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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l 16. 2021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이루어지다

손을 잡는다는 것

입사 만 1년을 며칠 앞두고 사장이 말하길, ‘○○○ 씨는 말이야. 내가 1년 동안 지켜봤는데, 이 일이 적성에 안 맞아.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낫겠어. 이번 주까지 출근하면 만 1년 근무이니 퇴직금은 지급될 거야. 어떻게 생각해?’ …… 적성? 퇴직금? 지금 무슨 상황이지? 방금 내가 해고당한 건가? 지각 한번 없이 잘 다니던 회사에 갑자기 나오지 말라는데, 너 같으면 제정신이겠냐? 그렇게 연봉 2,000만 원에 휴가 제도가 없어서 휴가 한 번 사용하려면 쩔쩔매는 시늉을 하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던 회사에서, 그래도 정직원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어이없이 내쫓겼다. 대체 이런 회사에서 왜 더 일찍 탈출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료들이 인생을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좋은 사람들이고, 이때는 정말 책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열정을 다해 밤낮, 주말 없이 일하는 게 즐거웠다. 그만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억울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원룸 자취방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목놓아 꺼이꺼이 통곡하다가, 도저히 혼자 있을 자신이 없어서 캐리어에 짐을 싸서 우리집(엄밀히는 부모님 소유의 집)으로 무작정 가족을 만나러 갔다. 해소하지 못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어 몇 날 며칠 내리 잠만 잤다. 소화가 잘 안 돼 하루에 겨우 한두 끼 엄마가 끓여준 흰죽을 먹었다. 방에 혼자 멍하니 앉아있다가 눈물이 또르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왈칵 쏟아지면 쏟아지는 대로 더는 눈물이 나지 않을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가족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시간을 흘려보낸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책이 지겹지도 않은 지 침대에 누워있는데 책장에 꽂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결국 ‘사랑’으로 산다고 이야기하는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을 읽으며 ‘그렇구나’라고 감흥이 있는 듯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근심이 가득한 채로 좋은 말씀이 담긴 잠언집을 몇 권 더 무심하게 들춰보던 어느 날, 의외의 사람에게 문자를 한 통 받았다. ‘○○ 씨, 소개팅할래요?’ 잘린 회사 전에 잠시 근무한 스타트업 개발자 동료의 아내가 보낸 문자였다. 세부에서 인천까지 제발 무사히 착륙만 해달라며 불안한 비행을 견딘 추억을 공유한 사이지만, 그게 전부라 평소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 친분을 형성한 관계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동창 결혼식에 갔다가 모처럼 만난 동아리 선배인데, 두 사람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라는 뜬금없지만 나를 생각하는 언니의 마음이 고마웠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연애로 연결되지 않은 성공률 0% 소개팅에 염증이 나 몇 년 전 앞으로 소개팅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 잘 지켜오고 있었다. 그런데 일자리를 잃어 시간은 남아돌고, 우울한 감정이 바닥을 치자 마음이 바뀌었다. 과연 이런 감정으로 누군가와 대면할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었고, 소개팅은 나를 밖으로 꺼내 줄 지푸라기였다. 나는 바로 ‘네, 할게요!’라고 답장했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했다며, 미리 음료를 주문하겠다는 소개팅 상대가 보낸 카톡에 무난하게 평소 거의 마시지 않는 ‘아메리카노’라고 답했다. 커피보다 비싼 ‘허브티요’라고 답변을 해서 까다로운 인상을 풍기고 싶지도,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될지 모르는 이에게 비용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12월 추운 겨울날, 삼성역 4번 출구 근처 JJ 카페(Café at JJ)에서 처음 만났다. 한쪽 공간에는 T world 대리점이 입주해 있는 지금은 없어진 희한한 카페였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여의도 IFC 몰에서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고,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요즘 나는 식사량이 매우 적다며 만류해도 그는 음식을 푸짐하게 주문해서 결국, 절반은커녕 거의 먹지 못하고 너무 많이 남겼다. 나중에 과시하고 싶었냐고 물으니,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고 대답해 약간 울컥했다.




