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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Oct 01. 2021

갑자기 비를 맞는 사람이 정해져 있지 않다

폭우와 눈먼 자들의 도시

*2021년 7월 15일에 발행한 글(https://brunch.co.kr/@smilepearlll/172)을 퇴고했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비가 지겹게 내리더니, 올해는 오는 듯 마는 듯하다가 벌써 장마가 끝난 모양이다. 7월 중순도 되지 않았는데 무더위와 열대야가 성큼 찾아왔다. 작년에는 장마가 너무 길어서 밖에 나가기 꺼려져 우울하다고 했다(2020년 중부지방의 장마 기간은 총 54일로, 1973년 이후 가장 긴 장마를 기록했다). 올해는 장마가 장마 같지 않다며, 잿빛 먹구름이 잔뜩 끼어 종일 찌푸릴 바에야 차라리 시원하게 쏟아지라고 말하고 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흥흥거리는 나라는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를 사랑하지만, 만일에 다음 생이 있다면 미국의 캘리포니아나 호주의 시드니, 멜버른처럼 1년 365일이 봄, 가을처럼 따뜻하고 선선한 해안가 도시에서 태어나고 싶다. 날씨가 매일 온화하고, 적당히 복잡하며 언제든 바다를 볼 수 있는 도시에 산다면 내 성격도 마냥 밝지 않을까. 물론,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그곳 나름대로 문제와 고충이 있다. 더욱이 인간은 날씨 하나로 성격이 결정될 만큼 절대로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하도 불평을 하니 하늘이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하루는 공원에서 운동 중인데 집에 있는 배우자가 전화를 했다. ‘우산은 갖고 갔니? 지금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져. 우산 없으면 빨리 지하철 타고 와. 내가 역으로 마중 나갈게’ 똑, 똑, 통화 중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몇 초가 지났을까. 뚝 뚝 뚝 뚝 후두득 후두득 뚝 뚝, 비구름은 거센 바람을 타고 5G, LTE보다 빠르게 2km 떨어진 집을 지나 공원 위 하늘을 뒤덮었다. 후둑 후둑 후둑 후둑 솨아아아~~~~~, 이내 거대한 양동이로 들이붓듯이 무자비한 빗줄기가 쏟아졌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는 눈을 찌르고,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시야를 가로막았다.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백만 번을 한 기분이 들었다.


간신히 공원을 빠져나와 인도에 들어섰다. 정수리부터 운동화 안쪽까지 다 젖은 마당에 이젠 비를 피하려고 지하철을 탈 필요는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희뿌연 빗속을 뚫고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서 집에 가기. 이것이 그칠 기미 없는 세찬 빗줄기를 가장 빠르게 벗어나는 방법이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처절한 상황에도 금세 적응했다. 나처럼 우산 없이 전신에 빗물을 뒤집어쓰고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묘한 위로를 받는다. 때마침 반대쪽에서 걸어오던 아저씨가 ‘이거요’라며 손에 들어있던 스티로폼 상자 뚜껑 하나를 내주었다. 상자 뚜껑에 택배 송장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 분명 어딘가 버려진 쓰레기를 주운 것일 테다. 그러나 양손을 이마 앞에 모아서 비를 피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스티로폼 뚜껑은 이날 시야를 확보하는데 더없이 유용했다.


아직 비에 젖지 않은 사람들은 가게 처마 아래에서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를 기다렸다. 당신들은 좋겠다. 나처럼 비에 흠뻑 젖지 않아서. 그런데 그거 아시는지? 비에 홀딱 젖으니까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비에 맞지는 않을지 걱정할 필요도 없고, 언제 비가 그칠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거든. 버스정류장에 서 있다가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에 옷에 빗물이 튈까 봐 가슴 졸이지 않아도 되거든. 요즘 같은 코로나 상황에서 갈 수 없는 워터파크에 온 기분도 들고. 정신 승리라고 해도 상관없다. 처량한 신세라고 한탄만 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날 폭우는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라 몇 시간 지속하였다. 비를 피하던 사람들도 결국은 비에 젖는 상황을 감수하고 이동했을 것이다.




