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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n 25. 2024

사랑을 안 믿는다던 썸머는 왜 갑자기 결혼을 했을까

영화 <500일의 썸머> 톰과 썸머의 관계에 대해서 ②

*이전 글: https://brunch.co.kr/@smilepearlll/409/




톰의 사랑은 자신의 이상형의 애정을 갈구하는 데 그쳤다면, 썸머는 톰이라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싶어 했다. 사랑은 없다며 가벼운 관계를 원한다는 썸머가 육체적, 정서적으로 실제 행동에서는 매사 사랑에 솔직하고 적극적이었다면, 사랑을 믿는다며 분명한 애인사이로 정립되길 바란 톰의 사랑은 오히려 피상적이고 소극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만일 톰이 바란 대로 두 사람이 공식적인 연인관계가 되었다고 해도 썸머의 다른 연애처럼 금세 헤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썸머가 바란 대로 두 사람의 관계가 애매모호했기에 오히려 두 사람의 연애(?)가 그나마 지속되고 특별해질 수 있었다.


톰은 썸머에게 관심이 있고 좋아하긴 했지만 냉정하게는 썸머를 사랑한다고 믿은 사랑에 도취된 자기 자신을 사랑한 셈이다.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이 유래된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된 나르키소스 신화와 다르지 않다. 단적으로 톰은 썸머와 첫날밤을 보내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에너지가 솟구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상형인 예쁜 썸머가 자신의 내밀한 공상을 자기에게만 털어놓았다고 알게 되자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에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다. 실제로 톰은 썸머에게 사랑받는다고 느낀 기간에 멋진 카피를 잔뜩 쏟아내며 업무 성과도 최고조를 달린다. 이는 사랑에 빠졌을 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행복감과 충만감이지만, 톰은 자기도취적인 감정에 머물러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운명의 반쪽인 썸머만이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믿는 톰의 사랑은 마치 아이가 엄마에게 애정과 보살핌을 갈구하는 듯한 유아기적 단계에 머물러있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을 따른다고 표현한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_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2006.10(4판))>, 62쪽 중에서


톰의 사랑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에게 사랑은 운명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사랑은 운명의 상대가 짠하고 나타나면 사랑이 완성된다. 운명의 상대를 찾는 과정이 사랑의 전부이므로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다. 상대에게 관심을 갖거나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운명의 끈으로 연결돼 헤어질 수 없는 영혼의 단짝이므로.





<초반에 던진 질문>

왜 썸머는 톰과의 관계를 연인으로 규정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을까. 사랑을 믿지 않고 애인도 싫다더니 왜 어느 날 갑자기 결혼을 해 유부녀가 되었을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톰의 말에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너와 만날 때 몰랐던 걸 깨달았다’는 썸머는 대체 무엇을 깨달았을까. 톰은 모르지만 소개팅 상대는 진작 깨달았고, 이제는 썸머도 알게 된 것이 무엇일까.


썸머는 식당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와 그 책 내용을 물어본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라고 말한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이때가 아마도 연애는 해봤지만 사랑은 못 해봤다는 썸머가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한 순간일 것이다. 사랑은 환상이라는 썸머에게 당신이 틀렸다며 언젠가 사랑을 느낀다면 자신의 말을 믿을 것이라고 장담하던 톰과는 아무리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도 느끼지 못한, 자신이 갈구하던 ‘이거다!’ 싶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아마도 썸머의 남편은 첫 만남에서 썸머에게 왜 이 책을 좋아하는지, 어떤 문장이 와닿았는지, 이 작가의 책은 처음 읽는지, 이 작가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는지 등을 묻지 않았을까. 톰에게 건축에 대해 물으며 상상하는 디자인을 문신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팔에 그려달라고 했을 때 톰이 느꼈을 바로 그 감정을 썸머도 비로소 느끼지 않았을까. 진정한 관심과 존중, 공감과 배려, 경청 – 이것이 바로 사랑을 안 믿으면서도 갈구하던 썸머가 마치 사랑을 아는 듯했던 톰이라는 사람에게 기대했지만 얻을 수 없었던, 그러나 어느 날 아침 불현듯 깨달은 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썸머는 늘 사랑을 했고, 그 방향은 상대방을 향하고 있었다. 사랑을 믿는다는 톰은 썸머를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톰은 썸머가 필요해서 썸머를 사랑하려고 했지만, 썸머는 톰을 사랑해서 그와 함께 있고 싶어 했다. 톰은 사랑받기 때문에 썸머를 사랑했지만, 썸머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고자 했다. 톰에게 사랑은 애정을 얻기 위한 도구였지만, 썸머에게 사랑은 그 자체로 목적이었다. 


사랑을 애원해서는 안 된다.

강요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상대에게 끌려가지 않고

상대를 끌어당기게 된다.

_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주기만 하는 사랑은 사랑할 때 공허하지만, 받기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끝났을 때 공허하다. 주는 사랑은 자유롭지만, 받는 사랑은 구속된다. 그래서 연애가 끝나고 톰에게 썸머는 bitch 였지만, 썸머는 톰과의 추억이 담긴 언덕을 좋아하게 되지 않았을까. 마지막에 썸머가 톰에게 손을 포갠 것은 둘의 추억을 따뜻하게 간직하고 싶은 이별 의식이자 자신이 깨달은 사랑의 의미를 톰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자유롭고 충만한 주고받는 사랑의 기쁨에 대해서.


마침내 운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기적은 없으며,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톰에게 운명처럼 어텀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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