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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숙 Oct 21. 2022

사랑의 고통이 그려낸, 아름답고 진귀한 무늬

   -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하여

  지난 일요일 아침, 아침을 누룽지로 대충 때우고, 곧장 남편하고 금산사를 향했다. 가느다란 봄비가 내리는 아침이라 금산사엔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다. 저 멀리 서로 겹치며 이어지는 산등성이의 가두리를 허연 안개가 밑에서부터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산책길 양 쪽에 누런 페인트를 칠한 듯 강건해 보이는 배롱나무들과 곰팡이 꽃이 펴 푸르뎅뎅한 벚나무들이 청신하고 촉촉한 내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저만치 서 있는 나무들은 아지랑이처럼 여린 붉은 빛에 감싸여 있었다.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막 돋아나려는 새순들을 감싸고 있는, 잎자루의 색이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금산사를 지나 조금 더 걸어올라 간 뒤 나는 남편과 헤어졌다. 남편은 한 두 시간 더 산행을 하고, 내가 있을 카페에 올 예정이었다. 산행을 더 하고 싶어 하는 남편과, 금산사 입구에 있는 카페에서 책을 보고 싶어 하는 내가 타협한 결과였다. 

  우산을 쓰고 혼자 내려오는데 젊은 부부인 듯, 한 쌍의 남녀가 우산을 함께 받쳐 들고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다.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둘이 바짝 이어 붙이려고 하던. 팔과 어깨를, 그리고 시간과 공간까지.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당연히 크고 작은 위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위기의 시기는 신혼 때가 아니었나 싶다. 

  하루 빨리 친정집에서 나와 독립하고 싶어 하는 나의 욕구와 남편의 절절한 구애가 만나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한 번도 생각지 않았는데, 너무 치사하고, 귀찮고, 힘든 일이 많아 모든 걸 다시 원점으로 돌리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또 이렇듯 자질구레한 고비들을 넘겨 맞이한 신혼 생활은 아예 나의 예상을 뒤집어엎을 정도로 실망이 컸다. 결혼을 하면 꿈같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입사한지 얼마 안 되는 남편은 직장 생활에 거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다 빼앗기고 있었다. 결혼 생활이 연애 때하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미건조했다. 혼자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나는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기를 당한 듯 낙심했다.     

                               

                                                                                         *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 번에 쭉 이어 다 읽어내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은 십 년에 걸쳐 조금씩 읽었다고도 했고, 또 어떤 이는 해가 바뀔 때마다 이 책의 완독을 새해 계획으로 세우곤 한다고도 했다. 하기야 오백 페이지나 되는 책까지 포함해, 장장 열한 권의 번역서이니 그럴 만도 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쉬이 따라가기 힘들게 만드는 요소는 그 엄청난 양 이외에도 다른 요인들이 많다. 작품의 큰 골격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무수하게 뻗어가는 이야기의 곁가지들, 툭하면 한 문장이 한두 페이지에 걸쳐 있을 만큼의 지독한 만연체, 우리가 관심도 없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온갖 귀족 명문들의 얽히고설킨 뿌리와 역사들, 프랑스 고유어들의 다양한 시기와 지역별에 따른 변천과정, 유럽의 고급문화인 음악, 연극, 특히 명화들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해박하고 상세한 지식들이 곳곳에 지뢰처럼 숨어 있다가 우리의 기를 질리게 하고 인내심을 시험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이 고전을 읽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이야기 내용을 그 어느 하나의 것으로도 고정시킬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이 소설의 주제나 줄거리는 결코 핵심적인 내용이나 본질적인 몇몇 문장들로 단순히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무엇보다 주인공 자신이 쉼 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말하고 있듯 ‘우리의 자아는 차례차례 경험한 상태의 누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누적은 산의 지층처럼 부동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상승 운동이 묵은 층을 표면 가까이 들어올린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꽤 난처하게도 주인공이 만나는 상대방 역시 보이지 않게 변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매번 이전과는 조금 다른 자아로서, 내가 알던 사람과는 또 조금 달라진 타자를 마주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오랜 만에 만난 사람이 예전에 내가 알던 사람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데, 그 내막을 짐작조차 하기 어려워 몹시 답답했던 경우를 누구나 한두 번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    


