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림자 같은 인생에 찾아오신 '헤세드'의 하나님

시편 144:1-15

by 평화의길벗 라종렬

시편 144:1-15 그림자 같은 인생에 찾아오신 '헤세드'의 하나님

인생의 비루함과 덧없음을 자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사랑'으로 고백하며, 일상의 평화를 꿈꾸는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전투와도 같습니다. 눈을 뜨면 마주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은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때로는 알 수 없는 불안이 영혼을 잠식해 들어옵니다. 시편 144편의 시인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지금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비장함을 넘어 묘한 슬픔을 자아냅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3-4절).


여기서 '헛것'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벨(hebel)'은 입김, 혹은 잡을 수 없는 연기를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주의 억겁 시간 속에 찰나를 살다 가는 미미한 존재, 이것이 우리의 적나라한 실존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신비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먼지와 다를 바 없는 우리를, 우주의 창조주께서 '알아주시고', '생각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 감격스러운 역설 앞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2절).


많은 번역본들이 이를 '나의 인자(lovingkindness)' 혹은 '자비'로 옮기지만, 원어는 '하스디(Hasdi)', 즉 '나의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능력이 많으신 '요새'나 '산성'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한결같은 사랑, 그분이 바로 나의 '사랑' 그 자체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터져 나올 때, 전쟁터 같던 우리의 일상은 더 이상 두려움의 장소가 아닙니다.


시인의 시선은 이제 치열한 전장에서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으로 옮겨갑니다. 아들들은 장성한 나무 같고, 딸들은 궁전의 모퉁이 돌처럼 다듬어졌으며, 곳간은 가득하고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는 세상(12-14절).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를 구하는 기복(祈福)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나의 사랑'으로 삼은 자들이 누려야 할 마땅한 샬롬의 상태, 즉 생명과 평화가 넘실대는 하나님 나라의 원형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무게에 눌려 신앙의 기쁨을 잃어버린 벗들이여. 우리는 종종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 앞에 머뭇거립니다. 눈에 보이는 성취가 없어서, 내 삶이 여전히 그림자 같아서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서 오지 않습니다. 진정한 복은 '소유(Possession)'가 아니라 '관계(Relation)'에 있습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5절).


이 구절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큽니다. 세상의 힘이나 재물을 나의 요새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 나의 '사랑'으로 삼는 것. 비록 내 인생이 헛것 같고 흔들리는 그림자일지라도,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복입니다. 부디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이라는 견고한 요새 안에서 안식을 누리시기를, 그리하여 여러분의 일상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그늘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빕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

시편 144:1-15 유한한 존재의 숨결 속에서 피어나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총

우리가 바람처럼 덧없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은 그 연약한 실존을 긍휼히 안으시어, 세상의 탐욕이 아닌 정의와 사랑이 충만한 영광스러운 삶으로 우리를 빚어내십니다.

*

우리는 삶이라는 거대한 무대 앞에서 자주 앙상한 질문과 마주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 144:3). 시편 기자의 탄식처럼, 우리는 자신이 지나가는 숨결 같고,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인식합니다(시 144:4). 아무리 몸부림쳐도, 우리의 실존은 파스칼이 느꼈던 우주의 무한한 침묵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무력해지는 듯 느껴집니다. 우리가 애써 쌓아 올린 지위나 성공이라는 건축물들이, 이 광대한 우주적 규모 앞에서 성냥갑처럼 왜소하게 보이는 순간, 우리는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과 맞닥뜨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이 곧 절망의 숙명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생명 자체가 우주적 기적임을 증언하며, 그 기적의 바탕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완벽하고 흠 없는 존재가 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속에 임하십니다. 시인이 고백했듯, 그분이야말로 우리를 굳게 붙드시는 반석이요, 우리를 건지시는 방패와 피난처가 되십니다(시 144:1-2). 우리가 힘겨워 주저앉을 때, 하나님은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시인은 고백을 이어, 자녀들이 궁궐의 모퉁잇돌처럼 든든히 서고, 곳간에는 양식이 가득하며, 거리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전혀 없는(시 144:12-14) 평화로운 세상을 갈망합니다. 우리는 이 "울부짖는 소리가 없는" 이상적인 세상의 비전(시 144:14c)을 마음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비전은 단순히 물질적 번영이나 외적인 웅장함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파고드는 과도한 욕망은 우리를 돈과 소비의 포로로 만들어, 이웃을 이용하고 소외시키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탐욕과 불의를 미워하십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 또는 삶이 막막하여 좌절할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행위와 은혜를 먼저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의롭거나 헌신적인 행위를 했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실존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맑은 거울처럼 비추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어두움을 드러내시지만, 그 깨달음은 우리를 절망케 하려 함이 아니라 용서와 치유를 주어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이 놀라운 은총에 힘입어, 이제 우리는 스스로 힘을 내서 모든 것을 하려 하기보다, 사랑의 빚진 자로서 곁에 있는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과 더불어 정의와 자비의 길을 걷는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걸어가는 작은 걸음 하나하나가, 이 무정한 세상의 폐허 위에 하나님의 평화의 태피스트리를 짜는 아름다운 행위가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영혼의 칠흑 같은 밤을 지나는 그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