주제 사마라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이 소설은 도시 전체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눈이 머는 전염병이 퍼지면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일을 그리고 있다. 처음에 실명한 이들은 현재는 쓰지 않는 빈 정신병원에 격리한다. 수용 인원이 많지 않을 때는 완전히 눈이 먼 자들, 이들과 접촉했지만 아직 눈이 멀지 않은 자들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공간에서 생활한다. 하지만 실명자가 급증하자 수용소는 과포화 상태에 이르러 공간 구분은 곧 의미를 잃는다. 군인들은 감염자들이 함부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울타리에서 보초를 선다. 이들은 무엇인가 요청하려고 건물 입구까지 왔다가 발을 헛디뎌 건물 아래로 굴러떨어진 수용자조차 가차 없이 총으로 쏴 죽인다. 하지만 수용소에 식량이 떨어지고 화재가 발생하자 수용자들은 총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건물을 탈출한다. 뜻밖에 군인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비상식적으로 수용자를 사살하면서까지 자신을 지키고자 한 군인들도 모두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이다. 의사의 아내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눈먼 세상에서 격리를 위한 수용소도 더는 존재할 의미가 없었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_<눈먼 자들의 도시(주제 사마라구, 정영목 옮김, 해냄출판사, 2002.11)> 463쪽 중에서




내 삶의 모든 순간이 처마 밑에서 손톱만큼도 폭우에 젖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사람 같다. 모두가 눈멀게 될 세상에서 혼자만 눈이 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군인 같다. 남들 다 한다고 믿는 주식에도 투자하고, 아파트 청약에도 기웃거린다. SNS에서 자신을 잘 포장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언제 유용하게 쓰일지 모를 인맥을 관리한다. 외모를 가꾸고 책을 읽으며 자기 계발에도 매진한다. 요즘 시대에 평범함, 어쩌면 바람직한 생활이다. 하지만 기저에는 방심하면 경계에 걸친 사회 계층적 지위가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강력한 ‘불안감’이 깔려 있다.


“사람들은 대개 위협당할 때 형편없이 변하게 되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나 경제와 같은 것들이 사람들을 협박하거든. 우리 경제 제도 안에서는 직장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위협을 느끼지.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모르니까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그리고 사람은 위협받기 시작하면 자기만 생각하기 시작하네. 돈을 신처럼 여기게 되는 거야.” _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공경희 옮김, 살림출판사, 2010.01.27)> 228쪽 중에서


욕심에 눈멀어 약한 타자(나보다 불안감이 높은 사람)를 배척하고 ‘나는 그들과 달라’라는 마음이 들 때면, ‘그래서 넌 얼마나 다른데? 너도 결국 똑같지 않아? 네가 누군가를 배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라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아직은 와닿지 않는 진실을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그럼, 대체 왜 자신과 타인을 애써 구분 짓는 소모적인 일에 감정, 시간,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지 정신이 번쩍 들고, 마음은 좀 누그러진다. 맑은 날 안심하고 외출했다가 갑자기 비를 맞는 사람이 정해져 있지 않다. 운 좋게 오늘은 내가 아니었을 뿐. 내일은 그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다.


“인류라는 대가족에 관심을 가져야 하네. 사람들에게 애정을 쏟게. 자네가 사랑하고 자네를 사랑하는 작은 공동체를 세우란 말일세.” _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공경희 옮김, 살림출판사, 2010.01.27)> 231쪽 중에서




P. S.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매일, 매번 갈등과 선택이라는 시험대에 오른다. 더 나은 방향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거울삼고자 이 글을 쓴다. 그런데 이 순간에도 ‘모리 교수나 교황님, 덕이 높은 스님 정도는 되어야 번민 없이 이처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평범한 소시민은 대부분 나처럼 적당히 이기적이고 때때로 타인을 배려하며 살아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소인배가 대인배인 척 살아가려니 힘이 든다. 계속 ‘그런 척’ 하다 보면 언젠가 바라는 모습으로 거듭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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