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숙 Oct 21. 2022

정념이냐, 영혼이냐

   -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대하여

  몇 년 전에 가족 모두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를 보러 예술의 전당에 간 적이 있다. 평소에 나한테서 소설 <안나 카레니나> 얘기를 여러 번 들었던 딸아이가 표 다섯 장을 예매하겠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적지 않은 가격이었다. 결혼한 지 오래 되지 않은 딸아이라 사위에게도 미안해서, 잠시 주저했지만 말리지 않고 그냥 고맙다고만 했다. 다른 뮤지컬이었으면 아마 말렸을 게다. 하지만 <안나 카레니나>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안나 역은 옥주현이, 브론스키 역은 민우혁이 맡은, <안나 카레니나>의 포스터의 색체가 아주 강렬했다. 붉디붉은 바탕색에 검정 드레스를 입은 안나가 고개를 숙인 채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에서 사랑과 죽음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한껏 부풀어 오른 기대가 공연을 기다리는 기간 내내 줄어들 줄 몰랐다.  

  하지만 뮤지컬을 다 보고 난 나의 기분은 대실망이었다. 공연장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내 감상을 묻는 얘들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해야 할 정도였다. 원래 자기 감정을 감출 줄 모르는 사람이라 쉽지 않았다. 커다란 기차 바퀴 그림으로 장식한, 꽤 인상적인 무대 배경과 리드미컬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 전개, 극적인 아리아와 풍성한 오프닝 넘버 등 볼거리, 들을 거리가 넘치는 공연이었지만 좀처럼 만족하기 어려웠다. 뮤지컬을 보고 이렇게 실망한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기대가 너무 컸다. 엄마를 위해 거금과 귀한 시간을 내준 딸아이에게 미안했다. 

  내가 그토록 만족할 수 없었던 건 크게 두 가지 때문이었다. 하나는 공연 속에서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안나의 섬세한 내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 작품 속 또 다른 주인공인 레빈이라는 인물이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한정된 시간 안에 대작인 장편소설을 담아야 되는, 그것도 뮤지컬로 표현해야하는 한계에서 오는 필연적(?) 결과일 게다. 

 

  흥미롭게도 <안나 카레니나>를 출판할 당시, 톨스토이는 안나의 자살로 마무리되는 7부에서 작품을 끝내야 한다는 출판사 편집장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어이 자비를 들여 8부를 출간했다. 8부는 안나의 죽음 이후 그녀와 아무 관계없이 진행된, 레빈의 결혼 생활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당시 출판사 편집장은 작품의 대중적 성공을 위해선 안나의 비극적 자살에서 이야기가 끝나야 한다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그린 인물은 안나 한 사람이 아니었다. 깊이와 양적인 측면 모두에서 톨스토이는 레빈을 안나와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었다.  

  이처럼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아니라 안나와 레빈이다. 얼핏 보면 기이한 조합이다. 대체로 한 소설의 주인공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나 카레니나>는 다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혹자는 <안나 카레니나>의 구조가 완벽한 통일성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이 안나와 브론스키가 아니라 안나와 레빈인 이유는 나의 견해로는 톨스토이가 가장 훌륭한 남성으로 본 사람은 브론스키가 아니라 레빈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톨스토이의 분신 역시 브론스키가 아니라 레빈이다. 아마도 톨스토이로서는 안나로 하여금 오해와 헛된 망상에 빠져 자살하게끔 만든, 아니 방관한 브론스키를 가장 훌륭한 남성으로 보기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레빈과 브론스키 모두 명문 혈통에 막대한 부를 이어받은 젊은이이지만, 그 둘의 차이는 작품 속에서 다양하게 발견된다. 두 사람의 차이는 우선 그들의 사교계에 대한 태도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독신자 클럽을 포함해 사교계가 브론스키에게 삶에 적당한 활력과 재미를 주는 곳이라면, 레빈에게 있어서 사교계는 그것이 갖는 경박성, 비생산성 때문에 가급적 멀리하고 싶은 곳이다. (사교계에서 서툴고 불편해하는 레빈의 모습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속 피에르를 많이 닮아 있다.) 그러기에 레빈은 당시 모스크바 상류층 남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기다랗게 기른 손톱을 보고 기겁을 하기도 하고, 자기 친구이자 안나의 오빠인 스티바를 따라 들어가게 된, 독신자 클럽에서 그 안의 장식을 보고 눈썹을 찌푸린다.

