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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y 11. 2022

심리상담에서 나 자신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

시작은 이혼 트라우마 치유였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한 심리상담(치료)은 어느덧 반년에 접어들었다. 이혼을 하자는 전남편에게 이런 식으로 헤어질 수는 없다며 처음에는 부부상담을 받기를 강력히 바랐었다. 제 다른 글을 읽으신 분들은 짐작하시듯이 회피형 전남편은 부부상담으로 우리 관계가 변하지 않을 거라며 당연히(?) 부부상담을 거부했다. 때마침 먼저 심리치료를 경험한 지인이 꼭 부부가 같이 받을 필요 없고, 나 혼자라도 받으면 도움이 될 거라며 진심을 담아 조언했다. 심리상담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일단 그 지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심리상담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과연 이혼을 하는 게 맞는지 고민을 나누고 싶었고, 이내 이혼을 결정한 뒤에는 이혼 트라우마 치유에 집중했다. 이혼 트라우마 치유가 마무리될 무렵에 느닷없이 어린 시절 부모님 두 분께 정서적 학대를 당한 트라우마가 떠올라서 다시 새로운(그러나 모든 경험이 결국은 연결된) 트라우마 치유로 넘어갔고, 지금은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길인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이제야 진짜로 심리치료가 일단락되는구나 싶다. 멋모르고 시작한 심리상담인데 반년 정도 심리치료를 경험하니 심리상담이란 결국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 인생의 중심을 나에게 두고 살아가도록 단단한 나 자신을 가꾸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심리상담에서는 다양하고 내밀한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는데, 오늘은 상담사 선생님과 대화 중에 ‘제가요?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놀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산, 나 자신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을 기록하려고 한다.




1. 유능하다.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다 더는 상대방을 신뢰할 수 없다는 확신이 생긴 뒤 나도 가차 없이 이혼 결정을 내렸다. 상대방을 더는 보고 싶지 않고 빠르게 이 관계를 끝낸 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 서둘러서 협의이혼 절차와 집 처분 등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유능한 사람들은 한번 결정을 내리면 계획을 세워서 신속하게 일을 착착 진행시키죠. 분명한 장점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치유도 덜 된 채로 서두르기만 하면 분명히 나 자신에게 후폭풍이 있을 거예요. 마음이 앞서서 너무 서두르지 말고 일이 되는 대로 좀 놓아두세요.’

내가 유능하다고? 국어사전에서 찾은 ‘유능하다’는 ‘어떤 일을 남들보다 잘하는 능력이 있다’라는 의미이다. 좀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학창 시절에 공부는 늘 잘했고, 명문대를 졸업했고, 회사에서 동료와 상사에게 늘 인정받고 필요한 사람이었으니 일도 곧잘 하는 편이라고, 못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나 자신이 ‘유능하다’라고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항상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또 성과를 내거나 성취를 해왔기에 그저 ‘당연’했다. 주변에서 능력이 뛰어나고 성품마저 훌륭한 사람들에게 보고 배우는 데 익숙해서 차라리 ‘나는 늘 부족하다’라는 생각으로 사는 쪽에 가까웠다.



2. 지나치게 긍정적이다.

긍정적이면 좋은 거 아닌가?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현대사회는 긍정성을 권하는 사회라고 할 만큼 긍정성을 장려하지 않나. 나는 불만 불평을 달고 살고 걱정도 많은 사람인데 이런 내가 심지어 지나치게 긍정적이라고? 선생님은 이것이 내가 힘든 감정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생존을 위한 일종의 회피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렸을 때 알코올 의존증 아버지가 나에게 폭언을 했을 때 집에서 어머니나 할머니 등 ‘무섭지 않았니? 네 기분은 어땠니?라고 내 감정을 살펴준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에 ‘없다. 그저 그분들도 벗어날 수 없는 반복되는 이 상황이 지치고 힘드시겠지 생각했다’, ‘불안과 공포의 밤이 지나고 나면 가족 모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는 학교에 갔고 엄마는 가족 식사를 챙기는 일상이 이어졌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무섭고 상처 입은 마음을 돌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아직 어려서 집을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으니 힘든 상황을 빠르게 잊고 밝고 긍정적으로 사는 생존전략을 택했으리라고 설명하셨다.

이번에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지인들은 ‘늘 밝고 긍정적이던 네가 대체 무슨 일을 겪길래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니. 잘 해결되길 기도 할게’라는 말을 전하고는 했다. 나는 내 성격이 부정적인 편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깊은 우울감에 젖은 적도 드물고, 인생에 고비가 찾아왔을 때 대체로 ‘원래 인생은 이런 거다.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가면 된다. 이번에도 잘 헤쳐나갈 수 있다’라는 마음이었다. ‘지나친’ 긍정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내 마음속 깊은 불안감을 인정한 순간은 내 심리치료의 큰 전환점이었다. 이후에 좀 더 수월하게 다음 심리치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으니까.


3. 일찍 철들었다.

