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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l 15. 2021

비에 홀딱 젖으니까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폭우와 눈먼 자들의 도시

아래 글을 토대로 퇴고해 2021년 10월 1일에 발행한 글은 https://brunch.co.kr/@smilepearlll/179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비가 지겹게 내리더니, 올해는 오는 듯 마는 듯하다 벌써 장마가 끝난 모양이다. 아직 7월 중순도 되지 않았는데 성큼 무더위와 열대야가 찾아왔으니 말이다. 작년에는 장마가 너무 길어서 밖에 나가기 꺼려져 우울하다고, 올해는 또 장마가 장마 같지 않다며, 잿빛 먹구름이 잔뜩 끼어 종일 찌푸릴 바에야 차라리 시원하게 쏟아지라고 말하고 있으니 나라는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다. 여름이 무더운 우리나라는 장맛비가 내려야 그나마 좀 시원한 여름을 날 수 있지만, 장마 기간 꿉꿉한 공기는 유쾌하지 않을뿐더러 매일 우산을 챙겨서 다니는 일도 여간 귀찮지 않다. 나는 장마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냥 한여름 무더위와 장마를 싫어하는 것 같다. 물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를 사랑하지만, 만일에 다음 생이 있다면 미국의 캘리포니아나 호주의 시드니, 멜버른처럼 1년 365일이 봄, 가을처럼 따뜻하고 선선한 해안가 도시에서 태어나고 싶다. 매일 날씨가 온화하고 도시는 적당히 복잡하고 언제든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서 산다면, 내 성격도 날씨처럼 마냥 밝고 활달하지 않을까. 물론, 세상 어디를 가든 그곳 나름의 문제와 고충이 있으며, 인간은 날씨 하나로 성격이 결정될 만큼 단순한 존재는 아니다.




