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대하여
엊그제, 식목일을 이틀 앞둔 일요일 날 엄마, 아빠 산소에 다녀왔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오 년 뒤에 엄마가 따라가셨지만 지금 두 분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누워 계신다. 자주 뵙지 못해 어쩌다 다녀오면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또 다른 한편으론 착잡해지기도 한다.
일제 치하에 살다가 6.25를 경험하고,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와 갖은 고생을 다한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그 뒤, 자식은 서울에서 공부시켜야 한다며 평생을 한량으로 산 아빠의 등을 밀쳐가며 기어이 서울까지 올라온, 극성 부모였다.
엄마는 일 년 365일 단 하루도 가게 문을 닫지 않았다. 옷가게를 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힘든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재고 처리다. 계절이 다 지나도록 팔리지 않은 옷들을 제때에 도매시장에 가서 새 옷으로 바꿔 와야 한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자정이 다 돼 장사를 마치고난 엄마는 다음 날 새벽 도매시장에 가지고 갈, 팔리지 않은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대막대기로 끄집어내려 큰 자루에 담아 놓곤 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나는 큰마음 먹고 효도한답시고 엄마를 따라가기로 했다.
온 세상이 컴컴한 어둠과 함께 꽝꽝 얼어붙은 겨울 신새벽이었다. 나는 떠지지 않는 두 눈을 비비며 속으로 왜 따라가겠다고 했나, 후회하며 겨우 일어나 엄마를 따라나섰다. 택시를 타고 동대문 시장 앞에 내리자, 엄마는 한쪽 어깨엔 당신 몸채만한 옷자루를 걸치고, 다른 한쪽 손엔 커다란 보따리를 거머쥔 채 그곳만 예외적으로 불빛이 환한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흥정을 하는 점포상인들과 소매상인들 사이로 지게 짐을 실어 나르는 아저씨, 작은 손수레를 밀고 다니며 믹스 커피를 파는 아줌마들로 땀 냄새 펄펄 나는, 별세계였다. 내가 좀 들어주려 해도 마다하고 나에겐 작은 보따리만 하나 들게 하곤 엄마는 혼자 앞장서서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 숱한 옷집들 중 이전에 옷을 산 집을 일일이 다 기억하기도 힘들 것 같았지만, 무사히 일을 마친 엄마는 곧바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살얼음이 살짝 껴있는 땅바닥 위로 매서운 바람이 귀를 떼어갈 듯 얼굴을 때리고 달아났다.
어렸을 때 엄마의 언니가 업어주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한쪽 발이 살짝 비틀어진 엄마였다. 양쪽에 큰 혹을 하나씩 단, 몸이 비대한 엄마가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뒤뚱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이어 건너편 상가골목으로 가기 위해 지하도 계단을 땀을 뻘뻘 흘리며 내려가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자니,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 내 코 끝에 통증이 왔다.
그렇게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을 누비던 엄마였다. 당연히 일 원도 허투루 쓰지 않았지만, 엄마가 자식 교육 외에 돈을 잘 아끼지 못했던 게 바로 예쁜 것들이었다. 엄마는 내 딸이 입으면 예쁠 것 같은 원피스나 색깔이 화려한 꽃들을 특히 좋아했다. 그런 엄마답게 엄마는 아빠의 훤칠한 외모에 반해 결혼해, 평생 고생을 하며 사셨다. 엄마는 아빠만 없었다면 재벌이 됐을 거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실제로 주위 분들은 엄마를 자기 옆에 손님들을 따라붙게 만드는, 타고난 장사꾼이라고 했다. 때론 손해도 보고 덤도 후하게 줄줄 아는, 엄마의 인정 많은 성품 때문이었지 않나, 싶다.
하지만 성격이 너무 다른 두 분은 다툼이 많았다. 평생 엄마는 아빠를, 아빠는 엄마를 서로 잘 이해하지 못한 채 평행선을 그으며 살다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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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나에겐 남녀의 사랑과 그 비극적 종말을 그린,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지만, 아무 때나 다시 잡아도 정신없이 다시 빠져들게 되고, 여전히 혀를 차며 감탄을 연발하게 만드는, 나의 원탑 고전이다.
예술작품에서 최고 작품을 우리는 흔히 천의무봉, 즉 천사의 옷처럼 꿰맨 흔적이 하나도 없는 작품에 비유한다. 예컨대 바하의 칸타타나 쇼팽의 피아노곡을 들을 때, 혹은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조각 작품을 볼 때 확 가슴에 와 안기듯 그냥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그런 느낌의 작품을 말한다. 그러니까 작품에 대해 판단이나 사유를 하기 이전에 그저 지극히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그런 느낌의 작품 말이다.
