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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Feb 22. 2021

현관문을 열기 전까지 아직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내 독특한 여행 습관

나에게는 독특한 여행 습관이 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기 직전부터 챙겨간 여행서에서 가장 재미없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한다. 론리플래닛을 예를 들면, 지역별 추천 일정과 관광, 식당, 숙소, 놀거리 정보를 지나서 가장 뒤쪽에 실린 국가의 역사와 정치, 예술과 문화, 사회와 종교 등을 정리한 내용이다. 론리플래닛 포르투갈 편은 전체 약 300쪽에서 이 부분은 30쪽가량인 10%이다. 여행에 꼭 필요한 실질적인 정보라기보다는 알고 있으면 그 나라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지식이다. 미리 숙지했다면 알지 못해서 보이지 않은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면서 더 알찬 여행을 즐겼을 것이다.


대개 이런 내용은 설명이 길고 지루하다. 고작 30쪽인데도 계속 미루다가 결국 읽기를 포기한다. 꼭 앞부분만 주구장창 읽던 교과서를 공부하는 기분이다. 몰라도 여행하는데 별 지장도 없다. 당장은 날씨와 적절한 옷차림, 물가와 필요 환전 수량, 공항에서 숙소 가는 법, 맛집 정보, 간단한 인사법, 각 관광지에서 유의할 점 등이 더 중요하다. ‘시간 날 때 틈틈이 읽어야지’ 정도로 생각하면 평생 읽지 않고 모른 채로 살아갈 공산이 크다. ‘언젠가 꼭 에베레스트를 등반할 거야’라고 매년 반복해서 다짐하는 절대 실현할 리 없는 막연한 목표나 마찬가지이다.


집에 도착하면 여행책은 버려지거나 책장에 꽂혀서 장식품으로 전락한다. 스마트폰에 저장한 여행 사진은 가끔 보면서 추억에 잠기지만, 아직 다 읽지 않은 여행서는 다시 꺼내서 펼쳐보지 않는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사람들이 자꾸 ‘여행은 어땠니’라고 묻기에 며칠은 여행과 일상의 경계에 걸쳐 있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제 와서 여행지의 역사와 문화를 탐독할 의욕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미뤄둔 일을 처리하며 일상에 복귀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여행 경험치가 쌓이면서 여행지에서 돌아와 집 현관문을 열기 직전까지가 여행한 나라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최대치라고 깨달았다.




그러다가 여행 전, 여행 도중, 여행 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의외로 흘려보내는 시간을 발견했다. 여행지에서 한국으로 떠나는 날에 대중교통을 이용해 공항까지 가는 시간, 출국 심사를 마친 뒤 게이트 라운지에서 탑승을 기다리는 시간, 비행기 탑승 후 인천 국제공항에 착륙하기 전까지 비행하는 시간, 한국 도착 후 공항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시간이다. 여행이 끝났다는 생각에 스마트폰에서 안 예쁘게 나온 사진을 삭제하며 사진 정리를 하거나, SNS에 ‘이제 포르투갈 안녕. 눈부시게 행복했다’ 같은 오글거리는 소회와 사진을 올리거나, 벌써 일상에 발을 담그고 밀린 업무 메일과 문자를 보거나,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때우는’ 시간이다.


막상 이 시간을 모으면 여행이 끝났다고 하기에는 생각보다 꽤 긴 시간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 동안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미뤄두었던 나만의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다. 바로 벼락치기 ‘책 속 여행’이다. 방금까지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의 이면을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정리하는 시간이다.


일부러 공항에 일찍 도착해서 서둘러 출국한 뒤 게이트 라운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는 한다. 한산한 공간에 자리를 잡고서 미처 읽지 않은 여행서에 집중해 내용을 숙지하는 시간을 갖는다. 집에 도착하면 바로 책을 내팽개칠 것이 확실하기에, 어쩌면 이 순간이 여행한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집중력이 그렇게 높아질 수가 없다. 탑승을 하려고 줄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최후의 여행 여정인 집으로 돌아오는 공항버스에서도 마지막까지 학구열을 불태운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절박하면서도 한껏 너그러워질 수 있는 모순적인 표현이 있을까. 유일한 기회일 때는 실수하지 말고 기회를 잡고자 안간힘을 쓰게 된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는 단 한 번이라는 정해진 횟수에 ‘그래, 한 번인데 뭐. 눈 딱 감고 버텨보자. 금방 지나갈 거야’라고 오기를 부리고 위안을 삼을 수 있다. 이 말이 타자를 향할 때는 ‘에휴, 한 번인데 그냥 좀 봐주자’라며 자신의 인생 원칙에서 벗어나는 예외를 인정하는 관대함으로 표현된다.




효과적인 벼락치기 덕분에 포르투갈이 2000년대 들어 경제적으로 가혹한 시기를 겪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장기간 더딘 경제 성장에 유럽 재정 위기 여파까지 덮치면서 실업률이 치솟았다. 청년들은 인근 유럽 국가에서 일자리를 찾는 상황에 내몰렸다.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유럽 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 ECB),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EC)로부터 받은 구제 금융으로 잔인한 긴축의 시기를 보냈다. 보수 정권은 세금을 인상하되 임금과 연금을 삭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임금과 연금 삭감이라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년 물가는 조금씩 오르기 마련인데 말이다. 만일 우리나라가 고용할 여력이 없어서 청년들이 취업 준비를 할 때 이웃 나라인 중국, 일본, 대만 취업을 염두해야 한다면…… 정부를 향한 배신감에 분노하고 우리나라에서 보내는 삶에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할 것 같다.




관광객에게 포르투갈은 그저 따뜻하고 낭만적인 나라였는데, 관광지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던 어두운 면을 알게 되었다. 하마터면 포르투갈인들이 보낸 친절한 미소만을 피상적으로 간직할 뻔했다. 오히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딘가 묘하게 우리나라와 닮은 구석이 있는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나라를 알아가면 우리나라와 내가 사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독특한 여행 습관 덕분에 내 세계관은 점차 넓어지고 있다. 이 재미에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기 바로 전까지 교과서 같은 여행서에 집착할 수밖에.



P. S. 그냥 여행 가기 전에 틈틈이 공부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으신다면…… 지식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여행지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다. 사실 이는 변명이고 빠듯한 일상에서 항공과 숙소 예약, 일정 계획, 환전 등 기본 여행 준비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던데.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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