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란 무엇일까
지난 설날도 엄마 생신만큼이나 집안 분위기는 기묘했다.
우리집은 큰집이고 아버지가 장남이라서 원래 명절에는 친척과 손님들로 북적이곤 했다. 50대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일찍이 아버지가 차례와 제사를 주관했고, 할아버지의 형제들인 작은할아버지와 그 자식들인 오촌 당숙들, 그리고 그 자식들까지 모이고는 했다. 같은 가부장제 시대를 살았어도 모두가 이런 종갓집 버금가는 분위기에서 명절을 보내지는 않는다고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지난 설에도 코로나는 한창이었다. 일가친척들이 모이지 않고, 각자 집에서 명절을 보내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럼, 우리 가족끼리 오붓한 명절을 보낼 수 있겠네? 라는 기대감을 안고 본가를 방문했다. 가족끼리만 보내서 상차림을 간소하게 준비한다던 말과는 달리 평소 차례상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푸짐해졌는지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엄마는 도대체 이 음식을 어떻게 다 직접 준비한 거지? 이때부터 뭔가 분위기가 싸했다.
차례를 앞두고 남동생은 별안간
“차례는 지내지만 같이 떡국은 먹지 않겠다.”
라는 이해불가한 선언을 했다. 뜬금포를 날리고 차례를 지내고자 옷을 갈아입으러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여동생이 보이지 않았는데, 우울증기인지 잠이 늘고 불면증에 시달려서 설날인데도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가짓수가 몇 개인지 다 헤아릴 수 없는 상찬을 늘어놓고 향을 켜서 준비를 마친 뒤, 경건한 차례 의식이 거행되었다. 아버지와 남동생은 절을 올리고 술잔을 비우고 또 절을 올리기를 반복했다. 코로나 때문에 가족끼리 보내는 두 번째 설이었다. 지난번에는 처음으로 여자들도 같이 절을 했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할머니와 엄마, 나는 다시 부엌에서 의식을 지켜보는 보조자 역할에 머물렀다.
차례 참석 인원은 1/4로 줄었는데 전혀 간소해지지 않은 차례상, 몇 날 며칠 실질적으로 음식을 준비한 엄마와 할머니는 뒷전에 물러나 있고, 차례상 준비에 0.001%도 기여하지 않은 남동생이 주역이 되는 기이한 풍경, 제사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며 음식에 담긴 정성을 강조하는 아빠, 나이 들어 몸이 힘들다면서도 자신은 괜찮다며 아빠의 요구를 전부 따르고는 몇 날 며칠 몸이 아픈 엄마. – 내 눈에는 그저 이 모든 것이 한 편의 기묘한 블랙코미디 같았다. 누구를 위한 차례인가. 무엇을 위한 의식인가. 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사뭇 진지한 태도로 차례 의식을 거행하는 아빠를 바라보는데 그가 왜 이렇게 제사에 집착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빠는 제사를 지내야만 우리 가족이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있구나. 조상님들이 보호하고 돌봐서 그나마 이만큼 살고 있다고 믿는 거구나. 근본적인 문제 원인은 회피하고 미신을 신봉하는 건 엄마와 똑같네. 이래서 둘이 부부인가 보네’ 아빠의 어리석음에 기가 차서 프흐흐흐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우리 가족은 아빠가 술 먹고 난리 부리던 내가 십 대이던 시절에 이미 갈 데까지 간 관계였다. 지금 이 집안에서 심리상담이나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한집에 살지만 신뢰하지 못하고 서로 탓만 하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우리 가족이다. 이미 최악인데 여기서 더 나빠질 게 어딨다고 조상님들께 사정하는 거야. 조상님들께서 그나마 살펴주셔서 온 가족이 이만큼 불행한 거라면 이 억울함은 어디에 호소해야 하는데. 백날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면 뭐하는지. 정작 이 모든 불행의 근원인 자신이 앞으로 절대 변할 리가 없는데.