내가 볼 때 문학 작품에서 최고의 천의무봉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이다. 흥미롭게도 영미문학 전공 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작품을 무엇으로 보냐는 설문조사 결과 역시 1위가 바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였다.
이 세상 삼라만상이 놀라운 조화로 서로서로 맞물려 돌아가듯, <안나 카레니나> 속 숱한 인물들과 사건들은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딱 딱 맞아 돌아가는 수천, 수만 개의 톱니바퀴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 하나하나의 바퀴가 너무나 명징하고, 탁월한 표현들로 조각되어 있고, 그 안의 내용이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통찰들로 그득하다는 점이다. 인위적인 작품인 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엔 눈에 거슬리는, 즉 무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톨스토이가 1872년 1월 <툴라 신문>에 실린 기사, 즉 훌륭한 옷차림을 한 신원 불명의 한 여인이 열차의 선로에 뛰어들었다는 기사를 보고 착상을 얻어 쓰기 시작한 <안나 카레니나>의 주요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과정, 다시 말해 안나로 하여금 열차 선로에 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요인에 대해 정확히 인식해 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사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안나 카레니나> 작품이 아까 내가 말했듯 소위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내적 필연성이 뛰어난 작품이라면, 당연히 안나를 죽음으로 내몰고 간 과정에 대한 묘사에서 그 진가가 발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 작품의 백미 중의 하나는 바로 이 과정에 대한 치밀하고 명증한 묘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빠 스티바의 바람기 때문에 올케 둘리를 위로하러 모스크바에 간 안나는 마침 자기 엄마를 마중하러 기차역에 온 브론스키를 만나게 되는데. 며칠 뒤 무도회에서 다시 만난 브론스키와 춤을 추는 동안 그가 내뿜는 열정에 마음이 흔들리자 곧바로 모스크바를 떠난다. 하지만 놀랍게도 브론스키가 자기를 뒤쫓아 기차를 탄 사실을 알게 되는 안나. 안나는 자기를 만나러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 드나드는 브론스키를 물리치려 하지만, 조금씩 그에게 빠져들게 되고, 결국 그와 불륜의 관계를 맺게 된다.
경마 대회에 참가한 브론스키가 말에서 떨어지자 사색이 다 된 안나는 남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는데. 급기야 임신을 하게 된 안나. 애기를 낳는 과정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다. 절대 절명의 순간, 남편은 두 사람을 용서하고, 브론스키는 페테르부르크를 떠나려고 결심한다. 하지만 이별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브론스키는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치고. 기어이 두 사람은 이태리로 밀월여행을 떠난다.
이태리에서 저택을 구입해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는 브론스키. 몇 달 뒤 다시 두 사람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데, 안나는 이전에 가깝게 지냈던 사교계 부인들에게서 모욕과 배척을 당한다. 이제 두 사람은 시골에 정착하여 병원, 학교를 지으면서 새로운 사업에 몰두하는데. 남편과의 이혼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온 두 사람. 사소한 오해와 갈등이 쌓이면서 안나는 기어이 기차역 선로에 자기 몸을 던지고 만다.
두 사람의 외적 관계의 변화를 중심으로 줄거리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이와 같은 줄거리 자체의 강렬함 이외에 톨스토이의 탁월성은 바로 두 사람이 관계를 맺어나가는 마디마디마다 미묘하게 변화해 가는 두 사람의 심리를 현미경처럼 섬세하게 묘사해낸 데에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의 기법에 끼친, 톨스토이 문학의 영향을 설명해준다 하겠다.
안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범은 말할 것도 없이 안나의 내면에서 찾아져야 한다. 지금부터는 이 부분을 중심으로 줄거리를 다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오빠와 올케 사이의 불화를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난 안나는 올케의 여동생인 키티의 권유로 무도회에 참석한다. 무도회에서 뜻밖에 브론스키를 만난 안나는 그와 춤을 추는 동안 그의 열정에 자기도 모르게 행복과 흥분을 느끼지만, 자기가 브론스키를 애모하는 키티의 기대를 망쳐놓았다는 죄책감에 곧바로 짐을 꾸린다. 하지만 안나는 간이역에서 브론스키가 자기를 따라온 사실을 알게 되자 겉으론 그를 물리치면서도 강렬한 흥분을 느낀다.
페테르베르그에 돌아온 안나. 처음에는 자기가 브론스키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사교계에서 그가 보이지 않을 때마다 어김없이 실망하는 자기자신을 발견한다. 브론스키의 집요한 접근을 물리치지 못하고 결국 그와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안나. 하지만 그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한 수치심과 죄책감에 빠져든다.
