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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몰랐습니다.

쉴만한 물가

20121102 - 미처 몰랐습니다


가을이 되어서 백과가 무르익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보면서 한껏 그 가을을 만끽하고 있을 때 한켠에서는 쓸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해가 가는 게 두려운 사람들이 있지요. 더더군다나 이렇게 가을이 되면 머리가 새는 것처럼 절정에 달한 단풍이 하나둘 떨어지면 그렇게 또 세월이 가는구나 생각하며 가는 세월을 쓸쓸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보면 결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삶을 살다가 이제서야 참된 삶의 길을 뒤늦게 알고서 지난날이 한없이 후회스러워 한숨짓는 분들이 이제 얼마 남지 않는 이 땅에서의 삶을 바라보면서 쓸쓸해한다는 사실을...


마음은 청춘이지만 몸은 자꾸만 굳어져가서 은행잎 하나 나뭇잎 하나 제대로 주워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굳어진 관절을 부여잡고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현실로 쓸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심신이 부서져라 자식들 키웠건만, 지들 갈길 다 가고 평생 의지했던 영감님, 할멈 보내 놓고서 혼자 외로이 살아가며 손주 녀석들 제롱이라도 전화라도 기다리다 지쳐서 쓸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친구들이래야 말도 헛 나오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턱에 구멍이 났는지 질질 흘려대고, 빠진 이빨 사이로 웃음이 새어서 웃어도 웃는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을 바라보고서 쓸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손주 녀석들이 와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냄새난다고 저리 가버리고 지네들끼리 낄낄거리며 전자오락이다 컴퓨터다 스마트폰이다 부여잡고 희희낙락하며 너무도 세대차를 느끼며 쓸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갈 데는 많은데 오라는 데는 없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서 자식들 보러 가는 것도, 어디 놀러를 가는 것도 다 귀찮아 그렇게 혼자 쓸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진수성찬을 놓고서도 틀니로 먹는 음식이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고, 그나마 혼자서 먹는 밥상이래야 묵은 김치에 이것저것 넣어 끓은 꿀꿀이 죽 같은 국물 한 그릇, 그렇게 텔레비전과 벗 삼아 앉아서 먹는 식사시간에도 쓸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버스를 타고 장에 나가도 이것들이 사람 늙었다고 이젠 흥정도 대꾸도 제대로 않고 바가지만 씌우려고 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사람들 보는 게 오히려 힘겹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여전히 쓸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동네 사람들과 놀러 가서 예쁜 단풍이랑 부여잡고 폼도재고 사진을 찍었건만 정작 그 모습이 다 쓴 양재기마냥 쭈글거림과 엉거주춤함이 젊은 날은 그냥 있었어도 멋있었는데 다시 올 수 없는 젊은 날을 기억하며 또 쓸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무엇을 배우고 싶어도 예전에는 한 번만 봐도 알 수 있고 잘만 생각나더니 노인대학에 가서 배운 이것저것 금방 배워도 까먹어서 머릴 긁적이며 민망해하고 쓸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가을 들녘 황금들판을 바라보면서 모든 만물이 때가 되면 저리 탐스러운 알곡들 맺어가는데 이젠 나이 들어 얻는 열매가 도통 신통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며 쓸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는 낙엽 끝에 마지막 남은 잎새를 바라보며 이제 내가 이 땅에 살 날도 저만큼 밖에 없구나 생각하며 그 나무를 부여잡고 함께 까마득한 인생을 회고하며 쓸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간 친구 무덤에 새어가는 풀들 바라보며 나도 언젠가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에 또... 가을엔 모두들 고독해하고 낭만적이 되어가서 다 좋은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미처 몰랐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이런 가을이 결코 반갑지 않다는 사실과, 젊으나 벌써 인생의 황혼을 사는 것 같은 불쌍한 인생들과, 참된 삶의 길을 모르는 헛된 삶의 소유자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이 가을이 더 깊어지면 내 인생에 가을이 깊어지면 그땐 좀 더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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