  ‘청동제 장식들, 거울, 가스, 타타르인, 이 모든 것이 그의 눈에 거슬렸다. 그는 자신의 영혼에 충만한 것을 더럽힐까 봐 두려워했다.’ 

  거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지주로서 농민들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대다수 농민들의 삶에 대해 늘 관심을 갖고, 낙후된 러시아의 농업을 개선해 나가려는 이상주의적 인물이 바로 레빈이다. 그의 순수한 영혼은 그로 하여금 러시아 농업 전반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책 저술을 진행시키게 만들면서, 다른 한편 왜 사느냐와 같은 근본적인 삶의 문제에 대한 사색을 멈추지 않게 하고 있다.

 

  이 두 사람과 재미있는 삼각형의 한 꼭지점에 위치한 사람이 바로 안나의 오빠인 스티바이다. 스티바는 온갖 맛있는 음식을 만끽할 수 있는 독신자 클럽이나 화려한 사교계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으로, 별로 하는 일 없이 공직에 있으면서 적지 않은 봉급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씀씀이가 헤퍼 재정 상태가 늘 위태로운 사람이다. 철저히 현재를 사는 감각적인 사람인 스티바는 집안의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워 아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지만,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는 끝내 알지 못할 만큼 철부지이다. 그와는 달리 어렸을 적 엄마를 잃어 항상 이상적인 가정을 꿈꿔온 레빈은 키티에게 청혼하기에 앞서 자기가 육체적으로 완전히 순결한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처럼 세 사람 모두 선량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차이는 분명하다. 톨스토이는 스티바의 입을 빌어 레빈의 특징을 바로 그의 순수한 영혼에서 찾고 있다.


  “자네는 매우 순수한 사람이야. 그건 자네의 미덕이자 결점이기도 하지. 자네는 순수한 성격이라 인생 전체가 순수한 현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 행위와 목적이 언제나 일치하기를 … 한 인간의 행동이 언제나 목적을 갖기를, 사랑과 가정생활이 언제나 일치하기를 바라지. 하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해. 인생의 변화, 인생의 매력, 인생의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은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기 마련이야.”

   

  브론스키는 완전히 본능적 인간인 스티바와 정신적 인간인 레빈의 중간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브론스키는 귀족의 후예답게 무엇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자로 그가 느끼는 고통은 주로 명예롭지 못한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수치심에서 비롯된다. 브론스키는 병원과 학교 건설 사업에 열을 올리긴 하지만, 그의 이러한 행동은 레빈처럼 이상주의적 성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분히 명예와 실리를 따지는 현실주의적인 행동일 뿐이다. 크게 보아 브론스키의 삶은 근본적으로 본능이나 욕망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이러한 점은 브론스키가 안나와 이태리 여행 중 느끼는 권태감에 대해 톨스토이가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서 잘 드러나 있다. 

  ‘한편 브론스키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 완전히 이루어졌는데도 충분한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곧 자기 욕망의 실현이 자신이 기대하던 행복이라는 산에서 겨우  모래알 하나만을 주었다고 느꼈다. 이 실현은 그에게 행복을 욕망의 실현으로 상상하던 사람들이 저지르는 그런 영원불변의 과오를 보여 주었다.’ 


                                                                                          *


  나도 한창 젊었을 적, 뇌가 가장 말랑말랑하게 활발히 움직였을 대학교 1학년 시절, 상당히 이상주의적이었던 때가 있었다. 주위의 모든 애들이 입시에 열중하고 있는데 혼자 외로이 경쟁이란 제도에 회의를 품고 머릿속에서 거부한 채 공부에도, 그렇다고 다른 어떤 것에도 제대로 몰두하지 못하고 방황만 하다 대학에 들어왔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내 흥미를 끌지 못했다.  

