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착한 사람이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는지
‘사람은 참 착해’, ‘그래도 애는 착하니까 괜찮겠지’, ‘그래도 애는 착하니까 잘 보듬어 주렴’ – 나, 우리 부모, 상대방 부모가 내 전 배우자를 바라본 시선이자 태도이다. 우리는 착하고 선한 사람을 좋아하고 가까이 두고 싶어 한다. 가끔 전 재산 몇 백억을 기부했다든가, 길을 지나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용기 있게 도왔다든가 하는 선행을 베풀고 실천한 사람들을 다룬 훈훈한 뉴스를 볼 때면 ‘그래도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불행을 아파하고 진정한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 이 마음이 착하고 선한 마음이다. 그런데 나는 때로 ‘착하다’라는 의미를 잘못 생각해서 그릇된 판단을 해왔다. 특히, 아주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말이다.
‘사람은 참 착해’, ‘그래도 애는 착하니까’ 이를 달리 말하면 냉정하게는 착한 면모를 제외하면 (배우자로서) 볼품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더 솔직하게는 착한 면모를 제외하면 내 기준에 차지 않는 마뜩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기혼자들 특히 아내가 ‘그래도 사람은 착해’라며 타인에게 남편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이처럼 표현하며 위안을 삼는 경우가 많은데,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 위안과 합리화도 필요하지만, 내가 현재 배우자에게 무엇인가가 불만족스럽다는 자각을 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계속 자기감정을 속이며 기만하다가 ‘그래도 사람은 착해’를 넘어서 ‘사람이 너무 불쌍하고 안 됐잖아. 그러니 내가 옆에 있어줘야 해’라며 기꺼이 성녀(聖人)를 자처하며 배우자에게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저당 잡혀 사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
내가 바로 ‘사람은 참 착해’라는 말에 도취돼 이 한 가지 장점에 큰 가중치를 두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다. 브런치 글을 쓰다 보면 때로 잘난 체를 하는 듯해서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있는데 사실은 사실이니까. 돌아보면 전 배우자는 사회적인 기준 예를 들면, 직업/학력/급여 수준과 근무 환경/부모의 자산 정도/외모 등에서 ‘나’보다 나은 면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제삼자가 바라봤을 때 누구나 ‘차이가 크네. 이렇게 다른 데 어떻게 결혼을 했지?’ 싶을 만큼이다. 사람을 평가할 때 통용되는 사회적인 기준이 크게 작용하지만, 나는 이것으로 드러나지 않는 많은 장점들도 귀하게 여기고 편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착하고 선하고 솔직한 (내가 그렇다고 믿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런데 ‘착하다’라는 하나에 너무 천착해서 균형을 잃은 나머지 내가 가진 99%의 가치는 나 스스로 평가절하하고, 오로지 1%의 결핍을 크게 느껴서 그것을 채우고자 ‘사람은 참 착해’라고 생각하는 상대를 배우자로 선택했던 것 같다. 만일 이 글에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제목을 붙인다면 ‘왜 똑똑한 여자가 멍청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나’도 어울릴 듯하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짚어야 할 점이 있는데 그럼, ‘과연 상대방은 정말로 착한 사람이었나’하는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대방은 심지어 착한 사람이 아니며, 내가 착하다고 착각한 사람이었다. 사실 ‘착하다’라는 기준이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니, 내 과거의 착각한 기준에서 상대방은 착한 사람이었고 현재의 기준으로 보자면 ‘착한 척’을 한 나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 가깝다. 어떻게 같은 사람을 이토록 극단적으로 다르게 평가할 수 있는지 하나씩 짚어보겠다.
