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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Nov 18. 2020

‘너 우울증 아니니?’라는 상처 주는 농담

말이 칼이 될 때

여러 가지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지인이 있었다. 평소 쾌활하고 농담도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계속 풀이 죽어 있었다. 모임에서 다른 지인이 분위기를 바꿔보겠다고 농담을 던졌다.


‘너 우울증 아니니?’


한숨을 내쉬던 지인은 그 장단에 맞춰서 아니라고 펄쩍 뛰는 시늉을 했다. 자신 때문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미안했는지 평소보다 더 과장된 몸짓을 선보였다. 덕분에 사람들은 까르르 웃어 넘어갔고 침체된 분위기는 가볍게 반전되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갑자기 목에 가시가 턱 걸린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우울증은 가벼운 농담으로 삼을 만한 웃음거리가 아니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몇 날 며칠 속앓이를 했다. 조울증(양극성 장애) 가족을 둔 사람에게 가벼운 농담은 가슴에 비수로 꽂혀서 잘 아물지 않았다.


감정 기복이 심하다며 ‘너 생리 중이니?’라고 던지는 농담이 얼마나 무례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으려고 한다. 꼭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침 좀 한다고 ‘너 폐암 아니니?’, 소화가 잘 안 된다며 ‘너 위암 아니니?’라고 끔찍한 농담을 던진다면? 바로 욕지거리가 날아오지 않을까. 주변 사람도 농담 던진 이를 비난하고, 앞으로 그와의 만남을 경계하지 않을까.


‘너 우울증 아니니?’ 이 말을 농담으로 던지고, 다른 사람들이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우울증을 심각한 질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심각한 질환을 잘못 이해해서 우울증과 우울한 감정을 혼동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우울증을 겪어서 가족 모두가 힘들었대’라던가, 지나가는 기사로 가끔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고는, ‘우울증이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정도로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말았을 테다. 어쩌면 우울증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기사에 ‘나 같으면 그럴 용기를 갖고 악착같이 어떻게든 살아가겠다’라는 답답한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특히 유머로 던진 말에 정색을 하고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유머와 놀이를 가장한 비하성 표현들은 그렇게 ‘가볍게 만드는 성질’ 때문에 역설적으로 ‘쉽게 도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이런 언어 공격은 인간 내면의 아주 본질적인 부분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는 반면, 그 말이 왜 문제인지 설명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설명할 기회의 순간은 짧다. 우리는 대개 말문이 막힌 채 그 찰나의 기회를 놓친다. _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2019.07.17)> 98쪽 중에서




가족은 조울증을 겪고 있다. 증상은 정신과 전문의들이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울증상태와 조증상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우울증상태인 기간이 훨씬 길다. 우울증 기간은 조증 기간보다 적게는 3.7배에서 많게는 37배라고 한다. 우울증의 우울기와 비교했을 때 조울증의 우울기는 더 젊은 나이인 10~20대에 시작한다. 가족의 경우 10대 후반에 한평생 짊어져야 할 사악한 악마가 찾아왔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학교와 제도에 비판적이고 사회에 순응하지 못하는 우울한 상태였다. 초기 우울증상태일 때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똑똑하고 사려 깊은 아이에게 늦은 사춘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해서 방황의 시기가 지나가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불과 15년 전만 하더라도 대중에게 우울증이나 조울증 등 정신 질환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만큼 정보도 거의 없었으며, 정신과 문턱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아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동생 자신과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동생이 아픈 상태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할 것 같다. 결국, 몇 년 동안 병을 키워서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동생이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고 자각했다. 그런데 가까스로 입원을 마친 뒤 의료진에게 치료 과정과 방법에 관한 설명을 들을 때도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건가. 과연 입원이 최선인가. 우리가 더 보듬고 관심을 가지면 나아지지 않을까’ 당시 우리는 이 질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원 당시 가족은 오랫동안 우울증상태를 겪다가 어느 순간 ‘지나치게’ 쾌활하고 의욕 넘치는 조증상태를 보였다. 한 번이라도 조증이 나타난 환자는 지속적인 우울증 증상을 보이더라도 조울증으로 진단한다. 조울증은 충동적 행동을 일으키기 쉬워서 우울증만 앓는 것보다 위험하고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무엇보다 우울증과 조울증은 치료약이 다르므로 의사에게 정확한 증상을 알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 가족처럼 우울 증상이 먼저 생긴 뒤 나중에 조증이 나타나는 경우가 약 70%라고 한다. 많은 환자가 이처럼 우울증 증상으로 병이 시작되기에 처음부터 조을증을 진단받는 환자는 30%에 불과하다. 따라서 주변 사람에게 ‘최근 들어 성격이 변한 것 같다’라는 말을 듣거나 스스로 판단하기에 기분이 가끔 전과 달리 ‘과도하게’ 좋고 활발해질 때가 있다면 의사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JTBC 드라마 <뷰티 인사이드>에서 강사라(이다희 扮)의 사이다 발언이 인상적이다. 


