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아이콤플렉스’의 폐해
올해 초 어느 주말에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올해 여섯 살이 된 친구 아들은 친화력이 어찌나 좋은 지 돌 즈음 보고 처음 봐서 내가 낯설 텐데 그런 기미가 거의 없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환대하더니 요새 자신이 푹 빠진 카드 게임을 같이 하자고 초대했다. 아이는 아이인지라 자기중심적으로 게임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진행하기도 하고, 자신이 게임을 잘한다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슬쩍 넘어가다가 정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그래도 규칙은 규칙이라고. 자꾸 그렇게 규칙을 어기면 더는 같이 게임을 할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내 의사 표시를 하며 왁자지껄 한창 게임을 하다 보니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같이 여기저기 널린 카드를 정리하다가 나도 모르게 ‘아이구, 우리 주원이 착하네’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데 간신히 주워 담고 다시 ‘주원이 게임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정리정돈도 참 잘하는구나’라고 말을 바꾸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주원이에게 건넨 말이 얼마나 적합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착하네’라는 무성의한 칭찬보다는 나았으리라. 가뜩이나 어른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이 큰 아이에게 ‘착하네’라는 이 한마디가 얼마나 아이에게 독이 되는 말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착하다’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했듯이 나는 이 ‘착하다’라는 말에 길들여져서 오랫동안 내 욕구와 욕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특히 부모나 어른들의 욕구나 욕망을 채우고자 살아왔다. 이것이 얼마나 뿌리 깊은 무의식에 자리 잡았던지 내가 어른이 된 뒤로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했는데, 자꾸 나도 모르게 때때로 부모의 인정을 받고자 어떤 결정을 내리고 선택을 해왔었다. 늘 그렇지는 않았지만 돌아보니 결혼이라는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100%는 아니지만) 그 영향이 강하게 미쳤다. 그분들은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하든 결국 간섭하지 못한다고 머리로는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자꾸 그분들의 입장을 입장이나 처지를 고려하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어떤 삶을 살든 그분들이 도와줄 것도,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없는 데 말이다.
결혼에 한해서 말하자면 내가 전 배우자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 사람이라면 우리 부모님(집안)과 조화를 잘 이루고, 친하게 지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부모를 무시하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무의식 중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심 알코올 의존증 아버지가 사위에게 무시받을까 봐 염려하고 있었다고 뒤늦게 내 속마음을 깨달았다. 워낙 보수적인 분들이라 연애한지도 꽤 되었는데 ‘결혼은 언제 할 거니?’라는 재촉을 내가 견디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에 결혼을 택한 이유도 있었다. 사실 당시에 내가 진정으로 바랐던 형태는 결혼이 아니라 동거였는데도 말이다. 그분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가히 ‘착한아이 콤플렉스’라고 해야 할 듯하다. 예전 일기에 ‘다 내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것 같은데 한편으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라며 답답함을 토로한 적이 있다. 내 욕구나 욕망과 달리 자꾸 나도 모르게 부모의 관점대로 살고자 하고 한편으로, 내 욕구나 욕망에 충실하면 무의식에서 부모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을 안고서, 착한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심경이 담긴 기록이다.
나는 왜 ‘착한아이’가 되고 싶었을까. 좀 과장을 보태자면 난 대한민국의 상당수 젊은이들이 ‘착한아이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혼돈과 갈등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유상종이라고 내 주위에 유독 이런 사람이 몰려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 주변을 돌아봐도 셋 중 두 명은 감정적으로 안정적이게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듯하고 셋 중 한 명 정도는 나처럼 착한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시름하고 있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의 부모님의 면모를 살펴보면 부모의 직업, 사회적 지위, 경제력은 모두 제각각이다. 부모가 사회적인 기준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고통받는 착한아이를 길러낼 수 있다는 말이다. 즉, 부모의 사회적 성취와 착한아이콤플렉스 연관성은 적은 듯싶다.
‘착하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이다. 그럼, 착하다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희한하게 착하다의 반대말로 ‘나쁘다’가 떠오른다. 그럼, 나쁘다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나쁘다의 반대말은 착하다인가. 이때는 또 희한하게 나쁘다의 반대말로 ‘좋다’가 떠오른다. 그럼, 대체 착하다는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정리하기로 하고, 중요한 점은 아마도 나를 포함해 많은 젊은이들은 어린 시절 착한아이가 되지 못하면 나쁜아이로 전락하는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아이는 물론이고 대부분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아니어도 최소한 나쁜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쁜 행동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남의 시선에 자신이 나쁘게 비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며, 심지어 나쁜 사람으로 규정되면 강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선택지가 둘 밖에 없는 상항에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착한아이’가 돼 어른의 인정을 받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쁜아이가 돼 버리니까. 착한아이가 되지 않으면 나쁜아이가 아니라 그저 착하지 않은 아이일 뿐인데, 어른들은 끊임없이 착한아이가 아니면 나쁜아이라는 프레임에 가두고 자신들이 편한 대로 길들이고 조종하고자 했다. 정작 자신들은 착한 어른도 나쁜 어른도 아닌 그냥 어른일 뿐이면서 말이다. 아니, 그들은 아이(자식)들 성장에는 오히려 나쁜 어른(부모)이었다.
간혹, 가난한 부모가 안타까워서 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대신 짊어지거나 심지어 빚을 내서 부모의 빚을 갚고, 저당 잡힌 부모 집을 찾아오는 등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본다. 부모는 자식을 낳고 길러준 감사한 분들이지만, 한편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하고, 무사히 키워서 독립시키는 일은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 할 그분들의 본분이기도 하다. 자식이 경제적으로 궁핍한 부모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인지상정이고, 자식이 그렇게 느낄 정도라면 그 부모들은 아마도 착하고 근면하게 열심히 산 사람들일 것이다.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사회구조적인 문제라고도 생각하기에 가난을 온전히 그들의 잘못이라고 돌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부모의 가난에 과연 나의 책임이 있는가. 냉정하자면 현재 그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 처한 것은 그들이 인생을 살아온 결과이다. 그들이 어른으로서 매번 최선이라고 믿은 선택을, 안타깝지만 때로 그릇된 선택을 한 결과이다. 내 성장과정에서 내가 그들에게 어떤 선택을 하라고 종용하거나 강요했는가. 집안 경제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유학을 가거나, 성인이 되었는데도 부모의 퇴직금을 빌려서 사업을 벌이다 망해서 부모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엄밀하게는 부모의 가난에 내 책임은 없다. 그분들이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한 것은 자식을 낳기로 ‘선택’한, 부모가 되기로 ‘선택’한 그들이 당연히 책임져야 할 몫이고,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나는 가난한 가운데서도 이날 이때까지 스스로 힘으로 훌륭하게 잘 자란 사람이기도 하다. 오랜 유교 문화의 영향 때문에 이제는 사회와 가치관이 변했는데도 ‘자식이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라는 사고방식이 여전히 사회와 가정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데, 우리는 18C 조선시대가 아니라 21C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내가 경제적으로 여력이 되어서 부모님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드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착한 일’이지만 착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바로 나쁜 일을 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착한 일을 하지 않은 ‘그냥(보통) 사람’이 될 뿐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 또한 각자의 몫이지만 최소한 ‘죄책감’을 가지지는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낳고 키웠는데’, ‘그래도 부모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아버지니까 네가 이해하렴’, ‘그럼, 가족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니’와 같은 죄책감을 자극하는 부모의 말에 흔들리며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들은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된다고, 우리 이제 제발 착한아이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자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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