얼마 전, 우산을 챙기지 않고 공원에 운동을 하러 갔다가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때아닌 빗물 샤워를 했다. 공원에서 한창 걷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집에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여기 지금 장난 아니야.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져. 우산은 갖고 갔니? 우산 없으면 빨리 지하철 타고 와. 내가 역으로 마중 나갈게’ 왜 이리 다정하데? 연애 때는 당연했던 연인의 다정함을, 서로의 존재가 부부이자 생활 공동체로서 익숙해진 결혼 4년 차에 접어들고는 감사한 일이라고 재정의했다. 똑, 똑, 전화를 끊기 무섭게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어떡하지? 여기는 집에서 가까운 역과 다음 역 딱 중간인데. 뚝 뚝 뚝 뚝 후두득 후두득 뚝 뚝, 몇 초가 지났을까. 2km 떨어진 집에 방금 비를 뿌리기 시작한 비구름은 거센 바람을 타고 5G나 LTE만큼 빠르게, 운동 중이던 공원에 도착해 하늘을 뒤덮었다. 후둑 후둑 후둑 후둑 솨아아아~~~~~, 거대한 양동이로 들이붓는 듯한 거센 빗줄기 세례를 무방비 상태로 한몸에 받았다.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백만 번은 한 것 같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바람을 타고 얼굴 정면에 달려들어 눈을 찌르는 빗방울과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빗줄기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비를 피하고자 지하철을 타려고 한 건데, 이미 정수리부터 운동화 안쪽까지 다 젖은 마당에 이젠 지하철역으로 갈지 말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선택지는 단 하나, 빗속을 뚫고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 걸어서 집에 가기. 이것이 그칠 기미가 없는 세찬 빗줄기를 가장 빠르게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원을 빠져나와 인도에 들어서니 나처럼 우산 없이 전신에 빗물을 뒤집어쓰고 빠르게 걷거나 조심스레 뛰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처럼 외출을 했다가 어긋난 일기예보에 갑작스러운 폭우를 만난 나 말고도 당황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았다. 원래는 편의점이 보이면 우산을 사려고 했는데, 편의점이 눈에 띄지도 않을뿐더러 10분 정도만 참고 걸어가면 집에 도착하기에 이제 와서 우산을 쓰는 일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때마침 어디서 구했는지 스티로폼 상자 뚜껑 두 개로 겨우 시야를 확보해 마주 걸어오던 아저씨가 ‘이거요’라면서 선뜻 직사각형 뚜껑 하나를 내게 내주었다. 택배 송장이 붙어있던 상자 뚜껑은 원래는 어딘가 버려진 쓰레기였겠지만, 확실히 양손을 모아서 이마를 가려 비를 막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 덕분에 집까지 오는 길이 한결 수월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사람들은 삼삼오오 가게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우산이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우산을 써도 소용없을 만큼 거센 빗속을 어쩔 수 없이 헤치며 걷고 있는 나 자신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당신들은 좋겠다. 아직 나처럼 비에 흠뻑 젖지 않아서. 그런데 그거 아는지? 차라리 홀딱 비에 젖으니까 마음이 편하다? 비에 맞지는 않을지 더는 걱정할 필요도 없고, 비가 언제 좀 그칠지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다가 지나가는 차에 신발이나 옷에 빗물이 튈까 봐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거든. 뭐, 요즘 상황 같아서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워터파크에 온 기분도 좀 들고. 그날 폭우는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라 얼마간 지속하였고, 아마도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던 사람들도 결국 어느 정도 비에 젖는 상황을 감수하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득, 주제 사마라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199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 소설은 도시 전체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눈이 머는 전염병이 퍼지면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일을 그리고 있다. 처음에 실명한 이들은 현재는 쓰지 않는 빈 정신병원에 격리되는데, 수용 인원이 많지 않을 때는 완전히 눈이 먼 자들, 이들과 접촉했지만 아직 눈이 멀지 않은 자들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공간에서 생활한다. 하지만 실명자가 폭발적으로 급증하자 수용소는 과포화 상태에 이르러 머지않아 이 구분은 의미를 잃는다. 감염자들이 함부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보초를 선 군인들은 눈먼 수용자가 무언가를 요청하려고 건물 입구까지 왔다가 발을 헛디뎌 건물 아래로 굴러떨어졌을 때조차 자신들도 전염될까 봐 가차 없이 총으로 쏴 죽인다. 하지만 수용소에 식량이 떨어지고 화재까지 발생하자 수용자들은 총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건물을 탈출하는데, 보초를 선 군인은 뜻밖에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비상식적으로 수용자를 사살하면서까지 자신을 지키고자 한 군인들도 결국 모두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이다. 의사의 아내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눈먼 세상에서 격리를 위한 수용소도 더는 존재할 의미가 없었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이 쏟아지는 폭우 앞에 처마 밑에서 조금이라도 비에 젖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결국 모두가 눈먼 자들이 될 세상에서 눈이 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버티며 안간힘을 쓰는 과정인 것 같다. 미래에도 최소한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고자 돈을 벌어 주식 투자도 하고, 아파트 청약에도 기웃거린다. SNS에서 나를 잘 포장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언제 유용하게 쓰일지 모를 자산인 인맥을 관리한다. 외모를 가꾸고 좋은 책을 읽고 이런저런 공부를 하며 자기 계발을 한다. 요즘 시대에 평범한, 어찌 보면 아주 바람직한 생활이지만, 이 모든 기저에는 강력한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순간 방심하면 경계에 있는 나의 사회 계층적 지위가 자칫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강력한 불안 말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군인들은 감염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려 감염자와 자신들을 더욱더 철저하게 ‘구분’ 지었고, 자신을 지키고자 서슴없이 비인간적인 행동을 저질렀다. 이처럼 불안이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의 이성은 마비되고, 사소한 차이로도 타자로 규정해 배척하고, ‘나(우리)는 당신(들)과 다르다’라며 짐짓 자신을 포장해 부풀리기 마련이다. 급기야는 타자를 깔아뭉개고 조소(嘲笑)하며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를 입힌다. 욕심이 앞서서 누군가를 무시하고 상처 주고 싶을 때, ‘그래서 넌 얼마나 다른데? 너도 결국 똑같지 않아? 네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라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아직은 와닿지 않는 진실을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그럼, 대체 왜 이렇게 소모적인 일에 나의 감정, 시간,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지 정신이 번쩍 들고, 마음이 좀 누그러진다.


매일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평소 나름 우산도 꼼꼼하게 챙기기에 나도 내가 쏟아지는 폭우 속을 찢어진 우산 하나 없이 맨몸으로 걷게 될 줄은, 아늑한 실내에서 안타깝게 바라보던 장대비를 맞으며 지나가는 사람이 내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외출했다가 준비 하나 없이 갑자기 비를 맞는 사람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닥쳐올 수 있는 일이다. 운이 좋게 오늘은 내가 아니었을 뿐. 내일은 얼마든지 내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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