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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l 30. 2021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K 교수의 마지막 강의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네(p.252)’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루게릭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모리 교수가 세상을 떠나기 전 서너 달 동안 그의 제자 미치와 매주 화요일에 만나 ‘인생의 의미’에 관해 나눈 생각을 정리한 책이다. 가족, 죽음, 돈, 용서, 자기 연민, 나이 드는 두려움, 사랑의 지속 등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반추하게 된다. 나는 모리처럼 사적으로 만나 인생 수업을 할 만큼 가까운 스승은 없지만, 이 책을 볼 때마다 가슴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K 교수님이다.




겉옷으로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입을지 옷장에 보관한 코트를 꺼내 입을지 고민하는 11월 말이었다. 차가운 늦가을 공기를 젊음의 기운으로 밀어낸 활기찬 캠퍼스를 가로질러 강의실에 도착했다. 정각을 지나서 1분, 2분, 3분, 4분, …… 시간이 흐르고, 대강 5분이 지났을 때 기다리던 교수님 대신 조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교수님 개인 사정으로 오늘 강의를 취소합니다. 갑자기 취소해서 여러분께 죄송하고, …… 오늘 못한 강의는 다음에 보완 ……’ 조교는 대략 이런 내용을 전달했다. 오, 예스! 공강이다! 등록금을 고려하면 강의 취소를 항의해야 마땅한데, 조모임, 보고서를 비롯한 빡빡하게 쌓인 할 일을 떠올리니 갑자기 생긴 공강 시간이 이토록 달콤할 수 없었다.


며칠 뒤 다음 강의 시간, 정각을 지나서 1분, 2분, ……, 이번에는 3분 만에 다시 조교가 나타났다. ‘오늘 강의도 취소합니다. 교수님께서 정말 죄송하다고, 다음 수업 시간에 본인이 직접 해명하시겠다고 전해달라셨어요’ 뭔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누군가 어떻게 알았는지 얼마 전 교수님은 동료 교수들과 논문 심사 중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일이 있었다고 소식을 전했다. 교수님의 불행을 모른 채 강의가 취소되었다며 마냥 좋아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 좋지 않은 소식에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정황상 교수님의 건강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할지도 모른다고 직감했다.


다음 시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교수님이 먼저 도착해서 학생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교수님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대한민국 성인 남성 평균 키와 체격을 한 지극히 평범한 외모였다. 그런데 이 중년 남성은 일주일 새 표시가 날 만큼 체중이 급격히 줄어서 평소 입던 옷이 꼭 남의 것을 빌린 듯 헐렁했다.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정각이 되자 교수님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강의는 여러분과 제가 한 약속인데 두 번이나 일방적으로 취소해서 죄송합니다. 지극히 사적인 일이지만 왜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지 양해를 구하려면 제 사정을 자세하게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얼마 전 쓰러져서 응급실에 가게 되었고,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상태인지 검사를 받는 것조차 체력적으로 만만치 않았고, 특히 지난번 강의는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병이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더라고요. 앞으로 몇 번 남은 강의는 아마도 하기 어려울 것 같고, 시험은 배운 범위 안에서 출제하겠습니다. 내가 겪어 보니 암이란 게 ……’


그리고는 갑자기 ‘암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 과목은 원래 인터넷 관련 소송 사례를 분석해서 인터넷 법률을 이해하는 수업이다. 교수님은 우리나라보다 먼저 인터넷 분쟁과 갈등을 겪고 있던 미국의 다양한 인터넷 소송 사례를 주로 설명했다. 그런데 오늘은 칠판에 수업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암’이라고 쓰고는 왜 암에 걸리는지, 암의 주요 종류와 위험성(치명률), 암의 진행 발달 단계, 병의 진행 시기마다 적합한 치료법, 일단 암에 걸렸다고 알게 되면 어떤 조치를 해야 할지(예를 들면, 가족과 회사 등에 어떻게 알리고 어떤 도움을 얻어야 할지 아주 구체적인 팁), 마지막으로 예방하려면 평소 생활 습관이 중요하다고 마치 의학자처럼 의학 특강을 들려주셨다.


그는 지난 일주일 동안 암이라는 병마에 관해 알게 된 지식을 분석하고 체계화해서 핵심만 정리해 쏟아냈다. 심지어 적합한 치료법을 설명할 때는 자신의 현재 상태가 수술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단계라고 본인을 예로 들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평소 강의할 때 목소리 그대로라서 교수님 본인이 아니라 책에 실린 일반적인 사례를 소개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날 나는 ‘열정 넘치는 진지한 학자이자 교육자’의 모습을 보았다. 일주일 동안 자신이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공부한 지식을 정리한 대중 의학 강의는 체계적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급조한 강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평소 교수님이 관심 있고 잘 아는 자신의 학문 분야에는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갖고 연구에 몰두했을까. 그런데 K 교수님은 자신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강의에서 반평생 받쳐온 학문 분야를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이 뒤늦게 깨달은, 그러나 젊은이들이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학 상식 핵심을 정확하고 꼼꼼하게 전달하고 싶어 했다. K 교수님의 나지막한 음성을 따라가면 지난 일주일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고, 현재 신체적, 정신적으로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어렴풋하게 헤아릴 수 있었다. 그의 말처럼 다음 수업은 열리지 못했고, 이 수업은 K 교수님과 우리의 마지막 수업이 되었다.




나는 이듬해 졸업해서 회사원이 되었다. 학교와는 다른 직장과 사회의 룰(Rule)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했다. 일을 잘해서 인정받고 싶었으나 (실제로는 별 능력도 없으면서) 왜 이리 하찮은 일만 주어지는지, 대체 하루 내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운 나날이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저녁이나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서 식당, 카페, 주점을 전전했다. 영화를 보고 가끔 여행도 가고 데이트도 하면서 정신없는 일상을 보냈다. 모리 슈워츠 교수의 제자 미치 앨봄이 그랬던 것처럼 그날 수업 이후 K 교수님은 내 기억에서 까맣게 지워졌다.


몇 년이 흐른 뒤 SNS에서 우연히 K 교수님의 부고 소식을 알게 되었다. ‘아, 결국엔……’ 갑자기 짧아진 머리에 부쩍 수척해진 모습으로 담담하게 의학 특강을 펼치던 교수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의 종료 시간이 되자 똑딱 하고 뚜껑이 닫히던 보드 마커와 여느 때처럼 우리에게 ‘이제 가보라’라고 말하던 교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왜 그랬을까. 나는 미치 앨봄과 달리 교수님의 수업을 여러 개 듣지도 않았고, 개인적으로 특별한 친분을 형성한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K 교수님이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11월 말이 되면 불현듯 그즈음 들었던 K 교수님의 마지막 강의가 아스라이 생각난다. 잘 알지도 못하는 그분이 내 가슴속에 남아있다.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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