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로저> ‘래리’를 통해 본 통제하고 소유하는 사랑
래리는 안나와 정반대인 사람이다. 안나와 결혼하고 첫 출장에서 돌아온 래리는 안나에게 ‘술탄이 선물이 가져왔지’라고 말하며 뉴욕에서 산 예쁜 구두를 건넨다. 댄이 안나인 척 연기한 온라인 채팅에서 래리가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털어놓자 댄은 ‘완전 술탄과 하렘’이라고 평가한다. 술탄은 이슬람 세계를 통치하는 군주 또는 황제이고, 하렘은 이슬람 국가에서 가까운 친척 이외의 일반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부인들이 거처하는 방이다. 래리는 자신을 술탄에 빗댈 만큼 마초적이고 지배적이며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이다.
래리는 상대방을 소유하거나 통제하고 싶은 욕구도 강하고, 수컷의 본능에 가까운 남성적인 경쟁심도 강하다. 그래서 안나가 자신의 외도 사실을 고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안나를 놓아주지 않으려 하고 끝내 ‘집착’한다. 이혼 서류를 내미는 안나에게 반복해서 ‘(자신은 여전히 안나를) 사랑한다며 돌아오라(Come back)’고 요구하고, 안나가 거절하자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같이 자 달라며 그 대가로 이혼을 받아들이겠다’라는 조건을 내건다.
- 래리: 조건이 하나 있어. 지금 내 병원 사무실로 가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섹스해 줘. 물론 싫겠지. 날 경멸해도 좋아. 마지막 부탁이야. 옛정을 생각해서. 난 당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왜냐하면 당신한테 완벽하게 속은 게 너무 억울해서. 당신 몸이라도 안아야 속이 좀 풀릴 것 같아. 내 창녀가 돼 줘. 그 대가로 당신에게 자유를 주겠어. 이것만 들어주면 다신 귀찮게 안 해. 바에 가 있을게. 요즘도 보드카 마시지?
래리는 자기 자신을 인간 심리를 꿰뚫고 있다고 자평하는데, 안나는 이런 래리를 오만하다고 평가하지만 이는 사실이기도 하다. 안나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같이 자 달라고 부탁인 듯, 강요인 듯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래리의 말에서 래리는 자신의 뻔뻔함에 가까운 솔직함과 당당함을 무기로 사람의 마음을 얼마든지 설득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알 수 있다. 아마도 래리는 댄이 말했듯이 (원만한 이혼이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안나가 자신과 동침한 사실을 알면 댄이 견디지 못하리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댄과 헤어진 의존적인 우울증 환자인 안나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처럼 래리는 사냥감을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맹수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획득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되찾은 안나는 사실 사랑이라기보다는 지배하고 다스릴 전리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경쟁심이 강한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의 래리는 복수에도 철저한 편이라 댄에게 결국 스트립 클럽에서 만난 앨리스와도 잤다고 털어놓고 만다.
댄이 래리와 신경전을 벌이며 ‘안나는 당신의 단순함을 혐오한다’고 말했듯이, 댄은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출장에서 바람피운 것을 아내에게 바로 고백할 만큼 달리 말하면 솔직하고 투명해 보인다. 이때 아내에게 버려질 각오를 할 만큼 양심은 있고, 자기 행동에 책임질 줄도 안다. 신뢰가 깨질 것을 알면서도 진실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래리에게 사랑이란 자신과 타인의 한계를 알고 타협하고 인내(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래리는 안나의 전 남편과 달리 자신은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사람이라며 진실을 알기를 원할 뿐 공격성을 억제할 수 있다고 암시한다. 금연 중이던 댄이 흡연자인 앨리스에게 물들어 사진촬영을 하는 시점에는 다시 흡연을 하는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반해, 래리는 전시회에서 만난 앨리스가 담배를 권하는데도 잠시 갈등하다가 거절하는 절제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 안나: 욕실에 불만 있어요?
- 래리: 너무 깨끗해서 거북해. 나보다 더 깨끗하잖아. 건방지다고. 거울이 이러는 것 같아. “이 더러운 자식아.”
- 안나: 당신이 골랐어요.
