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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Apr 30. 2020

우리 꼭 밥 한끼 같이 해요

두 번 만나고 싶은 사람

디자인실 000 부장 00상
 장례식장: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성당
 조문은 △월 △일부터 받습니다.


회사 인트라넷에 부고 소식이 올라왔다. 평소 교류가 별로 없던 동료라도 직계가족의 부고 소식은 늘 안타깝다. 특히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불효녀가 잠시나마 효녀의 마음가짐을 갖는 순간이다. 000 부장님은 업무적으로 왕래할 일은 거의 없지만 건너 건너서 고향이 제주도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제주도라니…… 조문객이 많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뒤로한 채, 깜빡이며 답변을 재촉하는 메신저 창에 정신없이 타이핑을 이어갔다.




몇 년 전부터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등 공휴일을 잘 계산해서 4월 말이나 5월 초에 미리 연차를 신청했다. 일주일에서 열흘가량 자체적으로 ‘봄 휴가’라고 이름을 붙여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 이 시기에 혼자 2주 정도 제주도를 여행한 적 있는데, 평화로운 자연 풍광이며, 오월의 따뜻한 햇살이며, 여유로운 생활까지, 종일 나가서 걸어만 다녀도 행복했다. 서우봉을 병풍 삼아 탁 트인 동북쪽의 함덕 해변은 이국적이어서 좋았고, 올레 7코스, 칠십리시공원이 있고 새섬이 보이는 서귀포 남쪽은 산책로와 미술관이 많아서 좋았다. 매년 제주도에서 보내는 봄 휴가를 고대하며 살뜰히 생활비를 아껴 모았고, 인트라넷에 부고 소식이 올라온 그해에도 행복을 찾아서 미리 제주도 항공권을 끊어 놓았다.


마침내 휴가일에 이르러서 여행 짐을 챙기려고 캐리어를 펼쳤다. 다른 때와 달리 이번에는 여행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원피스와 검정 구두를 가장 먼저 챙겼다. 그새 체중이 좀 불어서 원피스가 몸에 꼭 꼈지만 다행히 못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후, 여느 때처럼 가벼운 옷가지와 세면도구, 수영복 등을 챙겼다. 마지막으로 봉투에 부의금을 넉넉히 넣고 봉투 겉면에 이름을 적은 뒤 휴대용 손가방에 넣었다.




봄날의 제주도는 여전히 따뜻했다. 몇 번 머문 칠십리시공원 부근의 호텔은 편안했고, 이젠 주변 지리도 익숙해서 길을 찾느라 헤매지 않았다. 절벽 아래 짙푸른 바다가 파도로 부서지는 올레 7코스를 따라 황우지 해안을 지나 외돌개까지 걸었다. 지난번에 가보지 못한 정방폭포와 왈종미술관에도 들르고, 파스타와 빵이 맛있는 작은 레스토랑과 흑돼지 돈가스가 일품인 음식점에서 식도락을 즐겼다. 역시 제주도에 오기를 참 잘했다.


보통은 돌아가신 후 장례식장이 정해지면 바로 조문을 받기 마련인데, 왜 며칠 후부터 조문을 받으신다는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먼저 연락을 한번 드려볼까 싶다가도, 경황이 없는데 내가 더 정신을 흩어 놓는 건 아닌가도 싶고, 평소 교류도 별로 없는 사이였기에 괜히 어색할까 싶어서 그만두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인트라넷에 써진 조문 당일이 되었다. 준비해 간 검은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장례식장은 제주도에서 관공서 등이 밀집한 제주시 시내 근처였다. 운전을 기피하는 편이라 렌트를 하지 않아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20분 정도 걸어서 제주시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중산간을 굽이굽이 넘어 제주시 시내에 도착했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몇 정거장 더 이동하니, 마침내 ** 성당이 보였다.


아직 조문객이 많지는 않은 모양인지 장례식장으로 변한 성당은 조용했다. 조문한 뒤 000 부장님과 처음으로 함께 식사하며 긴 이야기를 나눴다. 000 부장님은 처음 준비하는 상례인데, 전문 장례식장이 아닌 고인께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시던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르기로 해 더 경황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징검다리 휴가철이라 제주도로 오는 비행기를 예약하기도 어려웠고, 장례 절차 논의에도 시간이 걸려 조문을 늦게 받게 되었다고. 식사 장소도 급하게 근처 식당 몇 군데를 섭외했다고 했다. 내 의외의 방문에 놀란 눈치였지만, 와줘서 정말 큰 힘이 되었고, 그 덕분에 잠시 쉴 수 있다며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으로 서울에 가면 회사에서 꼭 밥 한끼 같이 하자는 약속을 하고, 나는 다시 서귀포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붉은 금빛 비단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서글픔에 맥이 빠지면서도 왠지 모를 뿌듯한 감정이 가슴을 눌러 진공 상태에서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휴가는 마친 나는 먼저 회사에 출근했고, 부장님은 보름 정도 뒤에 복귀했다. 여전히 업무적으로 부장님과 교류할 일은 거의 없지만, 예전과 달리 우리 둘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었다고 느꼈다. 오며 가며 부장님과 가끔 마주칠 때마다 서로 ‘시간 맞춰서 같이 밥 한끼 먹자’라고 인사를 나눴다. 때로 자주 마주치는 날이면, 같은 인사를 건네기가 민망해 나 혼자 속으로 ‘부장님과 식사 한 번 해야 하는데……’라고 되뇌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주로 업무가 겹치는 이들과 어울리다 보니, 식사 약속 한 번 잡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 어느덧 시간이 지나 한겨울이 찾아왔다.


000예요.
 마음 한편에 항상 고마움이 있어서
 언제 점심 한번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까지 출근이라니 아쉬움이 남네요.
 어디서든 행복하고 좋은 일만 있길 바랄게요. ^^


인생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결국, 부장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고마움이든 일단 가슴에 들어온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계기로 상대방과 만나지 않거나 주변 환경이 바뀌어 망각하고 살아갈 뿐이다. 인생을 살아가다가 000 부장님과 우연히 마주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다시 만났을 때도 회사에서처럼 ‘저희 밥 한끼 같이 해요’라고 편안하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잘 지내는지 가끔 안부가 궁금하고,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는 것. 우연히라도 한 번은 더 마주치고 싶은 두 번 만나고 싶은 사람이자 아직 끊어지지 않은 인연. 부디, 그때까지 서로 건강하고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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