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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y 05. 2022

저는 알코올 의존증(중독) 아버지를 둔 딸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고, 곧 부모님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하는 ‘어버이날’이라 과연 이런 글이 적당한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어버이날을 앞두고 나처럼 불편한 마음을 안고 갈등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최근 깨달은 객관화한 부모라는 존재, 내가 실제로 부모님과 맺어온 관계, 부모님을 향한 내 감정을 털어놓고자 한다. 먼저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올해는 처음으로 어버이날을 아무 의미도 두지 않은 채 지나칠 것 같다. 한편, 나는 평소 살가운 자식은 아니지만 어버이날만큼은 카네이션은 기본이고 식사를 대접하거나 가족 식사에는 반드시 참석했고,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것이 ‘당연’하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훗날 내 이런 행동을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그러면 나중에 후회한다’라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세상에는 잘못한 것도 없이 평생 여린 어깨에 부모를 향한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다가 어느 날 그것을 깨닫고는 부모에게 잘해도, 잘하지 못해도, 부모를 뵈어도, 뵙지 못해도 그 어느 쪽을 행하더라도 마음이 불편하거나 후회하거나 심지어 죄책감까지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말해두고 싶다. 그 시기가 평생이 될지, 소나기처럼 잠시 스쳐 지나갈지는 지나 봐야 알겠지만, 지금 나에게 부모와 거리를 두고 관계를 객관화하고 조정하는 시기가 찾아왔다는 점은 확실하다.




곱씹고 또 곱씹으며 생각을 거듭하고, 타자의 눈으로 부모를 바라보자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아,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증(알코올 중독)이고 자격지심이 극심한 사람이며, 가족을 위해서 희생했다는 믿음이 뼛속까지 사무쳐서 자신의 모든 행동은 정당하며 자신이 잘못한 행동조차 아내와 자식들이 다 이해하고 감싸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가벼운 우울증을 앓았고 자신은 절대로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거의 모든 갈등을 회피하고, 자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해결해야 할 자식들의 문제도 회피해서 방치하고 마찬가지로 자식들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감싸야한다고 생각한, 지나치게 의존적인 사람이구나’ 일찍 철든 나는 아이 같은 이 두 사람이 짓누르는 정서적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질식할 것 같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버겁게 발버둥 치며 간신히 지나왔다. 그때는 대체 내가 왜 이리 힘든지, 왜 계속 집을 벗어나고 싶은지, 왜 나는 부모님께 ‘사랑한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지 알지 못해서 그저 ‘너무 힘들다’라고만 생각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 ‘나는 별나고 이상한 자식인가 봐’라고 자책하며 깊은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 무의식 중에 부모의 부모 노릇을 거부한 이유조차 모르는 죄책감에 짓눌려서 여태껏 버텨왔다.




이제 나와 관계없다고 스스로 정의 내린 또 다른 가족 행사는 설날과 추석 명절이다. 단순한 반발심이 아니라 현재 가족이 직면한 갈등의 실마리를 풀지 않는 한, 이제 아버지, 아버지 가족(내 친가 사람들)과 보내는 명절은 나에게 상처이자 갑갑한 날이고,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5월 가정의 달과 더불어 설날과 추석은 국가가 공인한 대표적인 가족이 결속하고 가족의 정을 나누는 날이다. 본가는 큰집이고 아버지는 장남이라 어릴 때부터 명절이면 우리집은 손님으로 북적이고 몇 날 며칠에 걸쳐서 명절 음식을 마련하고 차례를 지내곤 했고, 이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오고 있다. 돌이켜보면 그토록 손님이 북적이고 손수 만든 맛있는 음식도 즐비한데 희한하게 어릴 때부터 나에게 명절은 즐겁고 기다려지는 날이 아니라 따분하고 피곤하고 왠지 모르게 힘겨운 날이었다. 자신들의 감정에 충실하게 먼저 명절 보이콧을 행동으로 옮긴 건 오히려 동생들이다.




지난 설, 코로나라서 작은할아버지와 오촌 당숙들, 아버지 형제들이 설날에 오시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는 우리 가족끼리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득 차서 본가를 방문했다. 간소하게 하느라 제수 음식을 줄였다는 말씀 치고는 예년과 가짓수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게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푸짐한 상찬이었다. 그런데 차례를 앞두고 별안간 남동생이 먼저 ‘차례는 지내지만 같이 떡국은 먹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옷을 갈아입으러 제 방으로 들어갔다. 여동생은 우울증 시기인지 잠이 늘고 불면증에 시달려서 설날인데도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차례를 지낸 뒤 정성이 깃든 푸짐한 음식들이 무색하게 설날 아침상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만이 적막하게 둘러앉았다. 이상한 설날 아침이었다.