이제 사교계의 가십거리가 되고만 두 사람. 안나는 높은 지위의 남편 카레닌의 엄한 경고를 받게 되고, 점점 더 자기의 미래에 대해 극도의 혼란과 공포를 느낀다. 자기가 임신한 사실을 브론스키에게 털어 놓는 안나. 브론스키는 이제 더 이상 둘의 관계를 이대로 끌고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둘만의 새로운 출발을 이야기하려 할 때마다 입을 닫아버리는 안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브론스키. 사실 안나는 그럴 경우 아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브론스키가 아들 문제에 관한 한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참고로 당시 제정 러시아에서는 이혼을 인가받기가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배우자의 부정으로 명예에 상처를 입은 쪽만이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고, 부정을 저지른 쪽은 자녀의 양육권과 재혼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러던 중 경마 대회에서 말에서 떨어진 브론스키를 보고 경악한 안나. 이제 더 이상 그에 대한 자기의 애정을 남편 앞에서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 날 남편이 자기에게 어떠한 처벌도 가하지 않자, 자기의 삶이 예전 그대로 남게 되리라는 것, 즉 부정한 여자로 이중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한편 여자를 남자의 활동을 가로막는 방해물로 보는 출세주의자 세르푸호스키와의 우정, 그리고 어느 외국 왕자의 여행 안내를 맡은 브론스키는 임신으로 몸이 불은 안나에 대한 애정이 살짝 식는 걸 느끼지만, 그 어느 때보다 안나에게 자기가 묶여있음을 자각한다. 자유분방한 브론스키를 질투하며 괴로워하는 안나. 안나는 이 모든 고통이 자기의 죽음으로 끝이 날 거라는 사실에서 겨우 위안을 얻는다.
출산하는 과정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안나를 본 의사는 죽음을 예견하고, 남편 카레닌은 안나를 용서를 해준다. 한편 안나를 떠나려고 결심하는 브론스키는 치욕적인 기억만을 남긴 채 그녀를 영원히 잃어버려야 하는 괴로움에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나 미수에 그치고 만다. 다시 서로의 열정을 확인한 두 사람은 이태리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모든 사회생활의 틀에서 벗어나 24시간 자유를 누리는 생활에 조금씩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브론스키. 그림에 손을 대보지만 결국 자기의 천직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 두 사람은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아들과의 만남을 거절당하는 안나. 심지어 모든 사교계에서 배척당하고, 오페라 극장에서는 노골적인 모욕까지 당한다. 이제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새로운 사업에 몰두하는 두 사람. 하지만 브론스키는 안나가 이혼을 하지 않는 한, 자기 딸이 카레닌의 딸이 되고 말 거라는 상황에 절망하고, 안나는 이혼할 경우 자기 아들 세료쟈를 잃어버리리라는 것 때문에 점점 더 모르핀에 의지한다. 세료쟈와 브론스키를 똑같이,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사랑하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안나. 결국 아들을 포기하고 이혼을 결심한다.
이혼을 매듭짓기 위해 모스크바로 온 두 사람. 하지만 점점 더 두 사람을 갈라놓는 내적 분노가 깊어 가는데, 안나는 사교계 생활을 지속하는 브론스키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새로이 모스크바의 정치 생활에 흥미를 느낀 브론스키는 자기의 남자로서의 독자성을 위협하는 안나를 경계한다.
계속해서 사소한 오해와 갈등이 쌓여가고, 이제 브론스키의 사랑마저 의심하는 안나. 아들까지 포기한 자신이 이제 브론스키의 사랑마저 잃었다고 생각하며 절망하는데. 자기망상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된 안나는 기어이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지고 만다.
가장 열정적이었지만 가장 커다란 비극으로 끝나 버린 남녀의 사랑, 자기 목숨처럼 사랑했지만 서로의 목숨을 옥죄이고 만 사랑이 바로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다. 두 사람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성적 본능에 이끌려 사회적 금기를 뛰어넘을 정도로 사랑했지만,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상황의 전개 속에서 비극적 결말을 피하지 못했다. 두 개의 삶이 불꽃처럼 타올라 하나의 선로로 합쳐졌지만, 결국 그 선로는 서로 어긋난 행로로 갈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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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남성의 상호 몰이해는 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르게 형성된, 인성(personality)의 차이에서 어느 정도 설명 가능하다. 오죽하면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른 별에서 왔다는 의미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말이 다 생겨났겠는가. 이 점은 톨스토이가 그린, 가장 여성다운 여성인 안나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최고의 남성인 브론스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내면적 특질들은 그가 담당해온 노동의 성질에 의해 강화되거나, 약화된다. 마치 테니스를 수십 년 동안 쳐온 사람의, 한쪽 팔의 길이가 테니스 채를 잡지 않은 다른 쪽 팔보다 길어지는 것처럼, 그가 담당하는 노동은 그 노동이 필요로 하거나 요구하는 내적 성질을 강화시킨다.