  요즘은 누군가 세상을 떠나거나, 또 이혼을 한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전해 듣곤 한다. 젊었을 때, 아니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갑자기 성공한 남자, 혹은 여자가 옛 애인을  버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노하곤 했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의리와 정의감이 핏대를 올리며 폭발하곤 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그런 못된 인간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사랑은 변한다. 확실히 내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사랑을 하는 주체인 인간이 변하는데 어떻게 사랑이 변치 않을 수 있겠는가. 이건 비단 내가 그동안 충격적인 얘기들을 많이 들어 알게 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이때 사랑이 변한다고 해서 꼭 불륜이나 이별같이, 부정적인 의미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위태롭고 격정적인 연애를 한 뒤, 부부 사이에  이전과 달리 더 깊고 안정된 사랑이 자라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강력한 빛과 그림자이다. 하지만 그토록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도 모르고, 그 본질을 명확히 규정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사랑은 곧잘 합리적 설명을 비껴가고, 자본주의적 모든 셈법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사랑이 ‘하나의 미소, 하나의 눈길, 하나의 어깨 때문에’ 시작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과연 무릎을 탁 칠만한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정말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소한 것 하나가 그토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다니. 

  그렇다면 그 사소한 하나는 그 안에 많은 메타포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아주 작은 표정이나 몸짓이 상대방에게 불러일으키는, 매우 함축적이고 신비스러운 어떤 것 말이다.   

  그러기에 프루스트는 사랑을 ‘곡두’, 그러니까 일종의 환영으로 보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까 그 사소한 표정, 또는 몸짓 하나가 우리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려 우리에게 독특한 환영을 제공할 때,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물론 그 환영은 사람마다 다 다르게 일어난다. 흥미롭게도 마르셀은 생 루의 애인을 처음 보았을 때, 왜 저 친구가 자기에게는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는 여인에게 그토록 몰두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나중에 생 루도 똑같이 마르셀의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가 과연 그가 한번이라도 더 만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그토록 많은 것들을 희생할 만한 여인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바닷가 발베크에서 그곳에 놀러온 아가씨들을 사귀게 된 마르셀은 그중 한 아가씨인 알베르틴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의 ‘곱고도 착한 가련한 눈길, 포동포동한 볼, 큰 검정 사마귀가 있는 목’으로부터 곡두가 시작되지만, 뜻밖에 멀리서나마 그녀가 다른 여인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얼핏 목격하게 된 마르셀은 아예 그녀를 데리고 파리로 돌아와 자기 집에 기거하게 만든다. 

  부모 없이 숙모 집에서 귀족들의 심부름을 하며 살던 알베르틴은 애초부터 마르셀의 고급 취향과는 거리가 먼 여성이었다. 낮에는 그녀에게 사람을 붙여 파리 관광을 시켜주고, 자기는 집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써보려 하지만 진척이 잘 안 되는 마르셀. 

  처음엔 그녀를 소유하고 있다는 기쁨에 짜릿한 전율을 느끼지만, 마르셀은 차츰 그녀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가는 걸 알아챈다. 알베르틴은 이제 더 이상 자기가 알던 그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의젓한 걸음걸이로 바닷가 둑 위를 걷고 있던 한 마리 새와도 같은 알베르틴이 한번 내 집에 사로잡힌 몸이 되다 보니, …… 그녀의 아름다움은 조금씩 사라져 갔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르셀이 알베르틴의 외모에서 유약한 자기와는 달리 자유롭고 건강한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즉 환영을 보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베르틴이 밖에서 누구를 만나고 다니는지 의심하게 된 마르셀은 권태로울 틈도 없이 다시 숱한 공상 속에서 괴로워하게 되는데. 외출하는 그녀에게 동행인을 붙여 그녀에 대한 감시를 부탁하고, 저녁에 동행인에게서 조금이라도 안심되는 보고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불안에서 벗어나곤 한다. 

