게만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시골에 있는 보모에게 맡겨지고, 이후엔 수도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보내져 부모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 뒤 고등교육 시절에도 돈도 자유도 없는 비참한 생활이 이어지는데. 극도의 정치적 혼란기에 파리가 위험에 처하자 어머니가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간다. 하지만 너무 낯설기만 한 집에서 다른 형제들의 괴롭힘과 엄마의 냉대를 받으며 괴로워하던 중, 우연히 축제에서 한눈에 반하게 된 모르소프 백작 부인을 못 잊어 하는데, 마침 지인의 소개로 그녀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모르소프 부인을 보기 위해 그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된 펠릭스. 무료해 하는 백작의 권유로 주사위 놀이를 배우지만, 그 과정에서 백작으로부터 온갖 불평과 모진 핀잔을 받는다. 나중에 실력이 늘어난 그가 놀이에서 이기자 격분한 백작은 그에게 주사위를 집어던지며 욕설까지 퍼붓는데. 펠릭스는 하는 수 없이 요령껏 점수를 비기는 것으로 게임이 끝나게끔 조정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는 모르소프 부인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게 된다. 결국 그토록 열망하던 그녀의 사랑을 얻게 된 펠릭스.

  

                                                                                           *

  

  한평생 아무 문제가 없는 개인의 삶은 존재치 않는다. 그런데 인생에서의 불행은 놀랍게도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강압적인 배우자로 인한, 지옥 같은 결혼 생활 이외에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잘못 태어난 자녀 때문에 평생 고통을 짊어지는 부모의 불행, 또는 극도로 비윤리적인 부모나 형제자매를 만나 겪게 되는 가혹한 운명 등 그 예는 아주 다양하다. 그럴 경우, 우리는 곧잘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런 악연을 왜 뒤집어써야 하는지, 너무 억울해 신의 멱살이라도 잡고 따져 묻고 싶어진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의 고리를 가지고 애써 윗세대로 거슬러 올라가 희미하게나마 겨우 그 원인을 찾아냈다 해도 왜 하필, 지금, 내가, 혼자, 그 죄 값을 옴팡 뒤집어써야 하는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기 마련이다. 

  발자크는 <골짜기의 백합>의 모르소프 부인처럼 별다른 자기 잘못도 없이 우연히 맺어진 잘못된 결혼으로 인해 평생 고통을 떠안게 되는, 삶의 정의롭지 못한 아이러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느 기이하고 매서운 권능이 항상 미친 사람에게 천사를, 진실되고 시적인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 악녀를, 보잘 것 없는 이에게 위대한 여자를, 못난이한테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를 선사하는가?”


  펠릭스는 모르소프 부인이 배려는커녕 병적인 히스테리 기질과 분노로 공포만 주고, 자기를 고압적으로 지배하는 남편인 모르소프 백작이라는 사람이 무가치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느꼈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섬세한 영혼을 소유한 젊은이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펠릭스가 모르소프 부인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게 된 데에는 어린 시절 냉혹한 엄마에게서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학대에 가까운 대우를 받은 경험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철저히 소외된, 외로운 공상가로 자라나 항상 섬세한 관심과 따뜻한 애정을 목말라하던 그의 억눌린 영혼은 어느 누구보다 먼저 모르소프 부인의 불행하지만 순결한 영혼을 깊이 이해한다. 모르소프 부인 역시 자기에게 진정어린 연정을 보여주는 펠릭스의 마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제 상처받은 두 영혼은 이기적인 욕망을 벗어나 서로 정신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무한한 행복을 함께 누리게 된다. 마치 딱 맞는 퍼즐 조각처럼 서로의 단짝인 두 사람의 영혼이 비로소 만나 하나가 된 것처럼. 

  하지만 이십 대 청년인 펠릭스의 내면에 천사처럼 숭고한 정신적 사랑만이 존재할 수는  없는 법. 펠릭스는 붉게 달궈진 쇠처럼 뜨거운 육체적 사랑으로 끊임없이 갈등을 하고,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모르소프 부인은 ‘숙모가 날 사랑했듯이 나를 사랑해’ 달라고 그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하는 수 없이 펠릭스는 자기 자신을 잊고 병약한 가족들을 위해 수호천사처럼 헌신하는 모르소프 부인을 위해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대로 따르리라 맹세한다. 그리고 아주 흥미롭게도 먼 훗날, 그는 이때처럼 충만한 행복을 맛보게 해준 사랑을 그 뒤엔 다신 하지 못했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 후에는 사랑하는 여인을 여인 자신으로서 사랑한다. 그러나 첫사랑을 할 때에는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녀의 아이들이 내 아이요, 그녀의 집이 내 집이고, 그녀의 이해관계가 내 이해관계이고, 그녀의 불행이 나의 가장 큰 불행이다.’     