‘진주 씨는 일찍 철든 아이였네요’ 상담 선생님께 이 말을 들었을 때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금시초문일 만큼 단 한 번도 내가 철들었다는 생각을 한 적 없고, 오히려 ‘대체 나는 언제 철이 좀 들려나’라고 정반대로 나 자신을 바라봤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감정적으로 바라는 살가운 자식, 애교 많고 연락 자주 하는 자식이 아니라는 죄책감이 늘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혼자 거실로 불려 나와 알코올 의존증 아버지에게 폭언을 당하는 상황(관련 글: 어렸을 때 내가 정신적 학대를 당했다고?)에서,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고 집안의 다른 두 어른인 어머니와 할머니는 이런 상황에 진절머리를 치며 각자 방 안에서 머리 싸매고 누워서 아이인 나를 방치했을 때조차 ‘그분들도 벗어날 수 없는 반복되는 이 상황이 지치고 힘드시겠지. 이해해. 아버지가 때리지는 않으니까 오늘은 내가 조금만 이 지옥 같은 시간을 버티면, 어차피 끝은 날 테니까 조금만 참자’라는 생각으로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어른들을 이해하는 쪽을 택했었다.

선생님은 부모님이 나와 동생들을 위해서 어쨌든 그분들이 아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고 알고 있었기에, 일찍 철이 들었기에 부모님이 하실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요구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면 나는 부모님께 브랜드 운동화나 옷이 갖고 싶다 거나 유행하는 오락기를 갖고 싶다는 등 무언가를 사달라고 조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친구들이 부러울 만도 한데 어렸을 때도 유행에 민감한 편이 아니어서 다행이랄까. 크게 관심이 없어서 어렸을 때 갖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한 결핍은 크지 않은 듯하다. 부모님은 참고서나 교재, 책에 지출하는 비용에 관대한 편이셨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책은 그 자체로 나에게 안정감과 따뜻함, 위로를 주는, 아낌없이 주는 친구 같다.


4. 나는 어릴 적 부모님께 정신적 학대를 받았으며, 아버지는 현재 알코올 의존증 초기 치매 증상을 보이고, 어머니는 오랫동안 우울증에 걸릴 만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이 사실은 다른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다. 상담 선생님께서 내 어린 시절과 부모와의 관계, 부모의 과거와 현재 상태를 이처럼 명명한 순간, 안개처럼 뿌옇던 감정이 선명해지면서 나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들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인정하게 되었다. 한걸음만 물러서면 많은 것들이 새롭게 달리 보였을 텐데, 아이였던 시절 부모는 언제나 내 편이라고, 든든하다고 ‘믿은’ 큰 산이었기에, 나는 어른이 되었는데도 그 착각 속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깊고 깊은 마음속에서 우리 부모님은 완벽하다고 믿으며 실망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내가 자신들의 감정적인 부모가 돼 주길 바라며 의존하고자 했는데, 나도 이미 어른이 되었는데도 습관적으로 익숙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부모님께 의지하고 싶어 했다.


5. 지나치게 선량하다

심리상담을 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하나는 ‘나쁜 감정’은 없다는 사실이다. 긍정적이라고, 부정적이라고 일컫는 감정 모두 우리에게 필요하고, 둘 중 ‘지나친’ 감정은 결국 나 자신에게 손해를 가져온다. 어떤 감정이든 소중하며 ‘적당히’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깨달았다. 부정적인 감정에 속하는 불안과 우울을 사실은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균치 정도로 ‘적당히’ 안고 살며, 나처럼 불안과 우울이 지나치게 낮을 경우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넘칠 수는 있지만 사람에게 경계심이 거의 없어서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할 때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때로는 큰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급기야는 다른 사람에 비해 편견이 적고 이상주의 성향이 강한 나에게 ‘지나치게 선량하다’라는 처방이 내려졌다. 나도 내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내 몫을 챙겨야 할 때는 잘 챙기고, 거절을 해야 할 때는 똑 부러지게 거절도 잘하고, 인간관계에서도 맺고 끊음이 분명한 이기적이어야 할 때는 가차 없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치게 선량하다라…… 전문가의 이 같은 처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이가 없었다. 이걸 대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도 모르겠기에 그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이제 이런 생각은 한다. 부모님은 나에게 왜 이리 예민하고 공격적이냐고 말하지만, 내가 화가 날 정도면 ‘누구라도 화를 낼 만한, 심각한 상황이구나’라고 말이다.




최근 몇 달 동안 친구들에게도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묻곤 했는데, 친구들은 일찌감치 내가 유능하며 긍정적이고 철들었으며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오직 나 자신과 부모님, 전 배우자, 전 배우자의 부모만이 이 점을 부정하거나 일부러 외면해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심리상담을 할 기회가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부정적이고 철들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부모, 전 배우자, 그의 부모를 향한 양가적 감정과 죄책감에 시달려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 자신인데 내가 나를 이토록 모르고 살아왔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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