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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Feb 10. 2024

집착형&회피형 연애/결혼하면 벌어지는 일들

불행의 징조는 일찌감치 나타났다, 다만 내가 외면했을 뿐

지원이는 강의 시간에 손을 번쩍 들고 교수님께 궁금한 점을 질문했다. 예쁜데 성격도 좋아서 과에서 가장 인기 많은 지원이가 내 여자친구라니 믿기지 않는다.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조차 매력적이다. 우리는 자주 데이트를 하고 밤새 다정한 전화통화를 하며 서로 더 가까워졌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 지원이가 마음의 벽을 점점 허무는 것이 느껴지자 설렘 이상의 만족감이랄까. 묘한 성취감에 도파민이 마구 분출되는 것 같다.


그런데 지원이는 유독 전화통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최근에는 친구들과 저녁에 게임을 하기로 했다고 미리 말했는데, 지원이가 유난히 그 시간에 통화를 하고 싶어 해서 게임에 참여하지 못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원하고,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넘어갔다. 한 번은 같이 부산 여행을 갔다가 KTX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지원이는 평소처럼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 주기를 바랐다. 물론, 여행은 즐거웠지만 나도 녹초가 된 상태인데, 지원이는 이해하지 못하고 삐쳐버렸다. 결국은 택시를 타고 지원이 집까지 갔다가 다시 그 택시를 타고 우리집까지 왔다. 아주 가끔 지원이는 나에게 ‘너 나 사랑해? 이제는 사랑이 식었구나’라고 농담조로 말하는데,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물론, 이런 억지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며, 평소의 지원이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우리는 꽤 잘 통하는 커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하고 다른 캠퍼스 커플들은 대부분 헤어졌는데, 잘 맞는 장기 커플인 우리는 결혼에까지 골인해 이제는 부부가 되었다. 지원이는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회사에서 겪은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공유하고 싶어 한다. 처음에는 이런 게 연애와 결혼의 차이이자 한집에 사는 부부의 즐거움인가 싶었다. 하지만 나도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돌아와서 좀 쉬고 싶은데, ‘박 대리는 이런 점이 문제이고’, ‘유 차장이 이런 짓거리를 해서 억울했고’, …… 지원이의 끝도 없는 억울함과 불만불평을 듣고 있자니 ‘얘는 대체 나에게 왜 이럴까.’ 싶었다. 해결책을 바라는 걸까, 위로가 필요한 걸까,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걸까 늘 헷갈린다. 하지만 지원이가 이런 적나라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회사에서나 지인들에게는 여전히 멋지고 당당하며 배려심 짙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결혼 전에는 혼자서 오피스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은 잠들 때 곁에 내가 없으면 잠이 안 온다고 한다. 강지원 잠재우기가 내 중요한 일과라고 알면 주변 사람들은 아마도 꽤나 놀랄 것이다. 요새는 내가 결혼을 한 건지, 육아를 하는 건지 정체성이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독립적이고 자신감 넘쳐 보이는 지원이는 실은 내가 자신을 떠날까 봐 혹은 버릴까 봐 은연중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연인에게서 누구보다 많은 사랑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성향이었다. 그는 (현실적이지 않은) 무한한 사랑을 갈구하고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큰 사람이었다. 이상이 나중에 깨달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던 지원이의 말과 행동의 이유였다.




민재는 확실히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다. 존재감이 없고 친구도 별로 없어서 교수님이 출석이라도 부르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 티도 나지 않을 아이였다. 지극히 평범한 민재와는 종강 파티에서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아 처음 대화를 나누었다. 과묵한 인상처럼 민재는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 경청할 줄 알았다. 자기중심적이고 자아가 팽창해 과시하기 좋아하는 다른 남자애들과는 달리 겸손하고 섬세하며 다정했다. 민재의 의외의 면모를 발견하고는 나는 그와 사랑에 빠졌다.


민재는 자신은 말주변이 별로 없어서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고 했다. 그래서 주로 내가 대화를 이끌고 민재는 적절히 호응하거나 내 생각에 그의 생각을 덧붙이는 식으로 얘기를 나눴다. 물론, 민재도 가족 모임을 했다든가 이번 시험은 망쳤다든가 웹툰을 재밌게 봤다든가 하는 소소한 일상을 공유했지만, 민재의 얘기는 대체로 짧고 구체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가족 모임이 어땠냐고 물으면 ‘가족 모임이 다 비슷하지, 뭐. 밥 먹고 얘기하고 평범했어’라며 일축하고, ‘시험 망쳐서 어떡해’라며 걱정하면 ‘다 예상한 일이야. 어쩔 수 없지, 뭐’라는 식으로 마치 인생을 한번 살아본 도인이라도 된 듯이 말해서 민재에 관한 대화는 금세 끝나버렸다. 이때는 의연하고 진중한 민재가 다만 표현이 서툴 뿐이라고 생각했다.