  이처럼 첫사랑이 강렬한 이유는 그것이 이후의 사랑에 비해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한,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남성들은 일반적으로 첫사랑 이후의 사랑에서 육체적 사랑에  더 경도되는 경향이 있다.

 

  이제 서로의 영혼이 결합된 두 사람은 지극한 행복을 맛보지만, 젊은이가 자기보다 연상이긴 하지만 아직은 젊은 백작 부인의 집에 언제까지나 드나들 수는 없는 법. 또 모르소프 부인은 부인대로 자기 때문에 펠릭스의 미래를 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펠릭스의 등을 떠밀어 파리에 있는 자기 아버지 르농쿠르 공작을 만나도록 주선한다. 그리고 떠나는 펠릭스에게 부디 권세 있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그에게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조언을 담은, 정성어린 장문의 편지를 전해준다. 

  르농쿠르 공작의 도움으로 다행히 루이 18세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한 펠릭스. 국왕으로부터 받은 위험한 임무를 수행한 후 다시 모르소프 부인을 찾아가 사랑을 재확인하며 환희에 떨지만, 자기의 육체적 욕망으로 괴로워한다. 이후 펠릭스는 급기야 국무회의 심리관의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되고, 최상류층 사교계에 드나들게 되는데. 폐하로부터 휴가를 얻은 그는 곧바로 다시 투렌 지방으로 날아간다. 그의 커다란 성공에 다시없는 기쁨을 보이면서도 그의 위험한 사랑 앞에서 재차 숭고한 사랑을 지속해 주기를 부탁하는 모르소프 부인. 그녀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펠릭스는 또 다시 그녀에게 성모 마리아와 같은 거룩한 사랑을 맹세한다. 

  한편 나이가 들어가면서 성질이 더 포악해진 모르소프 백작을 보고 펠릭스는 그녀에게 남편에게 당하지만 말고 맞서라고 조언하지만, 백작이 편찮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를 간호하러 가버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존재는 그녀의 삶의 전부가 아님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때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백작. 두 사람은 사경을 헤매는 백작을 서로 번갈아 가며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더 친밀한 연대감을 느낀다. 하지만 백작은 다시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더 포악해지고. 펠릭스는 그녀의 지나친 희생에 다시 한번 우려와 불만을 토로하지만, 모르소프 부인은 만약 자기가 결혼이라는 의무를 저버린다면 아빠 없이 남겨진 두 아이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냐며, 오히려 그에게 반문한다.   

  다시 폐하의 부름을 받고 투렌을 떠나는 펠릭스.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는데, 그의 모르소프 부인에 대한 숭고한 사랑이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다. 한편 당시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영국 귀부인 더들리 후작부인이 그를 유혹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냉랭한 무관심에 오히려 더 자극을 받은 그녀는 그에게 단지 사랑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애원하고. 기어이 자기의 뛰어난 미모와 집요한 노력으로 그의 욕정을 자극하는데 성공한다.  

  이제 모르소프 부인으로부터 더 이상 답장이 오지 않자 엄청난 불안에 사로잡힌 펠릭스. 다시 그녀에게로 달려간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더들리 부인과의 관계를 다 알고 있고. 펠리스는 그녀의 냉대에 가슴 아파한다. 한편 그동안 더 심하게 지병을 앓은 자크와 마들렌을 돌보느라 많이 수척해진 부인은 힘들었던 그간의 고통을 솔직히 토로하고, 펠릭스는 자기가 그동안 얼마나 욕정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는지를 말한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자기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고, 다만 육욕을 다스리지 못했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펠릭스.  

  한편 펠릭스를 뒤따라 투르 지방 근방까지 온 더들리 부인. 이를 알게 된 모르소프 부인은 펠릭스와 함께 더들리 부인이 있는 곳에 와 그녀를 본다. 모르소프 부인은 더들리 부인에게 가라고 펠릭스의 등을 떠밀고. 펠릭스는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투르로 돌아오지만 전보다 더 확실하게 거리를 두는 모르소프 부인에게서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파리에서 다시 더들리 부인과 관계를 이어가는 펠릭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본래의 성격이 점차 드러나자 실망을 한다. 항상 외교관처럼 처신하고 사교계를 떠나 살 수 없는 허영심 덩어리인 그녀에게서 그의 마음이 멀어지는데. 결국 펠릭스는 사랑을 모르소프 부인처럼 ‘열정과 이상으로 승격시키는 대신 필요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그녀와 파경에 이르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모르소프 부인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펠릭스. 정신없이 달려가서 보니 그녀는 42일째 마시지도, 먹지도, 자지도 않아 영양실조로 이미 폐색이 짙어진 상태. 그녀는 자기 곁에 다가온 펠릭스에게 낮은 목소리로 열에 들떠 말한다.

