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진정으로 염려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
힘든 일에 처하거나 위기 상항에 닥쳤을 때 인간관계가 정리된다더니, 더 구체적으로는 나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좀 더 오래 곁에 둘 사람과 아닌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꽃나무에 돋은 곁가지를 일부러 잘라내지 않아도 만나거나 연락하는 빈도에 따라서 자연스레 인간관계가 정리돼 저절로 탐스러운 꽃과 싱그러운 잎이 남는다. 여기에는 타인의 행동과 말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직면하는 과정도 포함된다. 내가 누구에게 가장 먼저 연락하고 결국은 하지 않는지,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지 – 친하고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사람을 두고 나 자신 스스로 좀 놀라기도 했다. 인간관계 정리란, 곁가지를 처낸 관계의 실체를 직면하고 수용하는 과정이다.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해서 ‘힘들다’라는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같은 말을 해도 돌아오는 반응은 저마다 다르다. ‘다 지나갈 거야’, ‘다 잘될 거야’,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거야’, ‘원래 인간은 다 외로워’, ‘인간은 결국 다 혼자야’ – 이런 당위적인 말들은 얼핏 위로로 들리지만, 고통 속에 놓인 사람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내 고통에 별 관심이 없는데 나쁜 사람으로 보일 수는 없으니 적당히 체면치레하는 회피성 위로에 불과하다. (그러고 보니 부부상담을 하고 대화로 좀 더 관계를 개선해보자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며 밤낮으로 울부짖을 때 무슨 유체이탈 화법처럼 전남편이 보인 반응이 딱 이랬네.)
이런 친구들은 내가 연락했을 때 위로의 말을 건넨 뒤 5~6개월이 지나도록 단 한 번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하물며 1초도 걸리지 않는 SNS에 좋아요도 한 번 누르지 않았고, 간단한 댓글조차 남긴 적이 없다. 나름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에 서운하고 속상한 감정도 들지만, ‘우리 관계의 한계는 여기까지 구나’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사람 관계는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지만 당장은 유통기한이 다 된 관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은 관계에 대한 감정과 기대치가 불일치하는 친구는 소수에 불과했으니, 지금까지 친구관계는 곧잘 안정적으로 형성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를 진정으로 염려하는 사람은 자신의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나에게 ‘시간’과 ‘마음’을 쏟는다. 시간을 내서 마음을 쏟는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하다. ‘지금’ 내 마음은 어떤 지,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상황은 좀 더 나아졌는지…… 여건상 만날 수 없다면 긴 통화가 아니더라도 일상생활 틈틈이 신경 써서 문자로라도 안부를 묻고 내 상태와 상황을 지속적으로 확인한다. 필요할 때는 적극적인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고, 언제든지 나에게 밥을 사줄 준비를 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주로 10년 지기, 20년 지기 같은 오랜 관계를 이어온 친구들이 여기에 속한다. 마음은 있고 염려되는데 현실적으로 이제는 거주지가 멀고 직업과 가족관계가 달라서 라이프사이클이 다르다 보니 당장 달려올 수는 없지만, 내가 안정적일 때와는 달리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도움이 되는 일을 기꺼이 하고자 나선다.