  철없던 당시, 내가 무엇보다 민감하게 생각했던 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의롭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는 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서 칸트의 문고판 <실천이성비판> 책을 뒤적이다 맨 뒷부분에 실린, 책에 대한 소개 글을 읽게 됐다. 조금씩 빠져들며 읽어내려 가던 중,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내용이 나왔다. 바로 부와 권력과 같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의 크기는 선의 크기, 즉 인격적 완성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피안의 세계가 요청된다는 칸트의 주장이었다. 

  여기에서 내가 주목했던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칸트 역시 현실의 세상에서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최고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걸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행복과 덕이 일치하는, 정의로운 내세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윤리적 가치가 확실하게 이론적으로 정초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이러한 칸트 이론의 타당성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는 있었지만, 그 이론이 결코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죽은 다음에 맞이하는, 정의로운 저 세상이 현실 속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칸트가 말하는 피안의 세계가 기독교적 신의 나라를 암암리에 의미하기 때문에 나처럼 무신론자가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얼마 전, 친구들과 잡담을 하는 와중에 한 친구가 자기 언니들 중에서 제일 착한 언니가 제일 못 산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친구들 대부분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푸틴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가 몇 십 년간 권좌에 앉아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는 윤리적인 고려까지 감안하면서 자기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보다는 아무런 제약 없이 앞 뒤 가리지 않고 그대로 직진하는 자가 더 성공 확률이 높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윤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윤리가 없이는 사회 자체가 존립하기 힘들다. 물론 최소한의 법만으로도 사회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선악을 둘러싼 양심의 문제나 훌륭한 인간에 대한 흠모의 감정은 이와는 다른 것이다. 

  이 세상에 과연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자기 이익을 넘어서서 옳은 것을 행하려는 선의지를 그 자체 절대적으로 선한 것으로 규정한다. 자기의 욕망이나 이익을 따르지 않고,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옳은 것을 행하려는 선의지만이 아무런 보상이나 대가 없이, 아니 바로 아무런 보상이나 대가가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때 ‘그것이 옳기 때문에’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볼 때 옳다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 해도 그런 선의지만큼은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다. 

  하지만 칸트의 선의지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도덕적 행위이냐 아니냐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인 칸트의 선의지는 도덕적 행위의 최소한의 요건일 뿐 도덕적 행위를 확장시켜 나가는 힘을 가지지는 못한다.  

  이와는 달리 톨스토이가 지향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나갈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삶의 대한 기본태도이다. 톨스토이는 레빈과 그의 큰형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두 사람의 차이를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


  레빈은 단지 이성적 판단에 의해 움직이는 지식인들과는 다른 인물이다. 당대 러시아 최고 지식인 중 한 사람인, 레빈의 큰형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관념적 이상주의자이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형을 존경해온 레빈은 논쟁에서 늘 자기를 이기는 형을 알면 알수록 그에게 뭔가 결핍된 것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 결핍이란 선하고 정직하고 고결한 열망이나 취향의 결핍이 아닌 생명력의 결핍, 즉 마음이라고 불리는 것의 결핍, 인간으로 하여금 무수하게 놓인 삶의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그 하나만을 바라게 만드는 갈망의 결핍이었다. 형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레빈은 형을 비롯하여 공익을 위해 일하는 많은 활동가들이 가슴으로 공익에 대한 사랑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이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고 오직 그러한 판단에 따라 이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더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과학적 유물론자인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같은 사람들의 행동을 이끄는 것은 뜨거운 심장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이다. 그들의 삶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유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에 때로 현실과는 괴리된 비현실적인 결론에 종종 이르기도 한다. 즉 그들은 손쉽게 현실에서 벗어난, 단순한 관념적 이상화에 빠진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생활과 대조하여 시골을 사랑하고 찬미한 것과 똑같이, 민중에 대해서도 그가 좋아하지 않는 계급의 사람들과 대조하여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사람 일반과 대조되는 무엇으로서 파악했다.’

