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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24. 2021

누가복음 8:26-39 새출애굽의 성취자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8:26-39 

누가복음 8:26-39 새출애굽의 성취자이신 예수님


거라사인의 땅에 오래도록 고통받던 광인을 치유하자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떠나시길 구하고, 치유받은 광인은 증인으로 파송됩니다. 광인을 치유하고 파송하는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도 사망의 종노릇하는 우리를 구원하여 온전케 하신 주의 은혜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출애굽의 모토가 누가복음에서 반복되어 성취됩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아갔던 이스라엘의 여정이 세례 후의 광야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의 이야기와 연결되었고, 이제 광풍이 이는 호수를 건너 거라사인의 땅으로 가셔서 군대 귀신을 물리친 이야기 또한 홍해를 건넌 후에 애굽의 군대를 수장했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이후에 광야에서의 만나 사건은 오병이어 사건으로 재현되고 성취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절기와 예배는 크게 세 가지를 기억하는 날로 지켜지도록 했습니다. 살아온 날을 돌아보며 참회하라는 의미요, 뿌리 곧 정체성을 잊지 말라는 의미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다시금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모토를 통해서 결국 이러한 부분들을 기억하고 점검함을 통해서 사람이 떡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만 섬겨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하고 가르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재현되고 성취되는 사건들을 보면서 실패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 자리를 점검하고, 그런 자신들을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며, 출애굽의 은혜를 베푸신 주님이 오늘 여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계시는 주님이심을 기억하여 그에 합당한 반응과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 26-29절 예수님은 광인을 온전히 치유해 주신 분입니다

갈릴리 맞은 편 곧 이방인의 땅인 거라사 땅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 하면서 자신을 괴롭게 말라 구하나 예수님은 귀신에게 명하여 그에게서 나오라 명합니다. 광인은 이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광야로 내몰려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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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으로 일부러 가신 것은 제자들에게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가르쳐 주시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거라사인의 군대귀신 들린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의 삶의 현장 가장 낮은 곳까지 친히 오셔서 우리를 지목하고 택하사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게 오신 주님을 영접하고 주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절망의 깊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주님의 긍휼의 손길은 미치지 못할 곳이 없으며 그곳에서의 얽매인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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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사인의 땅에 군대귀신 들린 이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나 죄의 종노릇하는 인간의 실존을 반영하는 모습을 27절에서 세 가지로 묘사해서 보여줍니다.

첫째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 인간은 주께서 지어주신 가죽 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옷을 입지 않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본분을 벗어버리고 벌거벗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호하고 가리고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본분을 지키도록 하는 역할을 옷이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입고 살라 합니다. 그러나 거라사 광인은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살아갑니다. 

둘째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 인간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고, 태어나면서부터 공동체 속에 태어납니다. 첫 창조가 그랬고, 그래서 사람은 더불어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 거듭나서 다시 태어나도 우리에게는 천국의 가족들이 생깁니다. 그렇게 함께 공동체 안에 거하면서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서로 도우며 섬기며 함께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가족은 사랑을 받든지 주든지 스스로 서든지 해야 할 성숙을 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 가족과 함께해야 할 인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가정, 하나님의 집에 거해야 할 인간이 그곳을 떠나 산다는 것은 안식과 보호를 벗어난 것을 나타냅니다. 이 모습 또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셋째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 : 죽은 이들의 땅, 사망의 권세 아래에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 삶을 사는 곳이 무덤 사이입니다. 우리가 생명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생명을 공급받으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참생명을 소유하고 누리는 자로 살아갈진대, 광인은 지금 무덤 사이에서 아무런 생명도 소망도 가질 수 없이 죽음의 땅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존에서도 귀신은 끝까지 이 사람을 붙잡고 광야로 나가게 하며 어떻게든 예수님을 향하여 벗어나려고 하며 자신을 괴롭게 말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도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의 손길을 외면하면서 그냥 사는대로 살게 괴롭게 말라고 합니다. 복음을 들어도 수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실존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아닌 것에 종노릇하는 모든 인생은 이렇게 얽매여 사는 실존가운데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것에서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거부합니다. 


# 30-33절 예수님은 군대 귀신을 심판하사 무저갱으로 보내십니다. 

마침내 주님은 거라사인의 군대귀신 들린 자를 치료하사 귀신을 쫓아내서 치료해 주십니다. 그래서 광인은 이제 벗은 옷을 입고, 집에 거하지 않는 데서 정신이 온전하여 져서 다시 집으로 가고, 무덤사이에 거하던 자가 이제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역전과 회복과 구출과 온전케 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로 옷입게 해주셨고, 하나님의 집에 거할 수 있게 해주셨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님의 다스림과 보호 아래 살게 해주신 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 역사를 경험하고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악의 무리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광인에게 있던 귀신을 군대귀신이라 합니다. 쫓겨난 귀신은 많은 수의 돼지를 호수에 뛰어들게해서 몰살 시킬 만큼 큰 세력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아무것도 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이 세력들이 득세한다 하더라도 만왕의 왕되신 우리 주님이 함께하신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 36-39절 예수님은 광인을 치유하고 증인으로 파송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인을 치유하여 옷을 입히고, 정신이 온전케 되어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았습니다. 다시금 주님이 지으신 옷 곧 주님의 통치와 인도와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과 연결해 볼 수 있겠습니다. 정신이 온전케 됩니다. 공동체로 돌아가서 함께 살아가야 할 정신을 차리게 된 것입니다. 무덤 사이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발치 곧 생명의 근원 되시는 주님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이토록 전인적입니다. 

안타깝게도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은 정작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온전하게 된 이의 생명보다, 자신들의 소유를 더 중하게 여기면서 모든 만물의 주 되시며 구주 되시는 주님을 거절하여 자신들에게서 떠나가시기를 구합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온전케 해 줄 수 없는 헛된 소유를 얻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 되시며 모든 만물의 주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39절) 두려워하며 거절하고 급기야 내쫓기까지 합니다. 이 어리석은 전철을 우리가 결코 밟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치유된 사람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는 증인이 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은혜를 입은 그는 마침내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는 이가 됩니다. 그는 해방되었지만 정작 자유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물질과 사망과 무지의 사슬에 매여 자유하지 못한 이들로 대조됩니다. 

나의 실존과 함께하는 공동체와 소망이 무엇인지, 생명이 주께 있음을 알고 주님과 동행하는지 돌아봅니다. 살아 있으나 사망가운데 거하는 것 같은, 사명이 있으나 깨닫지 못하는, 그리스도로 옷입고 살아가야 하나 세상의 가치와 세계관을 따른 모습들이 없는지 돌아봅니다. 증인은 커녕 여전히 광인처럼 살고 있진 않는지, 이제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때가 훨씬 지났고 주님의 기대와 뜻이 충분히 전달되었음에도 아직도 눈과 귀를 닫고 부질없는 것들을 따라서 손익을 따지며 주를 따르고 있는 마을 사람들처럼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돌아봅니다.  


# 거둠의 기도

지금도 주님을 알지 못하면 

벌거벗은 자요, 본향을 잃은 인생이요, 

살아 있으나 죽은 인생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을 살 뿐 아니라 

이 모든 일을 이뤄주신 

주의 일들을 전파하는 증인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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