“대표님, 사는 거 무지 행복하시죠. 불편한 거 하나 없이. 그거 무식해서 그래요. 공부 안 해서. 공부 안 한 거 티 좀 내고 다니지 마세요. 부끄럽지도 않나. 하긴, 뭘 아는 게 있어야 부끄러운 것도 알지. (김 대표: 야, 야, 야!) 아, 시끄러. 어디서 개가 짖나. 개가 왜 사람한테 말을 걸어.”


오빠 서도재(이민기 扮)에게 자극받아 자신에게 성차별 발언을 일삼던 김 대표가 마침 전화를 하자 강사라가 던진 직설이다. ‘못 배워서’가 아닌 ‘공부 안 해서’라고 표현한 세심한 대사가 좋다. 못 배운 것은 경제적 상황, 건강상 이유 등으로 타의를 반영한 결과이다. 하지만 공부를 할지, 말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여기서 공부를 책 읽고 시험 보는 글을 매개로 한 행위만을 일컫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보고 듣고 깨닫는 넓은 의미를 포괄하고 있으리라. 중요한 것은 주변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자세이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공부를 할 마음만 있다면, 서적, 사람, 자신의 인생, 드라마와 영화 등 학습 자료는 무궁무진하다.


사실 그래서 나는 독서가 좋다. 책은 타인이 경험한 인생의 진수를 함축하고 있다. 타인의 속마음을 단시간에 깊숙이 들여다보기에 이처럼 효율적일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잘 만든 토크쇼도 좋아한다. 요새는 다양한 성장 배경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즐겨 본다.


책과 토크쇼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 즉, ‘금지어’를 배운다. 입양된 분들에게 ‘힘들었겠다’, ‘부모님께서 잘해 주시니?’라고 묻거나 비혼 또는 미혼인 분들에게 ‘너는 결혼 안 해서 좋겠다. 혼자만 신경 쓰면 되잖아’라고 건네는 말은 무례한 발언이라고 깨달았다. 장애가 있거나 지병이 있는 분들께 지나친 친절은 오히려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고 알게 되었다. 가족동반자살이라는 안타까운 표현 속에서 아이들의 살 권리는 빠져 있다고 의식하게 되었다. (아동 보호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남겨진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힘겨운 삶과는 별개로.)




그런데 정작 우울증 농담을 던진 지인에게는 고민 끝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잘 모르고 말을 한 사람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별로 가깝지도 않은 사이인데 괜한 지적으로 서로 불편한 관계에 놓이고 싶지도 않았다. 무지한 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무지해서 누군가 상처를 입는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당시에는 무지한 사람을 탓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지한 탓으로 비겁했고 상황을 바로잡지 못했다. 부디 그사이 스스로 인생 공부를 해서 잘못을 깨닫는 계기가 있었기를 바란다. 같은 실수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반복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다른 이가 나처럼 상처받았다면 상황을 바로잡지 못한 나에게도 책임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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