마침내 이혼을 진행하면서 몇몇 가까운 친구에게 소식을 알렸을 때, 메시지를 남기자마자 한 친구는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힘든 결정을 했구나. 네 마음은 어떠니. 우리 이제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내자. 이사할 때 가서 도와줄게’ – 내 불안함과 외로움을 알아준 ‘같이 곁에 있어 줄게’라는 말이 얼마나 큰 현실적인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 친구는 야근이 많고 업무 강도가 높은 조직에 속해 있는데, 뜻밖에 업무 시간에 틈을 내서 바로 전화했다. 연애할 때 자주 느끼는 감정이지만 사실 ‘마음’이 있으면 세상에 못 해낼 일은 별로 없기도 하다.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온갖 핑곗거리만 생각난다면, 사실은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씁쓸한 진실을 마음 깊이 느끼고 있다. 일과 육아로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한 친구는 내 이혼 진행 과정에서 어려운 일은 없는지 살피고, ‘이사하면 꼭 사진 찍어서 보내라’거나 ‘심리상담은 잘 받고 있는지’ 등 틈틈이 내 상태와 상황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는데, 나를 신경 쓰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평소 일상적으로 교류하는 사람 가운데 정말 가깝고 친밀한 사람은 ‘도움이 필요하다’, ‘네 의견이 필요하다’, ‘만나달라’라는 요구에 기꺼이 만나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들려준다. 고통 속에서 조금이라도 헤어나오고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도록 기꺼이 나만의 나침반이 되어준다. 내 인생을 자신이 책임질 수 없다고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때로는 해야 할 구체적인 행동지침까지 일러준다. 나 자신과 주변 상황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어긋난 삶의 균형을 다시 찾도록 일시적으로 내 삶에 개입하는 모험도 기꺼이 감수한다. 타인의 인생에 ‘제대로’ 관여하고 참견하는 것…… 결코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 경우는 퇴사 후에도 적게는 2~3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일상적인 관계를 이어온 예전 회사 동료들이 해당한다. 5년을 다닌 회사도 있고, 1년을 다닌 회사도 있어서 입사 뒤부터 알고 지낸 지는 대부분 10년 가까이 된 관계이다. 회사를 벗어난 지 오래되었어도 업무 관계였던 이들과는 여전히 익숙한 대로 존댓말을 주고받지만, 사실 누구보다 가깝고 존중하는 ‘좋은 관계’이다. 같은 회사에 다니거나 비슷한 업계에 속했기에 관심사가 비슷하고 집도 학창 시절 친구들보다 비교적 가깝다. 사는 곳이 멀지 않으니 만나는 부담도 적고 수월하다. 동료이지만 또래이기에 회사 생활을 할 때도 점심시간에 같이 식사하며 일과 연애 고민을 털어놓을 만큼 가까운 관계였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까이거나 치명적인 업무를 실수를 해서 머리를 쥐어뜯고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자기 분에 못 이겨서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엉엉 우는 이런 서로의 찌질한 모습도 어쩌다 보니 공유한 사이다.
퇴사 뒤에도 10년 가까이 꾸준히 연락하고 정기적으로 만난다는 건 여전히 관심사와 성향이 비슷하고, 사회적 지위나 여러 면이 잘 맞는다는 의미이다.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데 서로의 집에 숟가락 개수까지 알지는 못하지만, 관계를 오래 지속하다 보니 이제는 일과 사랑에서 더 나아가서 서로의 가족이나 성장배경, 가치관과 욕망을 속속들이 아는 관계로 발전했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꿈을 응원하고 여전히 서로의 찌질한 모습을 내보이며 서로 성장하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우정을 쌓아가는 친구들이다. 인간관계는 변하기 마련이지만 서른 중반을 지나면서 지금까지 내가 형성한 가치관이나 커리어가 앞으로 발전을 하되 방향을 완전히 틀 가능성은 낮기에 이들과는 앞으로도 오랜 기간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내가 이번에 빚을 많이진 평생의 은인들이라서 그 빚을 하나씩 갚자면 시간이 걸려서 내가 이들을 놓아줄 수 없을 것 같다.