동생들이 왜 설 아침 식사를 거부했는지 고작 한나절이 지나서 깨달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술, 지긋지긋한 술, 바로 그놈의 술이 문제였다. 단 하루라도 술 없이 살지 못하는 아버지는 여전히 술로 가족에게 마음속 깊이 내상을 입히고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동생들이 상처를 치유할 작은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한 번도 아문 적 없는 마음에 깊이 더 깊이 날카로운 화살촉을 들이대 후벼 파고 있었다. 그렇게 부모님은 죄 없는 우리 삼 남매의 발목을 꽉 붙들고 진창으로 잡아끌며 함께 평생 그 더러운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살아가자고 애걸복걸하고 있었다. 자신들 처지밖에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들. 불현듯 이를 깨닫자 그 당혹스러움과 분노감, 서글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찌어찌 하루를 보낸 뒤 엄마, 아빠와 이불 하나를 공유하며 셋이 나란히 앉아서 다 같이 엄마가 좋아하는 일일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모처럼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이 드신 엄마께서 생각보다 몸이 고장 난 부분이 많아서 새삼 놀라고 걱정이 들었다. 염려하는 눈빛으로 엄마가 특정 질환을 어떻게 치료하고 계신지, 의료진은 신뢰할 만한지 한창 대화를 하는데 아빠가 또 또 또 맥락을 무시한 채 대뜸 대화에 끼어들어서 쉴 새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잔뜩 늘어놓았다. 아빠는 항상 이런 식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기는 하는지 모르겠고, 지금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 상대방의 의사와는 상관없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아는 단어가 나오면 자신이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지식을 뽐내며 주저리주저리 쉴 새 없이 말을 늘어놓는다. 한창 오가던 대화의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력해서 그렇다. 이것을 깨닫고 이날은 작정하고 앞서서 두 시간 내내 아빠가 하는 모든 말에 긍정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인정 욕구를 채워드리고자 했다. 아빠를 향한 이 정도 자식 노릇이면 이날 하루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엄마와 얘기를 좀 하려는데, 그것도 엄마 건강이 갑자기 너무 염려되는데, 계속해서 아빠 때문에 몇 번이고 대화를 중단했다 이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눈치를 주는데도 아빠는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는 단어가 나왔다 하면 불쑥 끼어들어 대화의 흐름을 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지껄여댔다. 아빠가 술에 취해서 그런다고 눈치채고 그냥 자리를 피했어야 했는데, 오랜만에 집에 와서 지난날 악몽 같은 기억을 잊고서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은 참고 참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나는 소리를 꽥 치르며 폭발하고 말았다.




동생들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설날 아침에 같이 떡국을 먹지 않은 이유도 결국은 아빠 때문이었을 테다. 더 정확하게는 음복 한 잔에 술 냄새를 풍기며 아침을 드실 아빠와 대면하기 싫어서였을 테다. 나는 독립해서 산 지 오래라서 집에는 가끔 들르니 대체로 술 취하지 않은 점잖고 선량한 아빠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다. 술 취해서 고성을 지르고 불쑥 험악한 말을 내뱉고 각자 방에 있는 식구들이 들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아버지의 추한 모습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들은 술을 통제하지 못하는 버러지 같은 아버지와 여전히 살고 있기에 내가 잊고 살던, 그만큼 잊고 싶던 지옥 같은 기억이 과거 시제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었다.


내가 잔뜩 화를 낸 다음날 엄마는 ‘아빠가 저녁을 드시면서 막걸리를 드렸는데 반주라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술에 취하셨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좀 더 눈치를 주고 말씀을 조절하시도록 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엄마가 대신 사과할게’라는 여느 드라마에 나올 만한 대사 같은 말씀을 건네셨다. 대체 왜 알코올 의존자(중독자)를 대신해서 엄마가 사과를 건네는지, 그런 사과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런 상황을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 나도 이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어른인데도 일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아버지는 예전부터 알코올 의존증이었고, '이제는 괜찮다'라는 내 착각과 달리 아버지는 2~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때와 똑같고, 아마도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 이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확실한 사실 하나, 나와 이 생에서 부녀관계를 맺고 있는 아버지라는 사람은 알코올 의존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아버지라는 사람과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어갈지, 과연 맺을 관계가 남아있기는 한 건지에 관한 판단은 추후의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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