  

  “당신을 보지 못해서 병이 났어요. 당신이 내게 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나는 살고 싶어요. 나도 말을 타고 싶어요! 그리고 파리, 연회들, 쾌락들을 모두 경험하고 싶다고요!”

   “거짓이 아닌 실제의 삶을 살고 싶어요. 여태껏 내 삶에서 모든 것이 거짓이었어요.”

    

  하지만 마음의 회오리바람이 한 바퀴 몰아치고 지나가자, 모르소프 부인은 다시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남편인 백작에게 일평생 꼭꼭 숨겨 놓았던 비밀을 고백한다.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정을 느껴 당신에게 마땅히 쏟아야 할 정성보다 더욱 지극한 정성을 그에게 베풀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런 정성과 배려를 당신이 받는 것과 비교하여 저에 대해 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노백작은 오히려 자기가 당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말하며, 자기가 너무 자주 모질게 대했음을 고백한다. 서로를 용서하는 두 사람. 

  이제 그녀는 벽난로 위에 놓인 유언장을 가리키며 펠릭스에게 마지막 말을 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한다.

  

  “이제 그는 제 양자일 뿐이에요. 제 마지막 소원으로 펠릭스에게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라는 명을 남기고 싶어요. 제가 그를 과대평가한 것이 아니라고 믿어요. 그에게 제 뜻을 남겨 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제가 당신도 과대평가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세요.”

  “펠릭스, 내가 당신에게도 잘못을 했을지 몰라요. 가끔 당신에게 기쁨을 드릴 것처럼 기대하게 만들고는 결국 뒷걸음질을 침으로써 당신을 실망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와 어머니의 용기 덕분에 모두와 화해하고 죽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 빈번히 내게 불평했던 당신도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 부당한 불평을 나는 내심 즐기긴 했지만!"

    

  이처럼 마지막 순간, 모르소프 부인은 자기가 평생 펠릭스 못지않게 뜨겁게 그를 연모해왔음을, 그리고 그로 인해 너무 힘들고 괴로웠지만 그때마다 자기의 욕망을 억눌러 정신적 사랑으로 승화시켜냄으로써,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  


  <골짜기의 백합>은 발자크의 다른 리얼리즘 작품들과 달리 낭만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연애소설이다. 자기를 흠모하는 젊은이를 사랑하면서도 끝까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자기 본분을 지켜낸 여인과, 연상의 여인에게서 이상적 여성상을 발견하고 그녀의 뜻에 따라 욕정을 억누르며 정신적 사랑을 이어가던 중, 유혹을 못 이겨 한때 불같은 사랑을 하지만 결국엔 다시 그 연상의 여인에게로 돌아오는 사랑을 그린 이야기다. 

  하지만 그 여인은 지독한 배신감으로 죽어가고, 이제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그녀가 자기의 본분을 저버릴 정도로 그를 사랑했었다는 것, 그리고 오히려 그랬기에 더욱 더 가족들에게 충실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된다. 

  두 사람의 사랑이 그토록 강렬하고 아름답고 지속적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어린 시절 진정한 사랑을 맛보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이었다는 게 꽤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소설에서 발자크는 진정한 사랑을 욕정의 쾌락보다는 무엇보다 정신적인 결합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발자크가 진정한 사랑을 무엇보다 여성의 사랑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고 싶다. 

  그가 소설에서 말한 내용에서 그 이유를 직접 찾아보자. 그에 따르면 우선 여성의 자비로운 사랑은 다른 자비와는 다른 것이다.

 

  “어떤 이는 거만해서 자비롭고, 다른 이는 습관적으로, 또 다른 이는 계산에 의해서 또는 성격이 물러서 자비롭죠. 하지만, 벗이여, 당신은 맹목적인 자비를 보여주었어요.”


  거만해서 자비로운 것은 돈이나 권력 등 우위에 있는 자가 아랫사람에게 시혜를 베풀듯 사랑을 베푸는 것이고, 습관적으로 자비로운 것은 애정으로 충만한 마음이 결여된, 기계적 인 반복행위에 불과한 것이고, 계산에 의해 자비로운 것은 무언가를 얻어낼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사랑을 베푸는 것이고, 성격이 물러서 자비로운 것은 애정이 넘쳐흘러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처세술처럼 약하기에 어쩔 수 없이 자애롭게 처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맹목적인 자비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처럼 이해타산을 벗어나 사랑하는 이에게 베푸는,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랑을 베푸는 자는 주로 여성이기에 우리도 발자크처럼 이런 사랑을 여성적 사랑이라 이름붙이는 데 동의할 수 있다. 여성적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 자신을 위한 마음이라기보다,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라는 점에 있다. 발자크는 이런 마음을 우리 안에 있는 천사의 마음으로 보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지상에서의 삶은 감각적인 이기심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우리를 끌어내린다’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발자크는 남성의 경우엔 이런 여성적 사랑이 첫사랑의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다고 한정시키고 있는데, 발자크는 첫사랑 이후 남성들의 사랑이 변모함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언급하고 있다.   