민재는 평소에 먼저 나에게 같이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등을 묻고는 대체로 내가 하자는 대로 맞추고 따르는 편이라서 우리는 다투거나 갈등을 겪을 일이 거의 없었다. 민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자신도 좋아한다는 식이었고, 실제로 데이트를 할 때 민재도 나만큼 즐거워 보여서 우리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데이트는 실은 나와 민재 사이의 절충안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것 같지만, 엄밀하게는 내가 알고 있는 민재의 성격이나 취향을 고민하고 반영한 활동, 음식, 장소 등이 내 입을 통해서 나온 것이었다. 사실 민재는 성숙하고 배려심이 깊은 것이 아니라, 의견이 불일치해 조율을 하는 데 최대한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거였다. 자신의 의견이 거부되면 상처가 크고 상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마음을 꺼내 보이기를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었다. 인간관계에서 작은 갈등이라도 생기면 스트레스가 극심해 불안감을 피하고 자신을 보호하고자 몸에 익어버린 고도의 회피 전략이었다. 


민재는 (나의 드러나지 않는 배려로) 자신의 성격과 취향에도 맞는 즐겁고 편안한 시간을 함께 보내되, 그의 의사를 반영해 많은 것을 꼬치꼬치 묻기보다 내 이야기를 주로 하며, 일정 정도 거리감을 유지한 이 연애 관계에 대단히 만족한 모양이다. 우리가 잘 맞는다는 생각에 결혼하고 싶다는 내 제안에 그도 ‘너처럼 많이 좋아하고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사람은 처음’이라며 선뜻 결혼을 수락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혼으로 우리가 지금껏 누린 평화는 소멸됐으며, 전혀 상상도 못 한 지옥의 문이 열렸다. 연애와 달리 거의 종일 같은 공간에서 부딪히고 갈등은 산재하며 조율은 일상이고 원치 않아도 더없이 친밀해질 수 없는 결혼생활은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남들보다 많은 거리감과 자기 공간이 필요한 예민한 민재에게 끝없는 자극과 스트레스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민재는 회사생활을 제외하면 집에서의 거의 모든 시간을 점점 헤드셋으로 귀를 막고 컴퓨터 게임에만 열중하며 흘려보냈다. 그는 말수가 더욱 줄어서 응, 아니 정도의 대답을 할 뿐이라 더는 대화다운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고, 나는 결혼을 한 건지 하숙생을 들인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같이 있는 시간은 헤아릴 수 없이 길어졌지만 사무치는 외로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함께 해서 외로운 감정은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과는 비교할 수 없이 공허하고 비참했다.


가장 이해되지 않는 건 대답을 이미 했는데도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반복하는 민재의 성향이자 습관이었다. 한 번은 컴퓨터 속도가 느려져서 ‘좀 더 쓰다가 바꿔야겠다’라고 하자 민재가 고맙게도 ‘컴퓨터 바꿔줄까?’라고 했다. ‘아니야, 아직 쓸 만해. 좀 더 이따가 바꾸려고. 필요하면 그때 다시 얘기할게’라고 의사를 분명히 밝혔는데도, 민재는 희한하게 ‘솔직히 말해도 돼. 컴퓨터 바꾸고 싶잖아. 컴퓨터 바꿔줄까?’라고 계속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짜증을 돋궜다. 나중에야 민재는 꽁꽁 감춘 속마음을 말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속마음과 드러난 말의 불일치 정도가 굉장히 큰 사람이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자신처럼 컴퓨터를 사고 싶은 진짜 속마음을 감추고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고 생각해서 계속 캐물었던 것이다. 입 밖으로 뱉은 말을 신뢰하기 어렵고, 겹겹이 싸인 속마음을 읽기는 더욱 어려운 내면이 복잡하고 요동치는 이 남자와 계속 같이 살 수 있을지 자신감이 없었다. 고민이 깊어졌다.




지원이는 불안정-저항(양가)애착, 민재는 불안정-회피 애착에 중점을 두고 나의 경험과 주변 이야기를 바탕으로 상상한 가상의 스토리이다. 불안정애착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상대에게 집착하고 의심하고 감정이 격렬해져 매일 화내고, 무책임하게 대화를 무조건 회피하지는 않는다. 능력적으로 사회에서 인정받고, 주변 사람에게 성격 좋고 성실하고 사회성이 있다며 괜찮은 평판을 얻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연애 상대에게도 처음에는 더없이 멋진 사람이며, 심지어 결혼하기 전까지 이들의 무의식에 깔린 높은 불신감과 낮은 자존감 등은 잘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 사실 자신이 상대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이고 애정을 갈구하며 감정 표현이 과한 집착하는 성향이 강하고, 갈등 상황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기보다 회피하는 성향의 사람이라고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누구나 비교할 만한 다른 환경을 접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방식이 익숙하고 옳은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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