실질적인 조언을 할 만한 경험과 지혜가 부족하고, 어떻게 진정한 도움을 줄지 모르겠는 사람은 말 대신 소소한 선물로나마 걱정하는 마음을 전하거나, 밥이라고 한끼 사주고 싶어 한다. 그깟 카카오톡 기프티콘이나 카카오톡 선물하기가 별것인가 싶지만, 메신저로 ‘힘들겠다. 다 지나갈 거야’라고 말뿐인 위로 아닌 위로를 하는 것과 1~2만 원이라도 물질적인 성의를 보이는 일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이들은 평소 자주 만나거나 아주 가깝게 지내던 사이는 아니지만 나에게 분명히 호감이 있고, 앞으로 좀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다.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문자로 위로라도 한마디 건네는 게 그나마 낫지만, 실질적은 도움은 전혀 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고작 자신의 체면치레하는 무관심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더 최악은 길을 잘 걷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나무 기둥에 걸려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는데, 이 위급 상황에 나를 당장 병원 응급실에 데려가기는커녕, 뼈가 부러져 아파 죽겠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나에게 자신의 엄지발가락에 박힌 작은 가시가 아파 죽겠다며, 나더러 그 가시를 빼달라고 징징거리며 우는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다. 이들은 나에게 반드시 의지처가 돼야 할 때조차 오히려 자신의 의지처가 돼 달라며 혼란스러움과 가슴 위에 돌덩이를 얹은 것 같은 죄책감을 들게 하는 악질이다. 가까이 다가갈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멀리, 더 멀리 해야 할 사람이다.
나는 가족이란 힘들 때 편안히 기대서 상처를 치유하고 재충전할 수 있는 안식처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이혼을 겪으면서 안타깝고 슬프게도 나에게 그런 가족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깨달았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느라 고통에 고통이 더해져서 먹먹한 가슴이 한없이 시리고 괴로웠다. 와장창 깨진 조각난 마음의 파편들이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하루하루 하나씩 둘씩 붙어서 다행히 제 모습을 찾고 있다. 머릿속이 여전히 복잡할 때도 있지만, 몇 달 전에 비하면 마음도,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사람 관계는 적인지, 아군인지 모호할 때가 가장 위험한 법이다. 물론, 살다 보면 때로는 아군이 적이 되기도 하고, 적이 아군이 되는 등 관계는 계속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정도 극적인 상황은 자주 펼쳐지지 않는 드문 일이기도 하다. 차라리 헷갈리던 존재가 적이라는 사실을 직면하면 처음에는 충격을 받고 상처도 다소 남을지언정 앞으로는 상대방을 경계하고 조심하면 되니까 오히려 안심할 수 있다. 아군이라고 믿었던 존재가 적도 아니지만 아군도 아니라고 알게 되면 더는 예전만큼 신경 쓰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돼 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무슨 상황에 처했든 나를 믿고 변함없이 지지하고 응원하는 친구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나를 진정으로 염려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습하고 어두운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와 다시 햇빛이 비치는 세상 속으로 나아가고 있다.
6월 중순에 작성하던 글로 한 단락 정도만 보완하면 완성할 수 있었는데요. 브런치북 <드디어 며느라기 해방입니다>를 크몽에 유통할 준비를 하느라 이 글을 보완하고 다듬는 데 집중하다보니 어느덧 한달 가까이 지났습니다. 작년에 9월부터 인터뷰 작업 준비할 때도 그렇고, 의뢰 받은 다른 글에 집중할 때는 의욕과 달리 개인적인 글을 쓸 짬을 내는 게 제게는 아직은 쉽지 않네요. 그나마 일기에는 끄적이면서 제 브런치를 찾아주시는 분들께 공유하면 좋을 소스는 계속 모으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일주일에 두 번씩 브런치에 인간관계나 가족, 이혼과 결혼, 저 자신을 찾는 여정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이어가겠습니다! ^^
2020년 브런치에 연재한 결혼 관련 글 중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았던 글을 모아서 <드디어 며느라기 해방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크몽 전자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상징적인 의미였지 ‘진짜로’ 며느리에서 해방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크몽 전자책에는 2년 동안 달라지고 깊어진 생각을 덧붙여 결혼에 대한 좀 더 예리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브런치 글을 기반으로 발전시키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결혼/부부/가족 나아가 이혼과 비혼에 관한 생각을 크몽 전자책으로 만나보세요! 관심 있으신 분은 아래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주세요. 감사합니다. ^^
♣ <드디어 며느라기 해방입니다> PDF 전자책 살펴보기: https://kmong.com/gig/394554
<전자책 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