- 래리: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건 아니야. 아무튼 너무 사치스러워.
오만하고 저질스러운 인간이기는 해도 충동적이고 애 같기만 한 댄과 달리 래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솔직하고 투명해 보이며, 자기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비교적 일관성 있는 안정적이고 포용적인 사람이기에 안나는 결국 래리를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래리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고 타협은 할지 언정 직접 고른 거울이 너무 깨끗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할 만큼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결코 만족할 줄 모르고 후회하며 공허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억압한 감정과 공허한 결핍이 때때로 상대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섹스와 술탄과 하렘이 연상되는 성적 판타지로 분출하는 치명적인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기도 하다. 뻔뻔한 래리는 자기 의도대로 전리품인 안나를 되찾아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지만, 과연 이것이 래리가 정말로 원한 것일까. 자기 자신만의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어서 진실(truth)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지는 않을까. 알다가도 모를 모순이 인간의 본질인가 싶다.
댄처럼 나르시시스트로서의 자기중심적이고 유아기적인 사랑, 래리처럼 지배적이고 통제하는 가부장적인 억압하고 소유하는 사랑, 앨리스처럼 헌신하고 희생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신하고 회피하는 자기기만적인 사랑, 안나처럼 의존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부모 같은 배우자’를 찾는 사랑 -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연인에게 받고자 하거나, ‘사랑한다’면서 연인을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누구나 한 번 즈음 거치거나, 지금 하고 있거나,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관계의 방식이다. 특히, 의존적인 여성과 지배적인 남성, 불안정한 여성과 회피하는 남성이 낭만적 사랑에 빠졌다가 서로 깊은 내상을 입고 관계의 파국에 이르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성립한다).
정리하자면,
▲ 의존적이고 우울한 여성(안나)이 보호와 돌봄을 기대하고 자신감 넘쳐 보이고 자신을 이끌어 줄 듯한 지배적이고 통제적인 남성(래리)에게 끌리거나,
▲ 학대받은 경험에 익숙한 여성(안나)이 충동적이든 자기중심적이든 상관없이 다정한 남성(댄)에게 끌리거나,
▲ 겉으로는 자존심이 세고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내면은 외롭고 슬프고 공허해서, 상대에게 버려질까 봐 두려워서 자신을 예쁜 인형을 보듯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 취급을 하고, 몰래 바람을 피우며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상대(댄)에게 오히려 더욱 헌신하고 희생하는 방식으로 집착하거나(앨리스),
▲ 나르시시스트로서 우월한 자신감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거절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나를 좋아해야 한다며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병적으로 집착하거나(댄),
▲ 자신은 특별하고 완벽한 존재이므로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리라고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해 여러 사람과 동시에 연인관계를 형성하거나(댄),
▲ 자신을 떠받들고 의존할 만한 자존감 낮은 사람만을 골라 돌봄과 보호를 대가로 지배하고 통제하며 왕처럼 군림하며 살아가는(래리) 식이다.
댄, 앨리스, 안나, 래리는 다른 인물 같지만 사랑을 하고 연인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을 억압하거나 회피하며, 상대를 소유해 통제하기를 바라고, (깊은 내면에서는) 상대를 불신하고, "한없이" 의존하며 돌봄 받기를 바라는 미성숙하고 유아기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 인물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지만(부정적 자기 인식) 타인 또한 불신한다(부정적 타인 인식)는 점에서 모두 공허하고 불행에 갇혀 있는 클로저(Closer)들이다. 자기 자신도, 타인도 실제로는 사랑하지도, 존중하지 않으면서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사랑의 허상에 붙잡혀 사는 사람들이다.
<클로저>의 네 인물은 누구와도 금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관계의 풍요 속에 살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외로움과 허전함, 소외감과 고립감에 붙들려 '부디, 나를 아낌없이 사랑해줘'라며 타자(사람 또는 사물 등)에게 집착하고 중독돼 괴로워하는 현대인 다수의 표상을 보는 것 같다.
[이전 글]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의 자기중심적인 사랑 - ‘댄’을 통해 본 유아기적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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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글] 지배적이고 권위적인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사랑 - ‘래리’를 통해 본 통제하고 소유하는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