우리는 흔히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나와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 즉, 말이 통하고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지극히 나 중심적인 사고로 내 마음을 잘 읽어주는 사람 어쩌면 카사노바 같은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상대방을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말이 잘 통하는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말수가 적고 편안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은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기에 내가 이야기를 많이 해서 좋고,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겁다’라고 말하고는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나 웃어른에게도 깍듯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우선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 착한 사람인가. 그 사람은 착하고 아니고 와는 전혀 별개로 그냥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이를 잣대로 착한 지 악한 지를 평가할 수는 없다. 물론, 전남편은 내 생각에 적절하게 호응하고 반응하기도 했지만, 엄밀하게 내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고 상대방이 나와 같은 의견이라고 할 수 없고, 때로는 ‘잘 듣는 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로 경청하고 동의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저 말하는 자체도 귀찮고 언쟁이나 갈등을 벌이기 싫어서 회피하느라, 상대방이 상처받거나 과하게 저항하리라 예상해서 말하지 않고 그냥 좀 참고 가만히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식이라면 내 이야기를 내 입장에서 진정성 있게 가장 잘 들어주는 사람은 현재는 심리상담사 선생님이다. 다음으로는 단골 음식점 사장님들이다. 이분들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고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한편, 심리상담사 선생님, 단골 음식점 사장님 모두 참 좋은 분들이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착한 사람(?)이라고 연인이나 배우자로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항상 그렇지 않고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때 연인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음식점 종업원이나 택시 기사님 등 서비스직 종사자께 갑질하지 않고 즉, 무시하지 않고 매너를 잘 지키는 사람인지 관찰하는 것이 유행했다. 그럼, 이토록 깍듯하고 예의 바른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 이 또한 예의가 바르고 매너를 잘 지키는 사람이지, 이를 두고 착한 지 악한 지를 판단할 수는 없다. 사람 간 예의와 매너를 지키는 일은 ‘당연’하다. 갑질이 왜 갑질인가. 잘못된 행동이기 때문에 갑질이다. 서비스직 종사자를 무시하고 갑질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지, 무시하지 않고 갑질하지 않는다고 착하고 좋은 사람일 수는 없다. 그저 당연한 일을 당연히 하는 것뿐이다. 또한 이 예의와 매너가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인지, 그저 사회적으로 학습했기에, 사실 마음은 갑질을 하고 싶은데 잘못된 행동이라고 알고 있고, 자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리라고 염려해서 하지 않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서비스직 종사자를 대하는 그 짧은 시간조차 참지 못해서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관계를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있을까. 한편, 아무런 관계가 없는 완전한 타인에게 착하고(?) 상냥하게 대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도 착한 사람인지도 별개의 문제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에게 잠깐 좋은 사람인 척 행세할 수 있는 전자는 식은 죽 먹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많은 경우에 순종하는 사람을 두고 ‘착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듯하다.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거나 고집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는 사람, 내 마음에 들게 행동하고 심지어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을 ‘착하다’라고 통칭하는 듯하다. 한마디로 내 마음대로 말하거나 행동해도 개입하지 않거나 뭐라고 하지 않을 사람 말이다. 심각하게는 무관심하거나 아예 방치하는데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전 배우자를 향한 내 오만하고 그릇된 착각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갖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생각을 말로 뱉거나 뱉지 않거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느냐 부드럽게 말하느냐 차이이지 이 세상에 (옳고, 그름을 떠나서) 생각이 없는 사람은 단연코 없다. 즉,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달가울 사람은 지구 상에 누구도 없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자유의 단맛을 맛보지 않은 사람이 존재한다면 모를까. 이렇게 본다면 ‘착하다’라는 사람은 자기 주관이나 생각이 없는 사람일 수 있는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매 순간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느끼기에 주관이나 생각이 없다고 할 수는 없고, 여러 이유로 생각을 하기를 포기한 사람일 수는 있을 듯하다.
특히, 어른들은 착한 아이를 좋아하는 경향이 짙은데, 이 말은 곧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어른들의 생각이나 의견에 되도록 ‘No’라고 대답하지 않고 무조건 ‘Yes’라고 반응하는 순종적인 젊은이(또는 아이)를 ‘착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어른들은 이처럼 행동하는 것이 착하고 옳다고 배우며 성장해서 이 같은 생각과 환경이 익숙하기 때문일 텐데, 그래서 젊은이가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비치면 단번에 고집이 세고 성격이 강하고 유난스럽고 까탈스러운 사람으로 치부하는 듯하다. 물론, 아닌 어른들도 드물게 있지만 내 주위의 많은 어른들을 돌아보면 순종적인 사람을 착하다며 좋아하는 어른들이 대부분이라…… 이것이 또 젊은 세대에게도 심심치 않게 대물림되고 있기에 어른들이 ‘착하다’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어른들 앞에서 잠시 잠깐 ‘착한 척’을 하는 사람인지, 여전히 어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진심으로 순종하고 착하고 싶은 사람인지 눈여겨보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는 전자인 사람이어서 내 진짜 속마음과 달리 전 시부모는 나를 착하고 순종적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나와 매우 가까워지고 싶어 했고, 자신들 입맛에 맞게 바꾸고 싶어 했으며, 전 배우자는 후자인 사람이어서 그 또한 나를 바꾸고 싶어 해서 결혼 내내 갈등이 끊이지 않고 결국에는 이혼까지 이르게 되었다. 심지어 결혼 내내 전남편, 우리 부모님, 전 시부모는 뜻이 잘 맞고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결혼을 하고도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기에 5:1로 혼자 맞서 싸우며, 혼란스럽고 때때로 자책하는 외롭고 힘든 시간을 견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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