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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Oct 30. 2022

공감 능력의 부재와 지독한 꼰대

이태원 핼로윈 참사, 애도하고, 꼬옥 안아주길 바라는 마음

어렸을 때, 그러니까 아주 어렸을 때는 아니고, 중학교 3학년~고1 무렵이었던 것 같다. 가족이 다 같이 둘러앉아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었고, TV에서는 뉴스 앵커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유럽의 A 나라에서 유람선이 전복하는 사고가 발생해 한국인 관광객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입니다. 이 유람선의 탑승객은 대부분 한국인 단체 관광객으로 알려졌으며, 정확한 사고 원인은 조사 중으로 사상사 집계 관련 소식은 들어오는 대로 추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정확히 어느 나라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20여 년 전의 이 사건을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이어진 충격적인 발언 때문이었다.


“에잇, 놀다가 죽은 놈들은 죽어도 돼. 저놈들은 그래도 괜찮어.”


너무 어이가 없어서였을까. 권위적인 아버지가 익숙했던 걸까. 우리 가족 중 그 누구도 이 끔찍한 발언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다들 꾸역꾸역 밥만 처먹었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버지를 향한 혐오감이 들기 시작한 것이.




[속보] 이태원 일대 압사사고 발생, 사망자 000명, 부상자 00명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친구가 새벽에 보내준, 사고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이 트위터에 올린 심경과 거짓이라기엔 너무나도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한 글을 읽고, 네이버에 도배된 사고 관련 뉴스를 확인하고서야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어이없는 일도 벌어지는구나’ 싶어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게, 거기를 왜 가 가지고. 핼러윈이 뭐 대단한 거라고.’


사람이 죽었는데…… 그것도 백여 명이 훨씬 넘는 사람이 느닷없이 죽었는데, 생각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있냐고, 일하다가 죽는 건 안타깝고, 놀다가 죽는 건 그래도 되는 거냐고, 거기 놀러 간 사람이 평생 일만하다가 노년에 이제야 여유가 생겨서 오랜 꿈을 이루러 간 걸 수도 있지 않느냐고, 어떻게 사람 목숨에 차등을 두고, 경중을 따질 수가 있냐고’ 속으로 백 번도, 천 번도 넘게 아버지에게 따져 묻던 나는 어디 가고…… 혐오해 마지않던 아버지와 어느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동생이 떠올랐다. 동생은 외국인 친구도 있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설마……?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동생이라고 모처럼 이태원 나들이를 가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새벽 3시, 당장이라도 동생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확인하고 싶었다. 가만히 정신을 좀 가다듬자 동생도 나처럼 어느덧 삼십 대 중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십 대 중반이라고 핼러윈을 즐기지 말란 법은 없지만, 확률은 낮다는 생각에 이르자 조금은 안도감이 들면서, 이제야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20대 청춘들과 억장이 무너져 내릴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핼러윈 축제를 간 사람들은 발랑 까진 놀기만 좋아하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하루 특별한 날에 즐겁고 싶고, 소중한 사람들과 추억을 남기고 싶고, 한창 호기심 많고 경험하고 싶은 것도 많은 평범한 20대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안타까움과 부끄러운 감정이 뒤섞여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결국 숨을 거둔 이와 가까스로 살아 나온 이 모두 갑자기 벌어진 아비규환 속에서 얼마나 살아남고자 발버둥을 치며, 두려움에 떨었을까.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니 말이다. 그러니까 ‘거기를 왜 가 가지고. 핼러윈이 뭐 대단한 거라고.’ 라거나, ‘놀다가 죽은 놈들은 죽어도 돼.’라는 남 탓을 먼저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공감 능력의 부족이고, 매사에 이런 식인 사람을 우리는 지독한 꼰대라고 부른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이 툭 튀어나온 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핼러윈을 부정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친구들과 연인과 핼러윈이라는 축제를 자유롭게 즐기는 사람들과 그 젊음이 부러워서 질투가 났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그때만큼 젊지도, 함께 즐겁게 놀 사람들도 별로 없으니까. 하루하루를 쳇바퀴 돌 듯 바쁘고, 갈수록 책임감은 더해만 가는데, 인생은 전체적으로 단조롭고 만족스럽지는 않으니까.


아마 젊은 시절 아버지도 자신은 쉼 없이 일만 하는데, 외국에 놀러 간 사람들이 지독하게 질투가 나고, 반면 자신의 인생은 지독하게 불행하다고 느꼈었나 보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이나 태도가 옳다는 건 결코 아니다. 너무나도 무례한 발언이고 자신이 얼마나 속 좁은 인간이지만 드러날 뿐이니까.




세상을 떠난 꽃다운 젊은이들의 죽음을 보고 말로는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안타까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자 한다.) 어떤 식으로 바라보느냐의 차이여서 다 맞는 말일 테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은 잊어버린 불안하지만 자유롭고, 세상을 향한 관심과 호기심이 넘쳐흐르고, 그래서 시행착오도 많이 저지르고 상처도 많이 받던 자신의 지난 20대를 떠올리며, 누구를, 무언가를 탓하기 보다는 공감과 위로의 말이 더 많이 번져 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번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를 애도하고, 명복을 빌고, 그 가족들과 트라우마를 겪고 있을 이들의 지인이라면 말없이 따뜻하게 그들을 꼬옥 껴안아주며 꽁꽁 언 마음을 따뜻한 체온으로 잠시나마 녹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처참한 인재가 제발 반복되지 않기를 가슴 깊이 바라고 또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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