  “결국 훗날 나는 이토록 충만한 행복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내 나이에는 어떤 이해관계도 감정을 왜곡시키지 않았고, 어떤 야심도 사랑의 흐름을 가로지르지 않았다. 그렇다. 후에는 사랑하는 여인을 여인 자신으로서 사랑한다. 그러나 첫사랑을 할 때에는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중략) 그런 성스러운 사랑은 우리를 다른 사람 안에서 살게 하지만, 후에는 우리가 다른 이의 삶을 우리 안으로 끌어들이고, 여인에게 우리의 떨어진 기력을 젊은 감정으로 되살려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그 이후에, 남자는 더 이상 주지 않고 받기만 한다. 젊은 시절에 자기 안에서 연인을 사랑했던 그는 이제 연인 안에서 자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 남성들은 우리를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취향과, 때로는 악덕까지 심어 준다.”


  이와 관련하여 <골짜기의 백합>에서 발자크가 모르소프 부인의 입을 빌어 이런 사랑의 뿌리가 바로 모성에 있음을 언급하고 있음은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아이를 둔 어머니로서 사람을 학대할 줄 모릅니다. 고통을 견딜 줄은 알지만,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녀가 모성애가 없다면, 어떻게 사랑하는 법을 알까요?”


  이렇듯 모르소프 부인은 사랑과 모성애의 본질적 유사성을 언급하고 있다. 즉 진정한 사랑은 이기적인 남성적 사랑과 달리 아무 조건 없이 무한히 베푸는, 모성애와 동일한 성질을 공유하는 일면이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   


  인간은 동물이기에 우리는 평생 자기 욕구를 벗어나 살지 못한다. 즉 욕망이라는 근원적인 동력으로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까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에 갇힌 채 자기중심성이라는 생물학적 중력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우리는 자기를 벗어나는 기적의 순간이 존재함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자기를 벗어난다는 건 생물학적 자아에서 탈피하는 걸 의미하는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상상력이나 사유를 통해서이거나, 사랑행위를 통해서이다.

  사유한다는 것, 즉 보편적인 이념이나 일반적인 법칙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시야가 자기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의미하고, 타인의 처지에 자기를 가져다 놓고 그의 희노애락을 자기의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상상력 또한 이미 자기가 놓여 있는 상황과 감정에서 벗어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성적 사랑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를 벗어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사는 걸 의미한다. 이때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산다함은 그 사람의 행복과 성장을 나의 이기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간절히 원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사유와 상상력이라는 정신적 행위와 여성적 사랑 행위는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에 비해 영속적이고 생산적이다. 이에 비해 자기 하나의 몸뚱아리의 만족을 위한 사랑은 일회적이고 일시적인 소모 행위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육체라는 옷을 걸치고 있는 한, 몸뚱아리의 욕망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일시적으로나마 우리를 본능이라는 생물학적 중력에서 해방시켜, 즉 자아라는 갇힌 틀에서 끄집어내 보다 더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신적 행위들과 여성적 사랑이다.   


                                                                                           *


  여성적 사랑의 근원은 말할 것도 없이 모성적 사랑이다. 모성적 사랑은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보다는 상대방의 행복과 성장에 놓여있다. 모성애가 얼마나 한 인간의 인식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이와 더불어 한 인간의 인격을 한 단계 더 높게 성장시키는가, 하는 것은 모르소프 부인이 심지어 자기에게 폭군처럼 보이지 않는 학대를 휘두르는 남편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깊은 동정심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인생이란 그런 거예요. 모르소프 백작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런 운명에 처하게 됐을까요?” 


                                                                                           *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도 함정은 존재한다. 여성이 아이를 낳음으로써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런 점에서 한 단계 인격적으로 성숙을 경험하는 건 사실이지만, 자칫 잘못 생각해 마치 자기의 자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생물학적 한계를 무시하는 몰지각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여성은, 아니 엄마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존재여야 할 뿐 아니라 자기의 자아까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 여성들은 더 이상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들에게 씌워진, 희생하는 존재라는 이데올로기의 일방적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많은 남성들의 사랑이 정신적 사랑보다는 육체적 사랑에 보다 경도되고, 여성을 자기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보게 된 데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사회제도인 가부장제라는 견고한 제도가 배경이 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가부장제라는 제도 속에서 남성은 여성에 비해 지배적인 위치에서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상대방을 위해 희생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오히려 지배적 강자라는 위치는 자기의 욕망을 마음대로 처리해도 되는, 언제든 탐욕과 방종으로 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성에게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남성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인 여성적 사랑을 경험키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펠릭스처럼 억눌린 약자로서의 경험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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