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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Apr 14. 2021

"나 여기 맥주 줘. 오늘은 낮술 해야겠다"

우연히 만난 단골 막국수 사장님

며칠째 혓바늘로 고통받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구분도 잘 안 되는 작은 돌기가 나을 듯 낫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단백질과 비타민이 부족한가 싶어서 저녁에 초밥으로 영양을 보충하기로 했다. 집 근처 단골 일식당에 갔다. 사장님이 요리사이자 웨이터이자 매니저로 혼자 운영하는 작은 심야식당이다. 조리 공간을 기역으로 둘러싼 바 테이블 여덟 자리가 전부인 소박한 가게이다. 일전에 사장님과 말씀을 나누기로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일일이 신선한 재료를 공수해 오신다고 했다. 재료가 좋은 만큼 한끼 식사로 약간 부담되는 가격이지만, 식사를 마친 뒤 한 번도 만족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표 메뉴인 초밥 정식을 주문하고 멍하니 사장님께서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쨍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들리면서 여성 한 분이 들어오셨다.


“나 여기 맥주 줘. 오늘은 낮술 해야겠다.”


7월 말 한여름이라서 오후 6시에도 창밖은 대낮처럼 여전히 환했다. 누구시지? 사장님 지인이신가? 심야식당 사장님께서 나에게 대뜸 말을 건네셨다.


“아시죠? 막국수 사장님이시잖아요.”


여성 분은 단골 막국수 식당의 사장님이셨다. 어렸을 때 아버지 고향인 춘천에 갈 때면 어른들이 벌초를 마친 뒤 꼭 막국수 한 그릇을 비우곤 했다. 춘천 토박이인 이모할머니(할머니의 여동생)께서 만들어 주신 막국수가 그리워서 서울의 몇몇 유명 막국수 전문점을 가봤지만 늘 약간씩 아쉬웠다. ‘속는 셈 치고 한번 먹어보자’라며 지근거리에 새로 문을 연 막국수 식당에 갔는데, 바로 찾던 그 맛이었다. 삼삼하고 고소하고 적당히 간이 밴 맛. 이후, 막국수 식당을 한 달에 두세 번은 들렀다. 입맛에 딱 맞는 그리워하던 음식을 발견한 기쁨이란!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이 하나 더 늘었다.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편안한 복장을 한 막국수 사장님은 낯설었다. 손님과 가게 주인으로 마주치다가 둘 다 손님으로 나란히 테이블에 앉아있으니 뭔가 어색했다. 그런데 지금 한창 저녁 장사로 바쁠 시간인데 여기에서 이러고 계셔도 되는 건가?


“남자 사장님(배우자로 추정)이 오늘에야 힘들다고 뻗어버렸지 뭐야.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오늘 장사는 접고 나와버렸어. 아예 여름휴가를 내야 할까 봐.”


조리를 담당하는 남자 사장님께서 꾸역꾸역 버티다가 결국 번아웃되신 모양이다. 여자 사장님의 말씀에서 그녀의 시원한 성격과 자영업자의 고단함이 묻어났다.


“아이고, 휴가를 가버리시면 어떡해요. 난 막국수 먹으러 한 달에 스물두 번은 가는구먼. 저는 어찌하라고요.”

심야식당 사장님은 너스레를 떨었다. 두 분이 서로 반말과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친밀한 관계였다니. 소리소문 없이 연애하다가 생뚱맞게 청첩장을 스윽 내미는 의외의 동창 커플이나 사내 연애 커플을 알게 되었을 때만큼 충격적이진 않지만, 예상치 않은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가게에는 심야식당 사장님, 막국수 사장님, 나 이렇게 세 사람밖에 없어서 맥주를 들이켜던 막국수 사장님과 말문을 텄다. 사장님은 3대째 막국수 전문점을 운영하고 계신다고 했다. 역시나 대대로 전해진 숨겨진 맛의 비법이 존재할 줄 알았다. 메밀은 쉽게 상해서 오래 보관할 수 없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막국수는 어른들이 많이 찾으시는데, 젊은이보다 어른 입맛을 맞추는 게 까다롭다고. MZ세대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이야말로 취향이 분명하고 주관이 뚜렷하지 않은가? 사장님은 아무래도 어른이 시식과 요리 경험이 풍부해서 맛에 더 예민하다고 했다. 하긴, 나만 하더라도 나이가 들수록 입맛을 비롯한 각종 취향의 호불호가 점점 분명하고 까다롭다고 느낀다. 타인과 대화를 나누며 막연한 고정관념을 또 하나 바로잡는다. 그녀의 말에는 막국수 사장으로서 자부심과 진지한 태도, 프로 정신이 묻어났다.


이때다 싶어서 평소 마음에 담아둔 막국수 식당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서울에서 막국수 전문점이 흔치 않은데, 동네에 맛있는 음식점이 생겨서 기쁘다. 여름이면 코다리 냉면을 먹곤 했는데, 요새는 맛은 비슷하면서 면은 더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는 사장님께서 만들어 주신 막국수를 찾는다. 아버지 고향이 춘천이라 어릴 때부터 막국수를 자주 먹었는데, 사장님이 요리하신 막국수는 자극적이지 않고 간이 심심해서 춘천에서 먹던 그 맛이 난다. 감자전도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다…… 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심야식당 사장님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감자가 다 거기에서 거기겠지. 뭐, 특별히 맛있으려고요. 다음에 저희 가게 오실 때 막국수 사장님 못지않은 감자 썰기 신공을 보여드릴게요.”


유쾌한 빈정거림이라니. 못 말린다, 정말. 누구보다 음식 맛에 민감할 요식업 종사자가 맛있지도 않은데 막국수를 먹으러 한 달에 스물두 번을 간다고 말하겠는가. 단골 가게 사장님 두 분과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즐거운 대화였어요’ 식사를 마친 뒤 계산을 하고 먼저 문을 나서는데 막국수 사장님이 인사했다. 나도 그랬다.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뭉클했다.




어느덧 반년이 지나 어느 겨울에 집 앞 카페에 테이크아웃을 하러 갔다. 통창 너머로 평소 말씀이 많지 않은 카페 사장님께 누군가가 서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우유 등을 정기적으로 납품하는 거래처 분인가? 했는데 어딘가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맙소사! 심야식당 사장님이셨다. 언젠가 내가 그 카페를 언급했을 때 별 반응이 없으시더니 언제 또 친분을 쌓으셨는지 신출귀몰한 친화력이다.


그러나 대화 내용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거리두기가 강화돼 포장 영업밖에 할 수 없는데, 심야식당의 메뉴는 포장에 적합하지 않다고. 포장에 적합한 메뉴를 개발 중이지만, 자신처럼 작은 식당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 배달은 엄두를 낼 수 없다고 하셨다. 굳게 문이 닫힌 막국수 가게에도 당분간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안내문이 쓸쓸하게 붙어있었다. 일상을 위협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과연 끝나는 날이 올까. 전염병 종식에 수십 년 내지는 수백 년이 걸린 역사를 돌이켜보면 야외에서 사람들과 마음껏 웃고 떠들던 시절을 내가 다시 누리기는 힘들지 않을까. 우연히 만난 인연으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지난여름이 유난히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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