아주 가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드물게, 영화처럼 연출한 것 같은 인생의 순간이 있다. 내 이십 대의 마지막, 스물아홉 크리스마스가 그랬다. 요새는 예전만큼 거리에 캐럴이 울려 퍼지지도 않고, 매년 오르는 체감 물가에 마음의 여유도 줄어들어서인지 크리스마스라고 별로 특별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그래도 왠지 크리스마스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처럼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거나 사랑이 이루어져야 할 것만 같은 날이다. 내게도 평생 단 한 번,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영화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별 기대도 없이 그저 잠시 기분전환 겸 말벗이나 해도 좋겠다는, 순수하지만은 않은 속셈으로 만난 소개팅 상대와 크리스마스이브에 처음으로 손을 잡고 우리는 연인 사이가 되었다. 우리의 세 번째 만남이자 진정한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날 우리는 합정의 한 호프에서 치킨에 맥주를 먹고, 합정역에서 홍대입구 경의중앙선역까지 길게 이어진 대로를 따라 나란히 걸었다. 다른 사람에게 우리는 연인처럼 보일까? 어색한 사이라고 티가 날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까? 하필,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서 우리 사이엔 더욱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내가 그의 손등을, 그가 나의 손등을 닿을락 말락 살짝, 살짝 스쳤다. 둘 다 말없이 자신의 손과 상대방의 손을 의식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손을 주머니에 넣어버릴까? 그럼 의식하는 티가 너무 나잖아. 상대방은 별 감정도 없는데 괜히 내가 밀어내는 것도 같고. 어떡하지? 어떡하지? 싶은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운 가운데 우리는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길 기다리며 멈춰 섰다.


“우리 손잡을까요?’


갑자기 침묵을 깬 나지막한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요.”


라고 수줍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며, 그가 내민 손에 장갑 낀 내 손을 살포시 포갰다.


“따뜻하네요.”


온 신경을 찌릿하게 맞잡은 어색한 손에 집중했고, 거리에 멈춰 선 엑스트라 사람들 사이로 다정하게 손잡은 주인공, 우리 두 사람이 걸어가는 연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영화처럼 달콤하게 크리스마스이브에 나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손을 잡는다는 것.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이처럼 간질이고 설레는 순간이 있을까. 손을 잡는 행위는 비단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보통의 아무 관계에서 할 수는 없는 만큼 얼마나 특별하고 따뜻한지. 어른은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걸어 다니고, 누군가가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두 손을 꼭 잡아 슬픔을 위로하고, 처음 만난 이에게 약수를 건네 호감을 표현하고, 거듭된 실패에 좌절해 눈물짓는 이에게 두 손을 포개서 마음을 달래 주고, 여럿이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손과 손을 맞잡아 서로의 체온을 전하며 헤쳐나갈 기운을 내고, 다툰 뒤에는 서로 살포시 손을 마주 잡아 화해한다. 이처럼 손을 잡는다는 것은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고, 삶에 온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고, 상대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고, 특별한 관계를 선언한다는 표시이다. 그래서 난 로맨스 영화에서 연인 간에 키스하거나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장면보다 몽글몽글 처음으로 손을 잡는 장면에서 유난히 더 두근거린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마침 바라던 회사에서 내 포지션에 입사 후 보름 만에 갑자기 그만둔 직원이 생겨서 입사 지원 제안이 들어왔고, 나는 그 기회를 잡아서 운 좋게도 해를 넘기기 전에 다시 출근했다. 급여도 높아졌고, (당연하지만) 정식으로 휴가를 사용할 수 있고, 유능한 동료와 선배에게 업무적으로 배울 점도 많았다. 해고한 사장은 나에게 도서 마케팅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훨씬 나은 업무 환경에서 매년 업무 성과와 성취를 인정받았으니, 인면수심(人面獸心)한 사장에게 ‘당신의 말은 완전히 틀렸다’라고 제대로 증명해서 톡톡히 복수한 셈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몰라 자책하던 암흑 같던 나날에 불현듯 찾아온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이십 대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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