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로저> ‘앨리스’를 통해 본 기만적인 사랑
헌신적이고 한없이 퍼주는 것만 같던 앨리스. 그의 본명은 제인 존스이며, 앨리스 에이리스는 시립 묘지에 안장된 불 속에 뛰어들어 아이 셋을 구하고 희생한 사람이라는 놀라운 반전은 앨리스가 실은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사람이라고 명징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댄에게 ‘너를 더는 사랑하지 않아’라며, ‘사랑이 어디 있어?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어. 몇 마디 말은 들리겠지만 그렇게 쉬운 말은 공허할 뿐이야’라고 말하는 앨리스에게서 사랑을 믿지 않고 사랑에 회피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앨리스는 댄에게 헌신적으로 보이지만 연인에게조차 자신의 실명을 밝히지 않고 가명을 사실로 믿게 할 만큼 기만적이고 의심이 깊다. 지난 연애에서도 그랬듯이 마음을 먹으면 ‘너를 더는 사랑하지 않아’라며 상대를 향한 애정을 거두기도 쉽다. 이전에 앨리스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상세하게 묘사하진 않지만, 스트립 댄서라는 앨리스의 직업도 그가 사람에 대한 상처와 불신이 깊은 관련이 있는 듯 보인다.
댄의 경우, 영화 전반에 걸쳐 나르시시스트의 면모가 드러났다면 앨리스는 특히, 진실을 일부 또는 완전히 감추거나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자기기만적인 행동이 대사로 끊임없이 묘사된다.
- 래리: (안나의) 전시를 어떻게 생각해요?
- 앨리스: 거짓투성이죠. 남의 슬픔을 너무 아름답게 찍었어요. 예술 애호가라고 잘난 척 떠드는 작자들은 아름답다고 찬사를 보내겠지만 사진 속 인물들은 슬프고 외로워요. 그런데 사진은 세상을 아름답게 왜곡시키죠. 따라서 이 전시는 말짱 사기극인데 우습게도 사람들은 거짓에 열광하죠.
사진을 사랑으로 대체하면 ‘사랑은 사람(세상)을 아름답게 왜곡시키고 말짱 사기극인데, 우습게도 사람들은 그 거짓인 사랑에 열광한다’는 사랑을 믿지 않고 사랑에 부정적인 앨리스의 태도를 알 수 있다. 또한 앨리스는 댄과 동거하고 연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깊은 슬픔과 외로움, 소외감과 고립감을 느끼고 있다고도 짐작할 수 있다.
- 래리: 당신 애인이 쓴 책이 당신 얘기라죠?
- 앨리스: 일부만.
- 래리: 빼먹은 건 뭐요?
- 앨리스: 진실(truth).
앨리스는 댄이 소설가의 꿈을 이루도록 자신의 인생을 마음껏 이용하도록 댄에게 헌신하고 그를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를 완전히 믿지는 않기에 가면을 쓴 채 진실을 감추고 있고, 솔직하지 않다고 알 수 있다.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래리는 안나에게 앨리스를 ‘순진해 보이지만 영악하고, 솔직해 보이고 싶어 한다’고 정확하게 평가한다.
- 앨리스: 옷을 입고도 즐길 수 있는 게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벗고 하면 더 재밌죠.
- 래리: 얼음처럼 차가워. 전혀 친밀감을 느낄 수 없어.
앨리스의 헌신적인 사랑은 스트립 댄서로서 사람들에게 무시받을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과 열등감, 자존심이 세서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깊은 외로움과 소외감, 연인이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비롯한 집착과 의존성에 바탕을 둔다. 댄이 안나에게 구애했다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댄과의 말다툼에서 ‘각오하고 있어. 날 떠나는 거’, ‘내가 부끄러워?’ 등의 대사에서 앨리스의 불안하고 복잡한 심리를 짐작할 수 있다.
- 댄: (해리가 아니라) 안나를 만났어. 난 그녀를 사랑해. 만난 지 1년 됐어. 전시회 때부터야.
- 앨리스: 성공한 여자가 좋아?
- 댄: 아냐, 그녀는 내게 집착하지 않아.
안나와의 외도를 고백하는 댄에게 앨리스는 그럼에도 ‘계속 만나 줄 거야?’, ‘아직 나 좋아해? 거짓말. 다 알아. 안아 줄래?’, ‘날 사랑했어? 뭐가 부족한 거야? 나만큼 널 사랑할 사람은 없어’라며 댄의 사랑이 거짓이라고 진작부터 생각했으면서도 그에게 매달리고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어서, 붙잡아 두고 싶어서 사랑을 퍼주는 앨리스의 사랑도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댄과 그 방식은 다르지만, 댄과 마찬가지로 유아기적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세 명의 인물과 달리 앨리스의 마음은 대사가 아닌 행동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서 짐작하기 어려운데, 그만큼 앨리스는 자신의 복잡한 내면을 감추거나 왜곡하는데 익숙한 모호하고 헷갈리는 불투명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순간의 선택이고, 거부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하는 앨리스의 사랑은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보이지만, 선택이 아니라 ‘거부’에 방점을 둔 ‘이젠 널 사랑 안 해, 안녕’이라며 언제든 회피하고 떠날 수 있는, 상대를 늘 불신해서 항상 이별을 준비하는 불안정한 사랑이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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