차례를 마치자마자 남동생은 선언한 대로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널찍한 설날 아침상에는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엄마가 손수 만든 상을 가득 채운 음식들이 다 무색할 만큼 적막한 공기가 감돌았다. 식사 인원이 이렇게 소수인데도 엄마는 한자리에 앉아 제대로 식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게 빠졌네, 저게 빠졌네 혼잣말을 주저리주저리 내뱉으며 거실에 놓인 아침상과 부엌을 몇 번이나 오갔는지 모른다. 이것도 다 습관이다. 자발적 노예를 자처하는 오래 굳어진 습관. 지금도 엄마는 가족들 밥을 챙기려고 태어난 사람인가 싶을 만큼 삶의 목적이 가족들 밥을 향해 있다. 자신이 아무리 힘들어도 식구들 밥을 차려야 한다며 부엌으로 향하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밥 시계가 프로그래밍된 기계인간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 만큼 엄마는 밥에 집착적이다. 엄마가 자신을 희생해 챙겨주려는 행동들은 같이 있는 사람을 말할 수 없이 불편하게 한다. 이를 솔직하게 말하면 돌아올 대답은 뻔하다. ‘엄마는 상관없는데. 엄마는 이게 편해. 엄마는 엄마니까 괜찮아’ 엄마도 참 숨 막히게 변하지 않는 답답한 사람이다.
불편한 사람은 엄마만이 아니었다. ‘크아’ 감탄사를 내뱉으며 아빠가 상 위에 술잔을 탁 내려놓자 나도 모르게 순간 ‘헛’ 하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거였구나. 동생들이 설날인데도 별다른 이유 없이 아침 떡국을 거르겠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음복 한 잔에 술 냄새를 풍기면서 설날 아침 반주를 포기하지 않을 아빠가 훤히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지없이 술에 취한 아빠와 한자리에 있기가 불편하고 싫어서 일 것이다. 나는 독립해서 산지 오래돼서 이 집에서 경험했던 아빠의 만행을 기억에서 자꾸 지우고 마는데, 동생들에게는 그 고통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엄마 생신 때를 떠올려보면 아빠는 예전처럼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취해서 고성을 지르고 험악한 말을 내뱉는 정도의 폭력성을 띠지는 않더라도 거의 항상 술에 취해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자식들이 학을 뗄 만큼 심각한 수준으로 고집과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지난 엄마 생신 때도 사실, 아빠와 말다툼을 하고 속상해서 쓰러져 잠들 때까지도 아빠가 술 취한 상태였다고 알아채지 못했다. 다음날 엄마는 ‘아빠가 저녁식사 때 반주로 막걸리를 드셨는데 한두 잔이라서 괜찮은 줄 알았다. 술 취하셨다고는 엄마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좀 더 눈치를 주고 말씀을 조절하도록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미안하다. 엄마가 대신 사과할게’라며 사과를 청했었다. 정작 알코올의존자는 당당히 술만 잘 처먹고 술기운에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면서도 부끄럼 한 점 내비치지 않는데, 대체 왜 같은 주변인인 엄마가 대신 사과를 건네는 건지, 이 코미디 같은 상황은 무엇인지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이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어른이건만 일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잊고 싶었던 알코올의존증 아버지라는 존재는 과거 시제인 줄 알았는데 살아있는 현재 시제였다. ‘이제는 전부 괜찮다’라고 믿었던 착각과 달리 아버지는 20년, 30년이 지난 현재도 지옥 같던 그때와 어쩜 그리 한결같이 똑같을 수 있는지. 이런 인간과 부녀관계를 맺고 있다는 거부하고 싶은 현실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 하나만은 알 것 같았다.
일단, 아버지가 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앞으로 모든 가족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통보했다. 오랜 관습에 젖어든 습관이 남아있어서 처음에는 마음이 불편했는데, 한두 번 불참을 실행에 옮기니 생각보다 별것 아니다. 점점 익숙해지고 마음도 가벼워지고 있다. 긴장되고 경직되는 불행한 시간을 도리와 관습이라는 미명에 발목 잡혀 왜 그리 오랫동안 미련하게 견뎠을까. 아버지와 할머니를 제외한 우리 가족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명절과 가족 행사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명분과 의미에 충실한 전통과 관습은 지켜야하지만 이 모든 것을 왜곡해 산 사람이 억압받고 고통 받는 전통과 관습을 과연 지켜야할까.
올해 설에는 동생이 내가 사는 집으로 오기로 했다. 연휴 마지막 날에는 나답게 살기를 바라는 이들을 위한 모임에 참석해 새로운 사람들을 사귈 예정이다. 술 취한 아버지를 견디라고, 이제는 자발적으로 명절 노동을 감내하는 엄마를 지켜보라고, 여전히 남자상/여자상을 따로 두는 시대착오적인 명절 풍경을 방관하라고 억압하고(받고) 강요하는(받는) 가족과 관습을 벗어나 미약하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보려고 한다. 더 이상 예정된 불행 속에 자발적으로 몸담고 싶지 않다. 올해 내 삶의 목표는 인내하고 잘 견디기가 아니라 난생처음 '행복하기'로 정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