  이와 유사하게 레빈은 당대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사회주의 사상에서도 순전히 이론적인 이상에서 이끌어낸, 비현실적인 측면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내 생각에는 … 개인의 이해에 토대를 두지 않는 활동은 오래 갈 수 없어.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이고 철학적인 진리야.”

   

  이처럼 레빈은 차가운 이성에서 출발하는 이론적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을 실천하려는 이상주의자이다. 큰형과 달리 병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작은형을 직접 돌보고, 작은 형을 냉대하는 큰형에게는 정신적 위안의 장소 (레빈의 영지 내 저택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그런 장소가 되어 있었다)를 제공하고, 스티바를 포함한 처가 사람들의 삶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농민들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는 레빈. 이처럼 안정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레빈에게 이제 마지막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레빈은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 한 농부의 말에서 커다란 통찰을 얻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제각각이라고 하나 봅니다. 자기의 필요만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미추하처럼 자기 배만 채우는 사람도 있고, 포카니치처럼 공정한 노인도 있으니까요. 그분은 영혼을 위해 살지요. 그분은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이처럼 레빈은 한 농부의 직관적 신념을 받아들여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인간의 선한 행위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인간의 선한 삶은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따라 사는 것이다. 즉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것,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유일한 것은 바로 (욕망에 따른 정념이 아니라) 영혼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


  톨스토이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기 나름으로 기독교적인 믿음을 확고히 한 것 같다. 그 이후 그의 정신적 행적은 바로 이러한 믿음을 더 강하게 밀고 나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무신론적인 현대인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욕망이나 정념에 치우친 삶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정신적 삶이 바로 우리 모두가 지향할 만한 삶이라는 것이다.  

  인습적 관계에 머무른 채 서로 별개로 각자의 삶에만 배타적으로 몰두하는 둘리와 스티바의 결혼생활이나 정념에만 치우친 안나와 브론스키의 결혼생활과 달리, 정신적 삶을 영위해온 레빈과 키티의 결혼생활은 꽤나 이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농민과의 대화 이후, 나름의 결론에 도달한 레빈은 이제부터는 형과의 사이에 서먹함도 논쟁도 없고, 아내인 키티와 다투는 일도 없이 하인을 포함하여 모든 손님에게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하리라, 마음먹지만 자기가 하려는 걸 참견하며 가르치려 하는 마부 이반에게 속으로 화가 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앞으론 그러지 말아야 하겠다고 다시금 자기를 반성하고 있다. 참 재미있고 인간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우리 인간은 순전히 정신적인 삶만을 영위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본능적인 삶 역시 그 한계가 분명하다. 어쩌면 우리는 매 순간 그 사이를 오락가락 하며 균형을 잡으려 애쓰며 사는 게 아닐까? 톨스토이는 선한 정신적 삶의 튼튼한 기초로서 기독교적 신을 받아들였지만, 혹시 인간은 이러한 빽 그라운드가 없어도 뜨거운 가슴을 갖고 선량하고 정신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 

  레빈처럼 비록 매순간 동요하고 실수를 연발하면서 말이다.    


                                                                                            *  


  물론 레빈의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이상주의자나 큰형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관념적 이상주의나 모두 칸트의 선의지에 따르는 자들이다. 선의지는 손해를 보면서까지 옳은 일을 하려는 의지이다.  

  그렇다면 손해를 보면서까지 덕을 베풀려 하는, 선한 영혼은 도대체 왜 존재해야 하는가? 극심한 경쟁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순수한 영혼과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 우리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과연 순수한 영혼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는가?

  순수한 영혼은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사실 보상받을 수 없다. 하지만 순수한 영혼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인간인 한, 우리에게서 순수하고 선한 영혼을 가진 인간을 추구하고 흠모하는 마음을 완전히 떼어내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을 즐겨 그리는 분야가 바로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다. 문학은 순수한 영혼을 위한 최후의 보루이자 최고의 위안이다.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이전 03화 열정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