여성과 남성은 역사 이래 수천 년 동안 서로 다른 노동을 담당해 왔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인류 사회에서 남성은 대체로 사회적 노동을 담당해 왔고, 여성은 살림, 육아 등 집안에서 사적 노동을 담당해 왔다. 사회 속에서 다수의 사람을 상대하는 사회적 노동은 남성에게 독립심과 의지력, 냉철한 판단을 하는 합리적 능력 등을 길러주었고, 가족이라는 친밀한 집단 안에서 가족 구성원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사적 노동은 여성에게 따뜻한 보살핌과 사랑을 실천하는, 감성적 성향을 길러주었다.
가장 훌륭한 여성인 안나는 아들에 대한 사랑과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이라는, 절대 화합하기 어려운 그 두 사랑의 갈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다가,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고 여기에 자기의 전부를 걸게 된다. 이와는 달리 부와 총명, 매너와 매력을 다 갖춘, 앞길이 창창한 시종무관이었던 브론스키는 비록 출세를 포기한다 치더라도 사회 속에서의 삶을, 남성으로서의 독립성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안나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브론스키는 세료쟈의 엄마로서의 안나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안나는 자기 목숨보다 더 브론스키를 사랑했지만, 그의 남성으로서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결국 안나는 브론스키의 남성으로서의 독립성에 대한 요구를 자기에 대한 사랑이 식은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만다.
그런데 이러한 안나의 오해는 당시 안나가 놓여 있던, 극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더 강화된 것이다.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는 그 두 사람에게 결정적으로 서로 다른 상황을 제공했다. 즉, 당시 귀족들의 삶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교계는 유부녀를 사랑한 브론스키는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남편을 배신한 안나에게는 철저히 문을 닫았다.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 수치심과 죄책감에 고통 받는 안나에게 모스크바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기의 심장에 칼이 꽂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이 되어 있었다.
이렇듯 한 인간에게 중요한, 사회생활과 교제가 허용되지 않은 안나에게 사랑은 거의 절대적인 의지처가 되어 버렸지만, 아들마저 포기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던 브론스키의 사랑 역시 믿을 수가 없게 된다. 안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모스크바에서 영국인 소녀 한나의 교육에 정성을 쏟는 자기를 비난하는 브론스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난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거야. 자기 딸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의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말이야. 그가 자식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알겠어? 내가 그를 얻기 위해 희생한 세료쟈, 그 아이에 대한 나의 사랑을 그가 어떻게 알겠어? 그건 나를 아프게 하려고 한 말이야! 아니, 그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어.’
안나는 악의에 차 브론스키를 비난하고, 브론스키 역시 더 이상 자기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며 안나에게 화를 낸다. 급기야 브론스키가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맹목적으로 밀고 나간 안나는 죽음으로 돌진하게 된다.
‘남편의 수치와 치욕도, 세료쟈의 수치와 모욕도, 나의 끔찍한 수치도, 모든 게 죽음으로 구원받을 거야. 죽자. 그러면 그도 뉘우치겠지. 날 불쌍히 여기고 날 사랑하게 되겠지. 나 때문에 괴로워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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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의 입을 빌어 안나를 가장 매력적이고 훌륭한 여성으로 칭송하고 있다. 하지만 그토록 훌륭한 여성인 안나는 결국 자기망상의 노예가 되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극의 원인을 안나나 브론스키라는 개별적 존재에게서 찾기 보다는, 당시 사회의 시대적 한계라 할 수 있는, 남녀에 대한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사회적 편견과 대우, 그리고 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내면적 특성과 상호 몰이해에서 찾는 게 더 합당한 것 같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앞에는 물론 조금 더 나은 여건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더 나은 여건을 만든 장본인은 바로 여성들의 사회 활동의 증가이다. 다수의 여성들이 이제는 사회적 노동을 남성들과 함께 담당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여성다운 여성, 남성다운 남성’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 과거처럼 얌전하게 희생만 하지 않고 사회 속에서 당당하게 자기 의사를 펼쳐나가는 여성이, 그리고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가사노동과 육아를 함께 하는 남성이 훨씬 더 아름다운, 그런 사회가 되었다.
변화된 여건은 항상 또 다른 문제점과 또 다른 발전의 토대를 주게 마련이다. 남녀가 같은 공간에서 서로 부딪치기 때문에 전에 경험치 못했던 새로운 갈등들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 젊은 남녀들이 성별을 넘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여지 또한 커져가고 있다. 결코 쉽진 않겠지만, 전자의 경우엔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현명한 절제와 상호 타협이, 후자의 경우엔 진정한 협력과 상호 발전이 우리들이 나아갈 방향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