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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19. 2021

누가복음 07:01-17 사랑과 위로의 주 예수님

누가복음 07:01-17 

누가복음 07:01-17 사랑과 위로의 주 예수님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는 자가 가져야 할 합당한 자세는 무엇인가? 가버나움에서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치유한 사건과,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살리는 두 기적 사건을 통해서 누가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적과 연결하여 예수님께서 사랑과 위로의 통치자인 것을 증거하고, 제자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주 되심을 아는 이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합당한 모습인지 이방인 백부장과 주님을 따르던 제자와 많은 무리들의 반응을 통해서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1-10절 예수님은 사랑의 통치자이십니다. 

이름없는 이방인 백부장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들은 그동안 보여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는 상이한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2절에서 종을 사랑하는 사람, 3절에서는 유대 장로들이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며, 5절에서는 유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심지어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이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유대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당연한 모습이었는데 그동안 없었고 가버나움의 이방인이며 군인인 백부장이 전혀 그럴 수 없는 이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긍휼을 베푸는 자로 소개됩니다. 그래서 이미 그는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과연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부장은 종을 치료하기 위해 유대 장로들을 보냈지만 곧 벗들을 주님께 보냅니다. 직접 주님께 오지 않은 이유를 두 가지 말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베드로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둘째는 주님이 말씀만 하면 하인을 낫게 하실 수 있을것이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주인과 종의 관계가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관계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백부장의 벗들로부터 전해들은 예수님은 ‘놀랍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하십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또한  예수님께서도 ‘놀라워 하신’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예수님의 ‘주’되심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한 행동 때문입니다. 

말씀만으로도 능히 치료가 가능하신 분으로 예수님을 알았고, 주 되심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음을 알고, 주되심에 절대적으로 신뢰와 복종으로 반응한 백부장의 믿음에 입각한 처신이 주님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기에 종과 유대인들을 향한 평소의 처신도 긍휼을 베푸는 자로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을 ‘주여 주여’하면서도 ‘주’되심에 합당한 대우와 처신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면, 삶의 우선순위에서도, 예배와 시간과 기도와 여타 모든 분야에서 주님의 ‘주’되심을 어떻게 생각하고 처신하고 반응하며 섬기고 있는지,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특히나 기도 가운데서도 오히려 우리가 주님을 종 부리듯 요청하고 삶의 우선순위에서도 찌꺼기 시간을 적선하듯 드리는 모습과 나와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모든 만물의 주되심에 대해 합당한 대우와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님의 ‘주’되심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분으로 우리가 절대 복종해야 하고 순종해야 하는 주이십니다. 


# 11-17절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참된 위로자요 생명의 주이십니다. 

주님은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살리십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이 깊은 관심을 보이시는 소외된 자(가난한 자, 병든 자, 귀신들린 자, 고아, 과부, 나그네, 이방인등)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실존을 반영합니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심은, 곧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하심을 다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살아갈 희망이 없는, 신랑을 잃어버린 과부와 같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찾아오셔서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 아니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사 살게 해주신 분이십니다. 그 긍휼하신 은혜를 생각할 때에 겸손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죽은 자를 살린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제자와 많은 무리들의 반응에는 백부장과 비교되는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16절에서 그들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큰 선지자’라고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말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입니다. 예수님을 선지자 정도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입술의 고백은 있고 소문은 퍼지지만 이들의 반응에 대해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것은 제자와 무리들이 가진 믿음과 주님의 ‘주’되심을 아는 것은 아직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놀라고 두려워하는 정도이지 주되심을 온전히 알지도 못했고 그에 합당한 처신과 반응은 입술의 고백에만 그쳤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이 주님을 알고 믿고 그 믿음대로 말하고 행동한 온전한 믿음에 못 미치고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사건들을 경험하고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놀라고 입술로만 영광을 돌리며 고백하는데 머물러서는 변화와 성숙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믿음은 주님을 바로 알고 아는 대로 행하는 믿음입니다. 아직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은 주님을 아는 것과,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도, 믿는 것도, 주님을 따르는 것도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 거둠의 기도

우리 주님 

더 온전히 알고 믿고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고 

행할 수 있길 원합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하는 고백대로 

온전히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길 원합니다. 

사랑과 긍휼의 목자요 위로자이신

주님께 합당하게 반응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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