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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Aug 11. 2021

보복 운전을 당했습니다

처음 혼자 운전하던 날

나는 워낙 겁이 많다. 나의 겁쟁이 기질은 유아기 때부터 눈에 띄었다. 돌 무렵, 분명히 혼자 걸을 수 있는데 어찌나 겁이 많던지 벽에서 손을 떼지 않고는 걷지 않았다고. 또래 사촌이 놀러 와 걷는 모습을 보더니 그제야 혼자서 걸을 용기를 냈다고 한다. 공이 무서워서 학창 시절 피구, 배구, 발야구, 축구, 농구 등 모든 구기 종목을 기피했고(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뿐, 열심히 참여는 했다), 또래 집단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면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기구는 절대 타지 않았을 것이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작은 벌레에게도 질겁해서 꿈꾸는 교외 생활은 어려울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던데. 내가 조금 덜 겁쟁이였다면 적어도 내 인생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수능시험을 마친 뒤 가장 하고 싶은 일로 운전면허 취득을 꼽곤 한다. 나 같은 졸보(?)는 당연히 운전면허에 관심이 없었다. 자동차와 운전에 어느 정도 관심이 없는지 말한다면, 나는 이십 대 후반까지 자동차를 브랜드와 차종이 아닌 색상으로 구분했다. 검은색, 흰색, 회색은 흔한 차,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은 흔치 않은 차. 그야말로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인생 아닌가. 미루고 미루다가 회사 업무 때문에 꼭 운전을 해야 해서 도로 주행에서 한 번의 고배를 마신 끝에 결국, 삼십 대 중반에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하지만 겁쟁이 기질이 어디 가겠는가. 보통 10시간에서 20시간을 받는다는 운전 연수를 40시간을 받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단독 주행을 하는 날이 다가왔다.




회사 차량에는 일찌감치 다음 날 사진 촬영에 필요한 소품을 잔뜩 실어놓았다. 오늘 이 차를 끌고 회사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집으로 퇴근할 것이다. 연수 선생님 없이 처음 하는 단독 드라이브이다. 다음 날에는 일산 집에서 이 차를 몰고 출발해 오전 10시까지 홍대에 있는 촬영 스튜디오에 갈 것이다.


저녁 8시, 마침내 혼자서 운전석에 앉았다. 배운 대로 편한 자세로 앉아서 사이드미러를 조정했다. 안전벨트를 맨 뒤 브레이크를 밟고 시동을 걸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푼 뒤 액셀을 살짝 밟고 핸들을 서서히 움직여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금세 호수공원 옆으로 길게 뻗은 왕복 6차선 호수로에 진입했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 도로에 차가 많지는 않지만, 등을 곧추세웠고 긴장해서 몸은 굳었다. 차분하게 ‘운전도 별것 아니네’라고 자기 암시를 걸며 수월하게 주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빵!!!!!!!!!!!!!!!’ 뒤차가 경적을 길게 울리더니 미친 듯이 속도를 높여서 내 차 앞을 가로질러 그대로 가버렸다. 맙소사…… 내가 뭘 잘못했지? 앞차와 간격도 잘 유지하고, 차선도 잘 지켰는데…… 고막을 뚫는 경적에 심장이 요동쳤다. 혹시 나도 모르게 민폐를 끼쳤나 싶어서 의기소침했다.


이제 골목에서 몇 번 꺾으면 고대하던 집이었다. 골목으로 진입하기 전, 왕복 2차로인 작은 삼거리에서 녹색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빠앙~~~~~’ 또 뒤차였다. 내가 뭘 또 잘못했지? 가뜩이나 앞선 경적 때문에 위축되었는데, 당장 운전을 때려치우고 싶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맞다. 우회전은 보행자가 없으면 신호 안 받고 해도 되지. 오도 가도 못하고 내 차 뒤에서 시간을 허비한 뒤차 운전자에게 미안했다.


조심조심 우회전해서 집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섰다. 그런데 뒤차가 나를 쫓아오는 싸한 기분이 들었다. 골목 끝에는 내가 살던 원룸이 있고, 중간에 다른 건물은 없다. 원룸의 거주자가 아니라면 이 골목으로 들어설 이유가 없다. 원룸 앞에 바로 주차를 하지 않고, 원룸 건물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예감이 틀리길 바랐는데, 뒤차는 내 차를 쫓아서 똑같이 한 바퀴를 빙 돌았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이것이 설마 말로만 듣던 보복 운전인가. 머리끝까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극한의 스트레스로 머릿속이 텅 비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내가 우회전을 늦게 해서 기다린 게 기분이 나빴다고 치자. 그래도 보복 운전은 경우가 아니지.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따라오기까지 하냐고.’ 자포자기한 채 일단은 주차를 하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두려운 마음으로 뒤차 운전자도 내리길 기다렸는데, 운전자는 내리지 않고 대신 운전석 창문을 열었다. 맙소사! 창문 너머 보인 얼굴은 같은 팀 동료인 차장님이었다.




“운전 아주 잘하셨어요. 너무 걱정하시길래 운전을 정말로 못 하시는 줄 알았잖아요. 내일 운전해서 홍대까지 가는 데 아무 문제없겠어요”


이날 나는 첫 단독 주행을 앞두고 같이 야근하던 차장님께 긴장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차장님은 퇴근길에 주차장에서 우연히 내가 차를 몰고 가는 모습을 보고는, 운전을 잘하는지 염려돼 집에 가는 길에 잠시 들러 따라오셨다고 했다. 삼거리에서 경적을 울렸을 때, 내가 이미 차장님이 따라온 것을 눈치챈 줄 아셨단다. 백미러로 뒤차 운전자를 확인할 정신이면, 차장님께 운전 걱정을 털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호수로에서 시끄럽게 빵빵거리면서 앞서간 차는 ○○ 씨가 초보운전이라고 무시한 거예요. 고약한 성미죠.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그 사람 운전 태도가 그른 거예요.”


차장님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고 보니 삼거리에서 ‘빠앙~~~~~’ 울린 소리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호수로의 공격적인 ‘빵!!!!!!!!!!!!!!!’ 날 선 소리와 같지 않았다. 30년 운전 경력자의 ‘잘한다’, ‘문제없다’ 이 말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날 차장님께서 함께 오시지 않았다면, 호수로에서 내가 잘못 운전했다고 자책하며 자신감을 잃었을 것이다. 차장님이 운전실력을 인정하자 비로소 진정한 운전자로 거듭난 것 같았다.


다음 날 홍대 스튜디오까지는 잘 갔느냐고? 말도 마시라. 1시간이면 갈 길을 2시간 반을 걸려 도착했다. 왕초보 주제에 아는 길이라며 내비게이션을 무시했다가 자유로로 진입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일산대교를 건너서 엉뚱하게 김포로 향하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비추는 반짝이는 한강은 눈부셨으나 내 마음은 지옥이었다. 주차는 또 왜 그리 힘겹던지…… 자동차를 톡 하고 건드리면 손바닥에 들어올 만큼 작아져서 주머니에 쏙 넣고 다닐 수 있는 기술을 하루빨리 개발했으면 좋겠다. ‘운전을 잘한다’라는 차장님의 말씀은 진심이었을까, 바람이 담긴 격려였을까. 내 가슴속에는 그의 따뜻한 마음씨가 남았으니까 진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2020년 7월 3일에 발행한 글(https://brunch.co.kr/@smilepearlll/56)을 퇴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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