  이리하여 마르셀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즉 ‘알베르틴하고의 생활은, 내가 질투하지 않는 때에는 권태롭기 짝이 없으며, 질투할 때에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그런 생활이었다. 결국 이렇게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그는 이별을 결심하게 된다. 즉 마르셀은 ‘자신의 두뇌가 예민하다고 생각하고, 이제 자기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확신’을 하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별을 결심을 한 바로 다음날 아침, 알베르틴 아가씨가 떠나갔다는 말을 듣는 마르셀. 그는 지구의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고통에 사로잡힌다. 

  마르셀은 즉시 친구 생 루를 불러 알베르틴의 숙모 집에 가서 그녀를 데려오라고 부탁하는 한편, 그녀에게 따로 편지를 써 값비싼 자동차와 요트, 화려한 넉 달간의 해상 여행 등을 제안하며 청혼을 한다. 하지만 결국 알베르틴이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제 마르셀은 충격 속에서 그녀와 함께 하던 순간들을 복기하기 시작한다. 집안의 가구 하나하나, 파리 시내 거리거리마다 그녀의 흔적을 몸으로 감각하며 그녀를 애타게 그리워한다. 이처럼 그녀와의 추억 이외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마르셀은 자기 속에 새로운 경지의 세계가 펼쳐지는 걸 경험하게 된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내 가운데 이토록 살아 있는 알베르틴이 이제는 땅위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존재치 않고 죽은 알베르 틴이 여전히 내 몸 안에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클라이막스라고 할 만한 내용을 거칠게 요약해 보았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두 번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제일 먼저, 마르셀이 알베르틴과의 이별을 결심한 다음날, 그녀가 아침 일찍 떠났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도 알베르틴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또 그녀의 취향이 자기의 취향과 잘 맞지 않는다고 그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는 완전 다르게 그는 그녀를 다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 아주 무리한 일까지 감행하려고 한다. 예컨대 그는 ‘그녀와 결혼해 일 년에 50만 프랑으로 생활해나가다가 7~8년 후 돈이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녀에게 남은 돈을 다 주고, 자기는 자살하리라.’고까지 생각한다. 마르셀 안에 있던 두 자아, 즉 사랑에 몰두하는 자아와 사랑과 무관한 자아 중, 잠시 잠자고 있었던 하나의 자아가 다시 발딱 고개를 들어 그를 격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간 결과라 하겠다. 

  또, 마르셀은 알베르틴이 말을 타다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예 그녀와의 추억 속에만 빠져 살아가는데, 그런 과정에서 인간에겐 가히 초월적이라 할만 경지를 열어 보인다. 즉 그는 잃어버린 그녀와의 시간을 다시 살아냄으로써, 더 이상 땅위에 살아있지 않은 알베르틴이 죽지 않고 여전히 자기 몸 안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러니까 더 이상 괴롭지 않고 오히려 감미로움을 느끼는,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제 그녀에 대한 모든 추억은 이미 가슴에 불안한 압박을 주지 않고, 감미로운 것만을 주는 제2의 화학적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


  물론 우리가 계속 삶을 살아가야 하는 한,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다. 마르셀 역시 일정 기간이 지나자, 알베르틴에 대한 그리움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가 자기 안에, 아니 ‘자기 몸 안’에 살아있음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경지는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건 아닌 게 분명하다. 내가 주제넘게 생각했듯 알베르틴이 취향이나 지적 능력 등 그와는 잘 맞지 않는 여성이라고 해서 둘이 헤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는 건, 매우 냉철한 판단일지는 몰라도 프루스트적인 감수성과는 꽤나 거리가 먼 것임에 분명하다.

  이처럼 격렬한 심적 고통을 경험한 마르셀은 천식과 같은 지병이 심해져 한동안 요양원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요양원에서 나와 목숨을 걸고 집필에 몰두하게 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잃어버린 자기의 비극적 사랑을 다시 찾아나서는, 또 하나의 절절한 절규라 할 수 있겠다. 

  우리 안에 있는 여러 자아 중, 중요한 두 개의 자아인 사랑하는 자아와 자기 일을 추구하는 자아가 서로 갈등하지 않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흔치 않다는 걸 차치하고서라도 프루스트에게 있어서 사랑의 고통은 그의 삶과 작품, 모두에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무늬를 그려준, 예리한 조각 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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