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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17. 2021

누가복음 06:27-38 자비와 용서의 삶을 가르치신

누가복음 06:27-38  

누가복음 06:27-38 자비와 용서의 삶을 가르치신 예수님


4복4화의 평지 설교의 가르침에 이어 가장 현실적으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제자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맘과 자세로 살아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백성이 핍박하는 원수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인자로 말미암아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리는 이들을(6:22) 향하여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이들이 원수와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한 가르침은 거룩 곧 구별된 삶을 가르치시지만 세상과의 이별이나 염세를 조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세상을 품어 가고 그런 세상의 핍박을 감내하며 세상을 마침내 전복이 아닌 변화시켜 나가는 삶을 살게 합니다. 


# 27-34절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선대하며, 축복하며, 기도하라 하십니다. 

우선 심리적인 압박을 하는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이들을 선대하며, 저주하는 이들을 오히려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합니다. 심지어 직접적인 폭력에 대해서도 이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뺨을 돌려대며,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 말아고도 합니다. 더 나아가 구하는 이에게 자신의 소유를 가져가면 다시 달라하지 말라 하고, 그렇게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합니다. 

로마가 지배하고 있고, 토지의 지주들이 독점과 착취하는 상황에서 가난한 이들 곧 하나님의 나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제자들은 더욱 복음으로 인하여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지금 그런 삶을 너무도 오래도록 살아왔습니다. 미움과 모욕과 폭력과 착취의 대상이 되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마음에 원수에 대한 당연한 미움과 증오와 보복하고싶은 마음은 너무도 오래도록 마음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향한 미움이나 보복에 대한 정당성과 당위성은 유야무야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심지어 동조하는 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틀렸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런 철천지 원수같은 이들을 향하여 사랑과 선대함을 넘어 축복하며 기도하라고까지 합니다. 결정적으로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대접하라고까지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급기야 상호주의에 따라 자신을 사랑하고 선대하는 자들에게만 사랑하고 선대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주는 것도 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로 특별한 칭찬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제자된 이들의 삶에 대해서 이미 당대 통용되는 상식적인 삶과 거룩한 삶의 경계를 허물고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삶의 태도와 자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대 보편적인 신앙과 삶의 가치와 사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전폭적 삶의 전환을 요구하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삶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단락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앞서 제자들을 부르고 계신 말씀에 이은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과 설교이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삶이 천국 백성의 삶, 제자의 삶, 주님의 길을 가는 우리 모두가 지금 있는 곳에서 살아야 할 삶이며 오늘을 살고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인 우리도 마땅히 순종해야 할 말씀입니다. 


# 35-36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따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 들 곧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수준에 머물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라, 선대하라, 축복하라, 기도하라 하시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고, 자비하시기 때문에 자녀이면 당연히 아버지 하나님을 닮는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죄인들도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고 나눈다 합니다. 자신에게 그렇게 해주는 이들에게 계산적이고 상호주의적인 처세로 그렇게 하면서 산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 차원을 넘어서 실질적인 사랑과 선대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신체적 물리적인 핍박과 폭력과 착취에 대응하는 자세가 사랑과 선대함과 용서를 행하라 하십니다. 

거룩한 주의 나라 백성은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원수를 향하여서도 그런 사랑과 선대와 나눔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를 아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아들이면 의당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무책임하게 우리에게 그런 삶을 조건으로 강요하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으며 그들을 천국백성에 합당한 이들로 수용하신 사건들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받은 사랑과 천국 백성으로 택함 받아 살아가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받았기에 그 은혜에 합당한 반응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에게는 이미 그렇게 살아갈 은혜와 자비와 사랑과 능력을 차고 넘치도록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상속자라는 특권도 있지만 그에 합당한 거룩한 삶의 책임도 있다. 그것이 아버지를 향한 영광을 돌리는 삶이며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며,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삶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런 삶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인자와 자비를 베푸셨는지를 증거하시면서, 우리가 받고 누리고 채워진만큼 우리도 받은대로 원수를 향하여 이와 같은 놀라운 삶의 실천이 가능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삶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녀로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삶의 열매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면서 우리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와 사랑과 은혜를 충만하게 인식하고 누림을 통해 넉넉히 원수를 품고 박해와 착취의 상황에서도 주님으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는 거룩한 삶의 자세를 유지해 가야 할 것입니다. 


# 37-38절 예수님은 원수를 향한 헤아림대로 받게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다시한번 원수를 비판하지도, 정죄하지도 말고, 용서하라고 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빼앗기면 주되 하나님께서 오히려 넉넉하게 우리에게 안겨주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살아가는 이는 하나님께 비판받지 않고, 정죄받지 않고 용서 받으며,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받게 될 것이라 합니다. 또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원수를 향한 헤아림이 부메랑처럼 자신을 헤아림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오랜 통치와 핍박과 착취에 대해서 주님이 오래 기다리시고 용서하시고 참으시는 데, 우리가 주님보다 먼저 비판하고 정죄하고 미워한다면 주님의 오래참으심과 은혜의 뜻과 계획을 부인하고 가로막고 심지어 거역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그 어느 때보다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들을 우리는 지금 읽고 듣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예수님 당대에나 토용되고, 일부 경건하고 열심이 특심이 있는 지도자나 직분자들에게만 해당되고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원수처럼 미워하고 저주하면서 모욕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폭력을 행사하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움켜쥐고 세금을 덜 내려고 착취하고 더 적극적으로는 속이고 탈세하고 투기하고 기만하는 일들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결과와 열매가 좋다하더라도 그 과정과 방법이 선하지 못하다면 애초에 그것은 의도와 출발 자체가 하나님나라와 무관한 것입니다. 

이 일이 개인과 공동체적인 차원으로도 확대적용되어야 합니다. 지역과 국가간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공동체는 그래야 할 의무가 있으나, 지역과 국가가 기독교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할 자세를 비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고 적용하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가 세상을 향한 정죄와 폭력을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인자와 자비 그리고 사랑과 용서의 삶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몸소 그런 삶을 살아 본을 보이시는 것은 사람과 세상의 변화는 그 어떤 무력과 폭력과 보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그 사랑의 절정이 자기를 부인한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것이 원수를 변화시키고 새롭게하며 온저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인자와 자비 그리고 사랑과 용서를 받은 우리의 지금의 삶이 어떤지 돌아볼 수 있길 빕니다. 


# 거둠의 기도

주님! 

주님을 따르는 일들로 말미암아 부딪히는 원수들을 향하여 

주님의 자녀로서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고 

그 사랑으로 인내하고 극복하며 

마침내 승리하게 하옵소서. 

주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셨듯이 

우리도 전에는 주님과 원수였음을 기억하여 

혹 우리의 사랑이 저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가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 

끝까지 사랑으로 반응할 수 있게 

우리는 주의 인자와 사랑과 자비로 

다스려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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